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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第三章 건천공(乾天功), 일보 전진(一步 前進)(2)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사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곤란하다. 이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실패를 뜻했다.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이라는 것은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입술을 깨문 서연은 백아를 바라보았다.
“남의 일 같은 태도야, 너.”
“남의 일이니까요.”
“뭐?”
“이번 일은 형산과 형양표국의 일입니다.”
“너도 형산 문하야.”
“형산 문하일 뿐, 형산은 아닙니다.”
“너…….”
“형산 문하로서 이 일을 보는 것과 형산이라는 집단으로서 이 일을 보는 건 다르지요.”
말이 막힌다.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분리할 이유가 없는 것을 분리시키는 백아를 보며, 서연은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럼, 형산 문하로서 볼 때는 어떻지?”
“지시를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게 없으니까요.”
서연은 말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맞는 말이었다.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수뇌부, 혹은 그 대행을 맡은 적전제자의 권한이었다.
평제자들은 그들이 내린 결정에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지시를 따른다. 비록 불합리해 보이는 결정이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의견을 낼 수도 없었다.
그것이 형산의 오래된 규율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언뜻 드러낸 서연을 바라본 백아는 잠시 콧등을 긁적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건 광주 태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마찬가지라니?”
“조금 전에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느낌이 들어, 유경과 서연은 입을 다문 채 백아를 바라보았다.
“병필수당태감(秉筆隨堂太監)의 조카가 양생을 위해 광주로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성문을 지날 때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덕분인지 그들의 대화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들을 수 있을 정도. 그것이 막 눈에 들어온 도시의 모습을 살피던 백아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백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엔 당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런 일을 알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이었을 것이다.
그런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유경과 서연, 전일기의 얼굴을 본 백아는 차분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의 책임자는 제가 아니라 사저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의 시선을 느낀 서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 * *
광주는 바다에 접해 있다. 그리고 강을 껴안고 있기도 하다.
바다로 흘러드는 주강(珠江)의 모습은 아름답다. 완만하게 휘어진 강변. 그래서 그곳엔 그 경치를 즐기기 위한 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세워진 전각 안에서 자줏빛 의복을 걸친 청년이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왜구……라고 했나요?”
“왜요. 이상합니까?”
빙긋 웃은 사내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당혹감. 이상하다기보다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서연은 고개를 들어 정면의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병필수당태감(秉筆隨堂太監)의 조카라는 이 사내가 내건 조건은 하나, 왜구의 토벌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내걸 조건이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던 일이다. 당연히 서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혼란스러움을 느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의외야.’
저런 조건을 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백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배층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한다면 전혀 의외의 것은 아니다.
대륙 남단의 끝에 위치한 성(省)인 광동은 바다를 끼고 있다.
명의 해군력은 해금정책으로 인해 자꾸만 쇠퇴해 갔다. 작금에 있어선 해군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옛날 강력했던 정화의 함대는 옛 기록 속에만 남아, 이제는 그 자취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왜구의 침입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단은 남아 있지 않았고, 해군이 사라진 명은 왜구들의 좋은 약탈지로 변해 갔다.
비단 왜구뿐만은 아니었다. 명이나 안남, 류쿠의 사람들도 해적으로 면해 명의 해안을 노렸다. 심지어 그들 중엔 무리의 숫자가 천을 넘기는 경우도 있어 명의 골칫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관부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해적들 역시 그런 명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왜구를 포함한 해적을 막아 낼 수 없었던 정부는 해안가의 사람들을 해안에서 이십 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끌려간 백성들은 이주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관부의 눈을 피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돌아간 백성들은 또다시 해적들의 노략질과 관부의 추적에 시달리면서 하나씩 죽어 가, 해안가엔 반역의 기운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명의 정부는 강제 이주를 포기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해적들은 활개를 치고 있었으며, 명의 관부는 그런 해적들을 막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관부가 아닌 다른 집단이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무림 문파밖에 없어.’
관부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이 조직한 자치단만으로는 왜구들을 막을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의 규모가 커져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을 막을 수 있게 되어도 문제가 되었다.
큰 규모의 무력 집단은 언제나 역도로 돌변할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정부에서는 그런 집단이 탄생하는 것을 경계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숫자가 모이면 그들을 강제로 억눌렀다. 그렇기에 백성이 조직한 자체적인 자위단이 왜구를 막을 정도로 성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소수의 인원으로 해적들을 막을 수 있는 무림인뿐이었다.
‘문제는…….’
왜 이런 사람이 왜구들의 처리를 말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병필수당태감이라면 정부 요직은 아닐지언정 황궁의 요직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사람의 조카라면 그 역시도 일반인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왜구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년은 빙긋 웃었다.
“태감의 조카가 이런 걸 요구하는 게 이상하다는 겁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군요.”
“태감의 조카라고 해서 명의 백성이 아닌 건 아닙니다. 게다가 전 이 지방 출신입니다.”
거의 다 식어 버린 차를 다시 들이켠 청년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왜구와 관련된 좋지 못한 기억이 있지요.”
그 기억 때문일까.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백아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허락할 생각이군.’
명분도, 실리도 얻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확실히 왜구를 처리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광동성 내에서의 형산에 대한 평판은 올라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눈앞에 있는 청년의 도움이 없더라도 광주 태수를 압박할 수 있는 무형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 힘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무산되어 버린 광동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재차 시도할 수 있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 것을 놓칠 서연이 아니었다.
“받아들이죠.”
서연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산두(汕頭) 일대에 왜구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남오도(南澳島)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소리도 들리더군요.”
찻잔을 다시 바라본 청년은 찻잔이 비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잠시 그의 얼굴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차에 대한 욕구를 뿌리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정확한 수는 이곳 관부에서도 모릅니다. 글쎄…… 적어도 백 명은 넘는 걸로 생각되긴 합니다만. 그것도 추측일 뿐이라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군요.”
“최소 백 명 이상이라는 거군요.”
“하하, 그렇게 되나요?”
청년은 웃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왜구라 하나 백이 넘는다면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실례로 조정의 요청을 받고 왜구를 막아 내기 위해 나섰던 소림의 승려들이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몰살당했던 일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소림의 정예였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수가 아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 모두 일류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류급 고수도 여럿 있었고, 어느 정도 무명(武名)을 날리던 무승(武僧)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 대 일, 혹은 일 대 다수의 싸움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개개인의 무력보다는 집단의 운용이 중요한 싸움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수와 전술에서 밀린 소림승 모두는 멀고 먼 남방 해안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 경우에 비해 고수의 수가 부족한 형산이라 해도 오히려 살아남을 가능성은 소림승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형양표국의 표사들은 어느 정도 집단전에 능한 사람들이었고, 일천이 넘는 왜구들을 팔십여 명의 무승으로 상대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병력 비율도 훨씬 나은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성급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 서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청년은 살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동 수단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남을 사람들의 투숙비도 전부 관비로 처리하지요.”
어쩐지 함정에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미 약속을 한 상태이기에 명분을 가진 것은 저쪽이었고, 여기서 거절한다면 형산과 형양표국이 광동성에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것이 너무도 뻔했다.
그것을 깨달은 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약속, 믿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러죠.”
“……정말입니까?”
오히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쪽은 청년이었다.
“형산에서 내려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확실히, 그래.’
형산에서 내려온 사람은 마흔 정도였다. 그러나 이 표행에 참가하고 있는 것은 서연과 유경, 그리고 백아뿐이었다.
“그 인원으로 괜찮겠습니까?”
형양표국에서 데려온 표사들을 합쳐 봐야 겨우 서른 남짓. 백이 넘는 왜구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서연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까요.”
“하―.”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은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약속이라 해도 사지(死地)에 뛰어들려 하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려 할 뿐,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계산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청년은 서연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약속은 지키려고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결정타.
청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품속에 손을 집어넣은 청년은 작은 패(牌)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목질(木質)의 사각 패에 금박을 입혀 놓은 그것엔, 십이도감찰어사(十二道監察御史) 이진화(李辰華)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감찰어사?”
“권력을 가진 친족이 있다는 건 이래서 좋은 거지요.”
청년, 이진화는 빙긋 웃었다.
“산두에 도착하면 관병을 빌릴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부탁합니다.”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에 당황하는 사이, 그는 어느새 전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 무공을 익히고 있어.’
그냥 익힌 정도가 아니었다. 최소한 동년배 중에서는 상대를 찾기 힘들 정도. 물론 방금 보여 준 경공으로 판단했을 뿐이지만, 저 정도의 경공이라면 다른 무공 역시 대단한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백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재능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면 자신이 밀릴 이유가 없었다. 설령 재능이 없더라도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은 평범한 무인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했다.
삼류 무공을 가지고 평생을 바쳐도 원하는 일을 해낼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그것마저 놓아 버리면 더 이상 길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어쩌면 의미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우울함에 젖어 중얼거리던 백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을 걸었다. 주변은 진창. 간밤에 비가 왔기 때문인지 잘 정비되어 있었을 관도마저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곳을 걸으며 주변을 살피던 백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곤란해.’
산두는 아직 멀었다.
지금 있는 곳은 계양이었다. 산두와는 달리 내륙에 있는 곳. 비록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기는 하나, 내륙에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계양 주변의 촌락 역시 왜구의 습격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