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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第三章 건천공(乾天功), 일보 전진(一步 前進)(5)
여전했다. 그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어 백아는 웃음을 띤 채 말을 이었다.
“형산은 썩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기부금만 가져오면 절학을 팔아 버릴 만큼, 그리고 그렇게 절학을 얻은 사람이 그 절학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제대로 막아 내지도 못할 만큼 말입니다.”
“너…….”
“분명히 형산의 문인이 다른 문인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걸 막는 규율은 없지요.”
다만 들키면 곤란해지기에 감추고 있었을 뿐. 이라고 중얼거린 백아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곤란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고심하고 있다 해야 할까.
분명히 같은 문인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걸 막는 규율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규율은 있었다. 적어도 남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만이 무공을 전수할 수 있다는 규율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경우 백아는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 배웠을 수도 있는 무공을 다 잡아 주어야 할 대상이 될 뿐이다.
“누구지?”
“이미 형산을 떠났습니다.”
“그 일로?”
“다른 일입니다.”
“……구결을 불러 봐.”
결론이 났다는 것을, 그것도 자신에게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을 안 백아는 자신이 익히고 있는 구결을 불러 주었다.
“정확하네. 별문제 없겠어.”
약간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넨 서연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백아를 바라보았다.
“몇 년이나 됐지?”
“이 년이 좀 넘었군요.”
순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백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영약이라도 먹은 거야?”
백아는 고개를 저었고, 서연은 조금 전의 표정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도의 내력을 쌓을 수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을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이었다. 그저 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내력은 삼류 무인의 수준을 겨우 벗어날 정도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아직 일류는 아니다.
반 갑자.
이류를 조금 넘어 일류를 바라볼 수 있는 정도였다.
“말하기 싫다면 됐어.”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말할 게 없는 겁니다만.’
작게 투덜거린 백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원인을 안다면 다시 한 번 이런 기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원하던 수준까지는 곧 도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넘어 더 높은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짐작조차도 하지 못해 안타까움만 깊어졌다.
그것이 자신을 놓아 주지 않으려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저어 그것을 떨쳐 낸 백아는 일어선 상태로 내력을 돌렸다.
‘됐어.’
언뜻 손가락 끝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조금만 가다듬는다면 검기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일러.”
생각을 들킨 걸까.
“……그렇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젓는 백아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서연의 입이 열렸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수긍하는 거지?”
“사저가 저보다 강하니까요.”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대답에 질려 버린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건 광인(狂人)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공에만 집착한다면, 가진 무공은 강해진다 해도 그걸로 끝날 뿐이었다.
‘다른 말을 해도 듣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슬슬 나가도 될 것 같군요.”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긍정의 눈빛을 보낸 서연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백아는 입구를 막아 놓은 나뭇가지를 살짝 밀었다. 혹시라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왜구의 존재를 재차 확인한 백아는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입구를 열었다.
어두워진 하늘은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내력을 돌려야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술시 중반쯤 되었을 거라 생각한 백아는 고개를 들어 별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쪽이 남쪽인 것 같군요.”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는 거야?”
“계양 근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살짝 눈살을 찌푸린 서연은 주변을 확인했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인지 인위적인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지?”
“반 시진을 좀 넘겼습니다.”
“사십 리 정도 가면 되겠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곳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고개를 숙이던 서연의 발이 움직였고, 그녀를 바라보던 백아는 그 뒤를 따랐다.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1)
동악(東岳) 태산은 천자(天子)가 제(際)를 드리는 곳이다.
태산에 자리를 잡은 검문, 태산파의 발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단순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자의 눈에 든 태산의 문인이 금의위에 속한 무인을 불과 삼십여 초 만에 제압하는 일이 없었다면 태산은 그저 그런 지방의 문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태산십이검세(泰山十二劍勢).
금의위의 무사를 누르고, 지금의 태산을 만든 무공이었다.
“후우―.”
광동의 성도 광주에 내려온 태산의 문인, 태산 십검수의 일인인 위지영의 입에서 깊은 호흡이 들락거렸다.
태산십이검세. 그 검기로 상대의 내공을 흩을 수 있는 검결이 숨어 있었다. 혹자는 이 검법이 상대의 내공을 파괴하는 마검이라 말하나, 실상은 단지 흩어 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힘을 강하게 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소모되는 내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다.
“사형.”
뒤에서 들린 소리를 들은 위지영은 검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화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화산에서?”
의외의 이름을 들은 위지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섬서에 있는 화산이 이곳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화산은 다른 오악검파와 달리 세력 확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화산의 문인이 중원의 반대쪽에 있는 이곳까지 사람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왔다.
“왜 태산으로 가지 않고?”
그렇다.
용건이 있다면 태산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사형을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이곳에 온 태산 문인의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한 거냐, 아니면 나를 만나겠다고 한 거냐.”
“태산육검을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위지영은 호기심을 느꼈다.
태산 십검수 중 하나라 해도 강호에 그리 널리 알려지진 못했다. 물론 가진 무공은 절정에 달했지만, 주로 태산에 관련된 일만을 했기에 외부에서는 자신이 태산 십검수 중 하나인 것만을 알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서열을 알고 있는 것은 태산에서도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정확히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역시 화산이군.’
무섭도록 성장한 태산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구파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구파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이미 태산의 문하는 공동이나 점창의 문하 못지않은 대우를 받는다. 물론 그것이 한정된 부류의 태산 제자라 해도 공동에 가까운 감숙에서조차 공동의 문하보다 태산의 문하에 대한 처우가 더 좋았으니까.
그럼에도 화산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누구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곤란하다.
화산은 태산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서열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찾아온 화산 제자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태산이 화산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이래서야 당대에 화산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매화검수 같기는 했습니다만……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처음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런 듯합니다.”
“알았다.”
비끄러맨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위지영은 객실로 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화산 제자 운정이라 합니다.”
“태산의 위지영이오.”
방 안에 있던 청년의 인사를 받은 위지영은 똑같은 방법으로 대답을 건넸다.
잠깐의 정적을 이용해, 위지영은 자신을 운정이라 밝힌 청년을 관찰했다.
소매에 새겨진 붉은 매화, 분명한 매화검수다.
‘의외로군.’
매화검수라면 잘 벼려진 검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청년에게는 그런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날카롭기보다는 유연했다. 마치 물과 같은, 그런 느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에 긴장한 위지영은 어느새 고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건지 알 수 있겠소?”
“용건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는 건가?”
“태산 십검수 중 한 명을 보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매화검수가 태산 십검수에 신경을 쓴다……라는 거요?”
“물론 믿지 않으시겠지요.”
“당연하지.”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굉장히 불쾌했다.
분명히 태산 십검수는 매화검수에 비해 낮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후기지수 중 특출한 자를 뽑는다고는 하지만, 속가를 모두 더해도 천 명도 되지 않는 화산 문인 중 매화검수의 수는 서른이 넘었다. 반면 태산 십검수는 삼천이 넘는 문인 중에서 뽑힌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런데도 태산 십검수는 매화검수보다 낮은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자신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아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이 언제나 불쾌하게 느껴졌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 그런 기분에 눈살을 찌푸릴 때 그의 귀에 다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한유기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렇다면 형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만.”
“형산?”
눈꼬리를 약간 늘어뜨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위지영이 보였다.
그 모습에서 위지영의 불쾌감을 느낀 운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형산을 태산보다 높게 보는 게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라 함은…….”
“사실 제 문제가 아니라 제 윗분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말씀드릴 수는 없겠군요.”
위지영은 고개를 끄덕여 납득을 표현했다.
“그런데 말이오.”
“말씀하십시오.”
“내가 누군지 알아낼 정도라면 형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손에 넣었을 거라 생각하오만.”
운정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아아, 실례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상대를 본 운정은 웃음을 거두곤 다시 말을 이었다.
“태산의 움직임이야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산에 있는 노인네들이야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지만, 저같이 담이 작은 사람은 그러기 어렵지요.”
“그럼 형산은 주시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르지요.”
다시 슬쩍 미소를 지은 운정의 입이 잠시 닫혔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도 태산 십검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여섯 번째라는 걸 안 지도 오래되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소?”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 년 구 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으음…….’
위지영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자신이 태산 십검수의 일인이 된 것은 정확히 오 년 이 개월 전이었다.
“대단하군.”
오악검파에 속한 사람이라면 태산 십검수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열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거의 오 년이 되었다는 것은 화산의 정보망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주의를 게을리 한 탓인지 형산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이번 역시 형산이 호남을 벗어났다는 것만 알 뿐, 그 자세한 내막이나 인원에 대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소만.”
“광주 태수를 움직인 게 대협이시잖습니까.”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린 위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화산과 태산의 관계가 더 좋아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보를 주는 게 더 상황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오만.”
“화산 수석 장로와의 관계가 좋아진다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지겠지요.”
또 한 번 웃음을 문 운정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