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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第二章 광동행(廣東行)(5)
고개를 끄덕인 백아의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격투가 그려졌다.
다른 것이야 어쨌든 장청은 일류 고수임엔 분명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을 몰아친 그 도격. 지방의 무관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무공의 소유자라는 점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한 백아는 장청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표행에 관심 있어요?”
“표행?”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경을 바라본 백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돼서 데려온 건데, 괜찮겠지?”
“아니, 분명히 환영할 일이긴 한데 말이야…….”
유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백아를 따라온 장청을 힐끗 쳐다보았다.
분명히 일류 고수가 표행에 합류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그 고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거나 신용할 수 없는 자라면 곤란하지만, 벽산도 장청이라면 호남에서만 머문 유경 역시 그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의 협객이었기에, 두 손을 들고 환영하지는 못할지언정 합류를 거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서연이었다.
‘괜찮으려나.’
유경은 곁눈질로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의장의 무관을 다 돌아봤지만 백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네 번째로 찾아간 무관에 붙들려 진땀을 빼야 했다. 형산 문하라는 관주는 장로의 적전인 서연을 그냥 보내 주지 않으려 했고, 서연과 유경은 한참 동안 그곳 문하생들의 시연을 보며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던져 주어야 했다.
당연히 서연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사저, 괜찮겠죠?”
“표국에서 받아들인다면 상관없어.”
안도한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난 광주까지만 같이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에에?”
유경은 백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느낀 백아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표행에 동행할 거라고 했을 뿐이야. 표국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한 적 없는데.”
“뭐?”
“물론 산적을 만나면 돕기야 하겠지만 말야.”
그렇지 않냐는 듯한 표정의 백아를 본 장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유경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고, 유경의 시선을 느낀 서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곤 입술을 들썩였다.
“그건 곤란해.”
“어째서?”
“일행이 아닌 사람이 벌인 일까지 수습해 줄 이유는 없어요. 게다가 우리 형산은 당신을 일행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해요.”
“이봐요, 소저…….”
“그럼 이만 나가 줬으면 하는데요.”
축객령(逐客令)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서연을 본 백아는 한숨을 내쉬며 장청을 끌고 객점 밖으로 나갔다.
얼굴 가득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던 장청은 객점 밖으로 나와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여잔 누구야?”
“유서연. 형산 적전이고, 무공은 절정이라고들 하더군요.”
“절정? 저 나이에?”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젓던 장청은 몇 번이나 재차 확인하려 했다.
그것이 열 번에 달하자, 백아의 얼굴엔 짜증이 감돌았다.
“산중수련(山中修練)을 무려 팔 년씩이나 한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하단 말야?”
“형산오신검 중 하나인 이화난검을 칠성까지 익혔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죠.”
“젠장. 완전히 헛살았구만.”
투덜거리는 장청과 달리 백아는 입술을 깨물곤 생각에 잠겼다.
산중수련.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수련에만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수련법. 간혹 생각 없는 사람들은 그것이 쓸모없는 행동이라 비웃지만, 산중수련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인연을 끊는다. 사람을 만날 시간조차 수련에 쏟는다. 잠을 자는 시간마저도 줄여 검을 잡는다.
당연히 무공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의 수련보다는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며 산속에 처박혀 수련에만 전념하는 하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했다.
사실은 그들에게 그럴 의지가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지가 부족해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제대로 된 의지가 없는 사람의 산중수련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었다. 그렇기에 비효율적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의지가 있는 사람의 경우는 달랐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정말 독한 여잔가 보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장청은 백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네 사저라고?”
“적전과 평제자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죠.”
“너도 고생이 심하겠구나.”
“별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딱 잘라 말하는 듯한 어투 때문인지, 백아에게서 고개를 돌린 장청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백아는 장청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곤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서 예상했던 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벽산도가 맞는 거야?”
“맞아.”
“……그런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사부를 만나서 가진 걸 다 털렸다는군.”
“…….”
할 말을 잃어버린 유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장청을 바라보았다.
벽산도라 불리며 나름대로 명성을 떨쳐 왔던 그를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이런 모습이 왠지 잘 어울린다는 데에 있었다.
비록 복건무림이 중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하지만, 한 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평가를 받는 무인이 이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절정에 가까이 간 고수라기보다는 궁상맞은 중년 남성에 더 가까운 모습. 아무리 봐도 소문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표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늦어 버렸거든.”
“늦다니?”
“관아엔 형양표국 외 삼 인(三人)으로 신고했으니까. 다시 신고하고 결과를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어.”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이 추가된다는 것은 이전에 받은 허락이 취소된다는 것을 뜻했다.
다시 통관 절차를 밟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만약 그런 절차를 다시 밟는다면 광주 태수와 한 약속일을 지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새 인원을 추가하려면 형양표국의 소속으로 받아들이는 방법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표국에도 표국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어. 표사로 받아들일 것도 아니면서 합류를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야.”
잠시 말을 멈췄던 유경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령 내가 허락한다 해도 전 표두가 허락하지 않을걸.”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이 표행의 책임자는 서연과 전일기였다. 그중에서도 표행의 책임자는 전일기이기에, 만약 서연이 허락했더라도 그가 반대한다면 장청의 합류는 불가능했다.
“뭐, 벽산도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벽산도 본인이 표사는 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딱히 거부한 건 아니야. 광주까지라면 받아들이지.”
“그건 제가 관심이 없는데요.”
“……그러냐.”
“전 표두라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군요.”
장청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유경은 다시 백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정말 복건의 벽산도 장청이 맞는 거야?”
“그래.”
“복건의 벽산도라면 내가 맞는데.”
“……뭐, 일단 믿어 드리죠.”
유경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얼버무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봐.”
“믿는다니까요.”
이건 완전히 귀찮으니 믿어 준다는 식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장청은 도를 뽑아 들었다. 놀란 유경은 몸을 뒤로 날리며 검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민망하게도 장청은 뽑아 든 도를 들어 정면의 바위를 겨눴다.
“증명해 보이마.”
평소와는 다른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장청은 서서히 기를 끌어올렸다.
옷자락이 펄럭였다. 바람이 부는 방향과 상관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옷자락을 본 백아는 눈을 빛냈다.
‘역시.’
겨우 한 끼를 채웠을 뿐, 열흘 동안 굶어 생긴 체력의 손실은 아직 보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기도를 보인다면, 몸 상태가 최상일 때의 실력은 지금보다 몇 수는 위일 것이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던 도가 멈췄다. 언뜻언뜻 푸른 기운이 도에 맺혔다.
숨을 몇 번 들이쉴 시간이 지나고, 멈춰 있던 도가 빠르게 움직였다.
귀청을 찢어 놓을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시야를 가렸다. 그 뒤를 따라 이어진 몇 차례의 폭음.
피어오른 먼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이제 믿겠냐?”
“도련님!”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장청은 갑자기 들이닥친 박도(朴刀)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난 괜찮은데 말이야…….”
손을 들어 전일기를 진정시킨 유경은 조금 전까지 한쪽 벽면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를 바라보았다.
높이만 네 척을 넘어 보이던 바위는 넷으로 쪼개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자잘한 조각은 세기조차 힘들 정도. 이 정도라면, 강기(|氣)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검기(劍氣)의 극에 다다랐다 할 수 있는 수준임엔 분명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유경은 고개를 돌려 전일기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전일기는 유경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를 본 유경은 손가락을 뻗어 부서진 바위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본 전일기의 눈에 감탄의 빛이 돌았다.
“누가 이렇게 만든 겁니까?”
“임시 표사.”
“……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전일기의 얼굴은 벙 찐 듯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第三章 건천공(乾天功), 일보 전진(一步 前進)(1)
광동성의 성도 광주(廣州)는 요리로 유명하다.
식재광주(食在廣州)라는 말이 있다. 주로 맛에만 치중하는 다른 지방의 요리와 달리 양생(養生)을 중시하는 광주의 요리는 맛 외의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 미재사천(味在四川)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천의 요리도 광주의 요리엔 다소 양보하기도 한다.
그런 광주의 요리를 앞에 두고도 젓가락을 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미맹(味盲)이거나 커다란 걱정거리가 있는 것이리라.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너무 낙관했던 게 실수였다.
어찌 된 일인지 광주 태수는 약속을 어겼다. 약속한 물품을 보낸 형양표국과 형산으로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광주 태수를 만난다면 이유라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형양표국과 형산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면회를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요?”
“태산이겠지.”
“예?”
“관저에 있던 무인. 분명히 태산 십검수(泰山 十劍手) 중 한 명이었어.”
기억을 되새기던 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산동성에 근거를 둔 태산이 이 먼 광동에까지 손을 뻗쳤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수야.”
태산이 있는 산동과 광동은 멀었다. 배를 이용해도 한 달은 걸릴 거리.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야심을 가진 자에겐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산동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성은 하북, 하남과 강소, 안휘다.
하북엔 진주 언가가, 하남엔 소림과 숭산파가 있다. 그리고 안휘엔 제왕검법(帝王劍法)으로 유명한 남궁세가가 자리하고 있다.
그 세 성으로 진출하기 위해선 그들과 척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산은 산동마저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산동엔 황보가와 제갈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들은 태산의 북쪽에서 산동의 북부를 장악하고 태산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거대 문파나 거대 세가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은 없다.
태산 역시 그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경쟁자가 없는 강소성으로의 진출을 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확장은 강소를 지나 절강에 닿았다.
그것이 벌써 사 년 전. 그렇다면 광동 역시 그들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아마 태수를 매수했겠지.”
“……그렇군요.”
유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 이놈을 그냥!”
“전 표두.”
“예, 도련님.”
“성질 좀 죽여. 태수를 죽이면 형양표국은 역도(逆徒)가 되어 버린다구.”
퉁명스럽게 내뱉은 유경은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는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관부에 칼을 들이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약속을 저버렸다 한들 관인(官人)이 사인(私人)이 되지는 않는다.
애써 화를 삭이고 있는 유경의 귀에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