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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第三章 건천공(乾天功), 일보 전진(一步 前進)(4)
공격을 할 수는 없는 상황. 지금은 피해야 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유경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표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막 몸을 추스른 장청 역시 당황한 왜구들을 밀어 내고는 쓰러진 표사들을 수습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왜구들이 다시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그들의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다.
‘사저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거라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으아아아아!”
왜도가 날아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 간신히 피해 냈지만, 바닥에 등이 닿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다음 공격이 있다면, 분명히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검을 휘두르려던 사내의 몸이 갑작스레 휘청였다.
“크. 크흐흣. 크…… 커, 컥…….”
“……사저?”
사내의 가슴에 박힌 검을 본 백아는 휘청거리는 그를 걷어차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을 잃은 줄만 알았던 서연이 가쁜 숨을 내쉬며 쓰러진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서히 눈이 감기며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려 하던 왜구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일단 후퇴해!”
유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는 하나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제기랄.”
쓰러진 서연을 들춰 업은 백아의 신형이 서쪽을 향했다.
* * *
“괜찮겠습니까.”
“뭐가.”
“광동성 남동부는 관군도 손을 못 쓸 정도잖습니까.”
청의를 입은 중년 사내의 말을 듣던 자줏빛 의복의 청년은 손을 내저었다.
“손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지. 그렇지 않아?”
낡은 죽간(竹簡)을 뒤적거리던 청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 좀 봐! 대단하지 않아?”
“도련님.”
“감찰어사야.”
“태산을 잡으시려는 겁니까?”
자신의 말을 무시한 사내를 향해 눈살을 찌푸린 청년, 이진화는 사내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신 겁니까.”
“형산이라면 괜찮겠지.”
“예?”
불신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사내는 자신의 작은 주인을 바라보았다.
구파에 속한 화산이라면 모를까, 오악 검파는 그 덩치에 비해 쓸 만한 고수의 수가 적었다. 그것은 형산 역시 마찬가지. 그들로서는 왜구를 막아 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겨우 서른 정도로 그들을 몰아 낼 수는 없습니다.”
“형산이니까.”
“무슨…… 소리십니까?”
“몇 달 전에 형산 문인을 만났었거든.”
읽고 있던 죽간을 다시 접은 이진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불신이 가득한 표정이다.
이진화는 그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마 그때의 자신 역시 저것과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형산 문인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
이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산 문인 모두가 그 정도라면 이미 형산은 무당과 소림을 제쳤으리라.
“……그래도 괜찮을 거야.”
“예?”
“비슷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얼굴은 달랐다. 몇 달 전에 본 사내가 유약한 서생에 가까웠다면 이번에 본 소년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 둘의 모습을 떠올린 이진화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죽어도 하는 수 없지. 안 그래?”
* * *
우거진 수풀을 지나 밀림(密林)이라 해도 될 정도로 우거진 나무 사이를 뚫자, 또 다른 수림(樹林)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함께 도주하던 표사들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췄다. 뒤처졌거나, 길이 갈렸거나, 그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직도…….’
가깝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렸다. 극도로 예민해진 귀가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는 왜구의 존재를 알렸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떨쳐 내고도 남았을 것이나, 부상자를 업고 있는 지금은 저들을 떨쳐 낼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러단 죽어.’
자신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한 시진만 지나면 서연은 죽을 것이다.
달리는 도중에도 숨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았지만 보이는 것은 나무뿐. 수색을 피할 수 있을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달리니 서서히 체력이 소진되려 했다. 아직 얼마간은 더 버틸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사저.”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백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저 먼 곳에선 왜구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모습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검이 내뿜는 반사광은 그들이 있는 곳을 알려 주고 있었다.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달리는 것도 무리였다.
입술을 깨문 채 주위를 둘러보던 백아의 눈에 작은 모옥(茅屋)이 보였다.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사냥꾼이 사냥 중에 하룻밤 묵기 위해 지었을 듯한 곳. 후미진 곳에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안 돼.’
자신이 발견했다면 왜구들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고개를 뒤로 돌려 왜구들과의 거리를 확인한 백아는 서연을 업은 채 모옥 근처로 이동했다.
발을 대어 지반의 굳기를 확인한 백아는 서연을 내려놓은 채 손바닥으로 재차 지반의 굳기를 확인했다.
단단하지만, 바위만큼은 아니다.
“됐어.”
주변의 나뭇가지를 베어 모은 백아는 다시 한 번 거리를 살핀 후 내력을 끌어올려 손에 집중시켰다.
내력을 실어서인지, 단단한 지반이 쉽게 파였다.
모옥 밑의 흙을 파 낸 백아는 서연을 그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는 사이에도 왜구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슬슬 위험할 정도로 간격이 줄어든 것을 느낀 백아는 발밑에 놓인 돌을 집어 던져 주의를 분산시키려 했다.
떨어진 돌은 공교롭게도 늪으로 떨어졌다. 찰방거리는 소리가 멀리 퍼져 추적 중이던 왜구들의 주의를 끌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물소리를 들은 왜구들의 발이 빨라졌다.
‘후우―.’
잘라 낸 나뭇가지들을 든 채, 백아 역시 파 놓은 모옥 밑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밀어 낸 흙을 쌓고 그 위에 잘린 나뭇가지들을 꽂아 시야를 가렸다. 곧게 뻗은 가지만 잘라 처음부터 이곳에서 자란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효과. 밖에서는 이 안쪽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한 백아는 겉옷을 벗고는 그 위에 흙을 뿌려 빈틈을 막았다.
“……위험해.”
도주로 인해 가해진 충격 때문인지, 서연의 상태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명문혈(命門穴)에 손을 댄 백아는 내력을 끌어올려 혈을 탐색했다.
어떤 내력을 익혔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내력을 밀어 넣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내력을 끌어올린 백아는 서서히 내력을 밀어 넣어 열린 혈을 탐색해 나갔다.
‘건천공이야.’
행운이라 해야 할까. 내력의 흐름을 탐색하는 데 걸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바깥에서 여럿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서연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어차피 혼자서는 저들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가다듬은 백아는 다시 내력을 끌어올렸다.
명문을 통해 흘러 들어간 내력이 열린 혈을 따라 이어진 통로로 움직였다.
반발은 없었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기공으로 다져진 진기라 해도 그 사람의 성질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발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서연의 수련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런 서연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그 사내는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했던 걸까.
“으, 으음…….”
서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다. 그저 몸이 흘러든 내력에 반응하고 있는 것뿐.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한결 수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이각이 지난 후에 발생했다.
‘큭.’
내력이 부족했다.
비록 건천공으로 내력을 닦았다고는 하나 그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이전부터 익혀 온 삼합공으로 쌓은 내력은 건천공과 성질이 달라 단전 아래에 뭉쳐 버려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 곧 한계. 그러나 손을 뗄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조금만, 조금만 더 수련을 했다면…… 건천공을 일 년만 더 빨리 익힐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흘러 들어가던 내력이 멈춰 버리자 서연의 몸이 휘청거렸다.
백아 역시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고갈되어 버린 단전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고, 그 여파로 피가 조금씩 역류하고 있었다. 강한 힘이 흐르다 멈춰 버린 기맥이 흔들려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고통 속에서 백아는 무의식적으로 삼합공(三合功)을 운기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단전의 기운이 풀려나왔다. 삼합공 자체가 운기토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탓에 흘러든 내력의 양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고통은 사라져, 백아는 다시 운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을 수습한 백아는 흘러나온 내력을 건천공의 흐름대로 운용했다.
삼합공으로 쌓은 내력이 변질되어 간다. 기맥을 흐르며 잔류해 있는 건천공의 내력과 섞인 그것은 서서히 건천공의 성질을 띠어 갔다.
변질이 끝나고, 건천공의 내력이 된 그것은 다시 백아의 손바닥을 지나 서연의 명문으로 향했다.
천행(天幸)이다.
그러나 남은 내력은 충분치 않았다. 그것을 재차 확인한 백아는 흘려보내는 내력의 양을 줄였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지금 줄이지 않으면 조금 전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내력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백아는 조심스럽게 서연의 상태를 살피며 내력을 조절했다.
‘응?’
흘려보내는 내력의 양을 이 할까지 줄였을 때, 오히려 서연에게서 내력이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건천(乾天). 화(火)의 성질을 지닌 내력이 기맥으로 빨려든다.
“큭.”
갑작스럽게 역류한 내력이 몸을 헤집어 놓았다.
남아 있는 내력의 몇 배나 되는 힘이 밀려들었다. 저항하려는 힘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것은 건천공의 행로(行路)를 거꾸로 거슬러 갔다.
기절할 것만 같은 고통. 그러나 필사적으로 참아 냈다.
비명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안…… 돼.’
아직 왜구들은 떠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았다. 간간이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이상은 절대 허용할 수 없었다.
의외로 고통은 길지 않았다.
역류하던 내력이 단전에 고이 머물렀다. 세맥에 잠들어 있던 내력까지 한꺼번에 끌고 내려와,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내력이 단전에 쌓였다.
기연(奇緣)이라면 기연,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내려앉은 내력을 애써 수습한 백아는 긴 호흡을 내뱉은 후 서연을 살폈다.
맥박, 호흡, 모든 게 정상이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아는 반가부좌를 튼 채 자신의 내력을 살폈다.
반 갑자.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십 년이나 빨랐다.
‘……설마 내력을 빼앗은 건 아니겠지.’
상태를 확인한 백아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걱정했던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력이 빨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정신을 잃고 있을 뿐, 다른 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꽤 시간이 지났는지 왜구들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시진 정도는 기다려야겠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야.’
내력이 늘어났다고는 하나 아직 열이 넘는 왜구를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다시 내력을 가다듬으며, 백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답해.”
싸늘한 기운이 한껏 담긴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어떻게 건천공을 알고 있는 거지?”
막 몸을 추슬렀을 뿐인데도 목소리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억지로 그렇게 보이려 하는 것 같아 보여 백아는 왠지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살아나셨지요.”
“다시 묻겠어. 어떻게 건천공을 알고 있는 거지? 내력 수준으로 볼 때 꽤 오랫동안 익힌 것 같은데, 형산은 평제자에겐 그런 절학을 가르치지 않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해.”
잠시 말을 중단한 서연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널 죽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죽이겠다는 겁니까?”
“부탁한 적 없어.”
“참 편리한 관점이군요, 그거.”
“대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