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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第三章 건천공(乾天功), 일보 전진(一步 前進)(3)
“이곳까지 왜구가 들어왔었군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서연을 향해 입을 연 백아의 눈에, 검 끝이 부러진 왜도(倭刀)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 척 이 촌 정도. 왜인(倭人)들의 키와 별반 차이가 없는 길이다.
‘어떻게 휘두르는 거지.’
왜인들의 키는 커 봐야 오 척을 넘지 않았다. 아니, 그 오 척도 드물었다. 잘해야 사 척 오 촌. 그중에서도 왜구의 키는 더 작아, 간신히 사 척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도저히 저런 검을 휘두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왜인 중에 큰 사람이 있거나, 왜구들이 저런 검을 즐겨 쓴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산두에서 관병을 빌릴 수나 있을지 궁금한데요. 안 그렇습니까, 사저?”
“처음부터 기대한 적도 없어.”
걱정스레 말을 건넨 유경을 머쓱하게 만든 서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왜 따라온 거죠?”
“아니, 뭐…….”
“뭐죠?”
“……관부에서 일을 안 주더군.”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은 장청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어쨌거나 지금은 한 명의 인원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것도 일류 고수라면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숫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혼자서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를 일행에 포함시키는 것뿐이었기에, 장청의 합류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어쨌든, 잘 부탁해요.”
짧게 말한 서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동행한 사람의 수는 스물둘. 그나마 쓸 만한 사람의 수는 별로 없었고, 형양표국의 유일한 일류 고수인 전일기는 광주를 떠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광주 태수가 그와의 교섭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건지, 아니면 나쁜 건지 모르겠군.’
정말 교섭을 위한 거라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왜구와 상대할 전력을 줄이려는 의도였다면 그 반대였다. 어쩌면 광주 태수는 형양표국과 형산의 전멸을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태산과 어떤 거래를 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왜 말을 하지 않지?”
“……아, 죄송합니다.”
“됐어.”
차가운 표정을 지은 서연은 고개를 돌렸다.
‘곤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대충 짐작은 갔다.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것은 각개격파이나 그것이 노략질만을 목적으로 하는 왜구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성공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노략질이 목적이라면 흩어져 있을 가능성도 없어.’
서연 역시 그것을 짐작했기에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으리라.
“그런데 말야.”
“뭡니까.”
“너희, 왜구하고 싸워 본 적 있냐?”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백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장청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구는 산적하고 달라. 경험도 없는 놈들 데려가 봤자 죽을 뿐이라구.”
“무슨 뜻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놈들은 전문 집단이라는 말이오. 아마 전장에선 당신들보다 더 잘 싸울걸?”
“그런가요?”
“……아무 생각도 없는 거요, 아니면 자신이 넘쳐흐르는 거요?”
“둘 다 아니에요.”
갑자기 발이 멈춘다.
갑자기 걸음을 그친 서연과 장청을 본 백아는 의아함이 담긴 기색을 떠올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이상한 느낌을 받았고, 그 느낌은 점점 하나의 형체가 되어 갔다.
“벌써 만났군요.”
“적어도 마흔은 넘는 것 같소만…….”
“도망치자는 건가요?”
“……그것도 이미 늦은 것 같군.”
장청은 도갑에서 도를 꺼내 들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아의 시선 역시 그를 따랐다.
‘이게 왜구들인가.’
빈약한 갑주를 걸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왜구는 기이한 모양의 무기를 들고 있을 뿐, 그 어디를 봐도 전투로 단련된 자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렇군요.”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이미 포위망이 반쯤 갖춰져 있는 상태. 이 상황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죽음으로 이어지리라.
“유경.”
서연의 지시를 받은 유경은 형양표국의 표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셋, 혹은 넷씩 짝을 지은 그들은 서로 간격을 살피며 진을 형성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적합한 진형. 아마도 산적들을 상대할 협곡이었다면 최적의 진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툭 터진 모래밭. 따라서 저 진형으로는 왜구들을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안 돼.’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그뿐.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이를 악문 백아가 검을 꺼낼 때, 그들을 지켜보던 왜구들이 달려들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던 모양. 그게 아니라면 저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백아는 어느새 다가온 왜구들을 노려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막 그것을 내뻗으려 한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빌어먹을.’
잔뜩 숙인 머리 위로 왜도가 스쳤다.
쓰러진 표사들은 벌써 열이 넘어갔다. 반면 왜구들의 피해는 적었다. 고작 넷에 불과한 사상자. 그것도 서연과 장청이 쓰러뜨린 자들뿐, 다른 사람들은 그저 공격을 막아 내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빨라.’
재차 날아든 왜도를 튕겨 낸 백아는 거리를 벌렸다.
대단한 공격이 날아드는 건 아니다. 그저 단발성 공격에 지나지 않는 큰 동작. 한 번 들어올 때마다 수십 군데의 허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공격할 수 없었다.
드러난 허점을 향해 공격하려는 순간 이격이 날아들었다. 설령 공격이 성공하더라도 재차 날아든 왜도에 부상을 입고, 다른 왜구의 칼에 쓰러질 뿐이다.
그렇게 쓰러진 표사만 여섯, 아니 막 일곱이 되었다.
지형 역시 왜구들의 편이었다.
산과 잘 닦인 연무장에서만 수련해 왔던 백아로서는 모래밭에서의 싸움이 낯설기만 했다.
“끼요옷!”
“……젠장.”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든 왜구를 피한 백아는 뒤에서 내지른 다른 왜구의 검에 팔을 스쳤다.
큰 상처는 아니나, 상처가 생겼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캬악!”
왜구의 비명이 들렸다. 다섯 명째. 그러나 표사들의 피해는 조금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의외로 잘 버티는데.”
낯선 목소리. 중원인이었다.
“그럼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원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멈췄어.’
미친 듯이 달려들던 왜구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멈춰 섰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새로 나타난 중원인의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것은 그들과 싸우던 형산과 형양표국의 사람들, 그리고 장청이었다.
“중원인이 어째서…….”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고 해 두지.”
입가에 웃음을 띤 그는 왜구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자가 우두머린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 이미 짐작한 일이기도 했다.
왜구로부터 검을 받아 든 중년의 중원인은 입가에 맺힌 미소를 더 짙게 띠었다.
“시간이 없군. 빨리 끝내야겠어.”
“그렇게 쉬울 것 같나요?”
“안 될 것도 없지.”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을 가장 잘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압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받고 있는 서연과 장청이었다.
일류, 그리고 절정의 고수들이나 앞에 서 있는 사내는 또 다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왜구들과 함께 있는 걸까.
‘이길 수 없어.’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 자꾸만 몸이 뒤로 움직였다.
네 번째 걸음을 내디딘 순간, 백광을 토해 낸 검이 그들을 향했다.
두 개의 검이 비명을 토해 냈다.
갑작스럽게 급변하는 흐름에 밀려든 다른 흐름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애처롭게 흔들렸다.
‘상대가 안 돼.’
먼저 달려들었던 장청은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고작 삼 합. 기묘하게 비틀린 검결에 밀린 그가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그 정도였다.
이번 역시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끼어들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끼어든다면 저쪽에서 지켜보는 왜구들 역시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남는 것은 전멸뿐.
지금은 희박한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주위를 둘러봤다.
‘정면에 열다섯, 왼쪽에 열둘, 오른쪽에…… 아홉.’
남은 왜구의 수는 서른여섯. 이쪽은 겨우 열 명 남짓이다.
카앙―!
다시 한 번 검이 비명을 토했다.
“큭!”
날카로운 왜도가 서연의 팔을 스쳤다.
한 번 상처를 입은 서연은 계속 수세에 몰렸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상처를 입은 순간부터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도 깨어져 이제는 거의 일방적인 공격과 패퇴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기적은 없었다.
“유경.”
“……왜?”
“저 사람들, 수습할 수 있어?”
품속에 손을 넣은 백아는 쓰러진 사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을 띄우던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백아의 눈은 어떤 독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있어.”
“좋아.”
고개를 끄덕인 백아는 다시 서연과 사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균형은 깨졌다. 그나마도 임기응변으로 버티고 있을 뿐, 이대로라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빌어먹을.’
품속에 들어가 있던 손이 빠져나왔다. 그 직후 이어진 폭음. 자욱한 연기 뒤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그, 그거 뭐야!”
“그런 거 말할 시간 없어.”
검을 빼 들고 연기 속으로 달려들었다.
무려 팔 년을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무리 없이 작동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화산의 그’에게 사용하려 준비한 물건이었으니까.
‘없어?’
연기를 헤치고 달려간 곳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 모습에 당황한 백아는 발을 멈췄고, 그 순간 날아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뒤!”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백아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사선으로 날아든 검은 옷깃만을 베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백아는 검을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놈…….”
가는 침 수십 개가 박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사내의 입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절반…… 아니, 안 돼.’
저 모습이 되고서도 여전히 자신을 압도하고 있다.
백아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유경이 폭음에 놀란 왜구 몇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여전히 이쪽이 열세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청은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고, 서연은 부상을 입어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것도 꽤 큰 부상인지 입에선 연방 피를 흘려 대고 있었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무공은 물론 생명까지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당한 게 멍청한 거 아닌가?”
“이 자식이!”
상당히 분노했는지, 사내는 조금 전의 진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폭급함을 드러냈다.
‘뭐야…….’
사내의 기운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공인가.”
“빌어먹을 놈!”
사내의 기파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강했다. 불안정할망정, 그 기파는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정공을 익혔을 거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마공으로 저런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없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런 사람이 이곳에서 왜구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눈앞의 사내 역시 정공을 익히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도발을 통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 치명적인 실수일지도 모른다.
손바닥에서 땀이 흘렀다. 덥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긴장한 탓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사내의 눈치를 살핀 백아는 검을 들어 올렸다.
“곱게 죽진 못할 거다.”
“글쎄…….”
말끝을 흐린다. 막 움직인 사내의 손. 그 순간, 백아는 모래 깊숙이 찔러 넣었던 왼발을 위로 차 올리며 검을 집어 던졌다.
백아의 손을 떠난 검은 사내의 왼쪽 허벅지를 스쳤다.
“이자시익―!”
얕은 상처가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탓인지,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사내의 고함에 그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왜구들의 안색이 변했다.
자세한 상황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드러난 상황만으로는 저 사내가 백아에게 패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너, 너…….”
“빨리 피해, 멍청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함을 지르는 백아를 본 유경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정상적인 결과가 아닐 것이다. 조금 전에 사용했던 화기(火器)와 마찬가지, 기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구들 역시 곧 눈치 챌 것이다. 그전에 왜구들을 전부 쓰러뜨리거나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 그러나 아직 남은 왜구의 수는 아군의 두 배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