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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2)


“해남이야.”
서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계양으로 돌아와 형양표국의 생존자들을 만난 지도 하루가 지났다. 살아남은 것은 유경을 포함해서 겨우 열 명 남짓. 그나마도 장청이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해남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하지만 해남의 무인이 왜구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건 몰라. 하지만 그 검이 남해검(南海劍)이었다는 건 분명해.”
“확실한 거요? 나도 남해검에 대해선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데, 그건 남해검으로는 보이지 않았소만.”
“왜도를 사용해서 달라 보인 것뿐이에요.”
그럴까.
장청은 그의 움직임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빨랐다는 것만 기억에 남아, 서연의 말을 반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의도적으로 말을 끊은 유경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걸 느낀 유경은 잠시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왜구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서연은 갑작스레 느껴진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쓰라린 느낌. 서연은 내상이 다 낫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곤란해.’
“그 사내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왜구들을 처리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무립니다.”
“이곳의 관군을 빌릴 수는 없어?”
“무리야. 이곳에 있는 병사들로는 여길 지키기도 벅찰걸?”
유경의 대답을 들은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주도(州都)도 아닌 일개 지방 도시의 병력으로는 치안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었다. 그것은 이곳 역시 마찬가지. 그러므로 이곳의 병사를 빌려 왜구를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말야.”
한동안 머리를 긁적이던 장청의 입이 열렸다.
“그럼 산두는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소리죠?”
“왜구가 여기까지 들어올 정도면 산두는 아예 초토화가 된 걸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무거운 침묵이 그곳을 덮었다.
바다가 가깝다고는 해도 계양은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 이곳까지 왜구가 다가왔다면 바다에 접해 있는 산두는 이미 왜구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어쩌면 이곳으로 다가왔던 왜구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실례합니다.”
문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아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유경과 장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린 서연은 백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라는 것을 확인한 백아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것은 한 쌍의 남녀였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은 안심한 백아가 그들을 향해 입을 열려 할 때, 그보다 먼저 바깥에 서 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형산 분들이십니까?”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揚家)의 양문위(揚文位)라 합니다.”
문밖에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을 본 백아의 머릿속으로 짤막한 단어가 스쳤다.
‘신창(神槍)……인가.’
등 뒤에 묶여 있는 긴 물체. 아마 창일 것이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당황이 가득한 표정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양문위의 등 뒤로 숨어 버리는 소녀를 본 백아와 유경, 서연과 장청은 그 모습에 오히려 더 당황해 버렸다.
“저, 저기, 진 소저.”
당황한 것은 양문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
뭔가 대단히 정신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백아는 뒤를 돌아보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그 결론은 정답에 가까웠다.
“그런데 여기 오신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요.”
“예?”
“목적이 있어서 오셨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백아의 생각을 정답이 아닌 정답에 가깝게 만든 서연은 양문위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없다면 이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아, 그게…….”
머리를 긁적이는 양문위를 본 백아는 그가 어려운 용건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지 그것을 말하기가 어려운 건지 구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어 막 질문을 던지려 하는 백아의 귀에 조금 전에 들었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저 양문위를 따라온 거라고 생각한 소녀의 입이 열렸다. 주도권을 빼앗긴 듯한 느낌. 그럼에도 불쾌함이 들지 않는 것은 소녀의 말투에서 약간의 당황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덤덤한 표정을 지은 백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그들을 보던 서연의 입이 열렸다.
“정확한 용건을 듣고 싶군요.”
그렇다. 단지 해적이 있기에 찾아왔다는 것은 너무 넓은 범위의 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을 느꼈는지, 양문위는 서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진 소저는 광동진가의 사람입니다.”
양문위의 입이 닫힌 것과 동시에 정적이 흘렀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 위축이 되어 버린 듯, 소녀는 양문위의 뒤에 숨어 버렸다.
당황스럽다. 뭐라고 딱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몇 마디의 말이 오갔다. 그러나 그 대화의 변두리로 몰린 백아는 대화에 참여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이런 두통을 선사한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곤란해.’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흠칫하며 고개를 숙여 버리는 소녀를 보며, 백아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진가영이라고 했었지.’
광동진가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저래서야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짐만 될 뿐이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양가장(揚家莊)의 양문위라고 합니다.”
“양가창법?”
“그렇습니다.”
서연과 양문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빤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버리는 진가영을 본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양문위는 일류 이상이었다. 어쩌면 절정에 도달했을지도 몰랐다. 왜구를 토벌해야 하는 자신들로서는 그의 합류를 반기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는 저 소녀였다.
‘내력은 나보다 강하지만…….’
사람을 죽여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을 상상이라도 해 보았을까.
“해적 퇴치가 목적인가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만으로는 무리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저런 여자를 데리고서 왜구들을 상대하겠다는 거요, 지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준 장청 대신 양문위에게 시선을 돌린 백아는, 의외로 그의 표정에 변화가 없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달관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게 너무도 신경 쓰였다.
“저,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정말인가요?”
“그, 그래요.”
대답을 들은 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 백아는 어떤 압박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 백아의 눈이 진가영을 향했다.
‘명문이 괜히 명문은 아니라는 건가.’
약간 힘겨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무리하는 것 같은 모습은 아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평가를 상향 조정한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가영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조금은 포함되어 었었지만 더 기분이 나쁜 건 타인을 향한 기세에 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서연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평소의 절반 정도의 힘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서연의 기세를, 그것도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데도 억눌리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곳이 아직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저.”
유경이 입을 연 것과 거의 동시에 억눌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백아는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약간 힘겨워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가는 회복이 더뎌진다는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자신이 약한 것이다.
“사람이 죽는 걸 본 적 있나요?”
백아는 가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는 것에 놀랐다.
“죽여 본 적은?”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보다 더한 충격이 와 닿았다. 그러나 백아는 곧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무가의 명문이라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닿아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면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것은 익숙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그런 것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럼, 됐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영의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담은 것인지.
반 시진 동안 이어진 회의가 끝날 때까지 백아는 그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 * *

광동의 동부에 위치한 곳, 해안에 닿아 있는 산두는 당연스레 항구로 발달해 갔다.
그럼에도 산두의 모습은 여타 항구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항(漁港)이라 해야 할까. 길게 이어진 장강에 면한 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음은 장강 유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산두는 항주나 청도와는 또 달랐다.
한강(韓江) 하구에 자리 잡아 바다에 면한 산두. 광동성에서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탓인지 중원의 일부라기보다는 남만의 일부로 보일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생각보다 작은데.”
유경의 말을 들은 백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도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은 마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스무 가구나 될까. 접안 시설도 갖춰지지 않아 작은 어선 외에는 정박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왜구도 적어.”
“……저걸 적다고 해도 되는 거야?”
“생각보다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유경에게서 시선을 뗀 백아는 다시 산두를 바라보았다.
남아 있는 왜구는 약 스무 명 정도였다. 다른 곳으로 노략질을 나갔는지, 아니면 남오도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난번에 싸웠던 사내 정도의 실력자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백아는 조심스럽게 왜구들을 살폈다.
어쩐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구라기보다는 평범한 어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모습. 허리춤에 맨 왜도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왜구라는 것을 알기 어려웠으리라.
한동안 그들을 살피던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있었던 싸움이 지금의 모습을 만든 원인일 것이다.
‘셋, 아니 넷.’
칼날 같은 느낌을 풍기는 것은 고작 넷. 그들만 제압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유경.”
“예?”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을 확인한 서연은 손가락을 들어 왜구 하나를 가리켰다.
“맡아.”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한 어투. 그 기세에 눌린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던진 서연은 마지막으로 양문위를 바라보았다.
“맡아 줄 수 있나요?”
“솔직히 자신 없군요.”
백아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연은 굳이 그것을 말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백아를 향해 잠깐 멈췄던 시선을 돌려 왜구들을 보았다.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럼, 가죠.”
서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따라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곳에 있던 모두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얕게 쳐진 담을 넘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왜구들은 기묘한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왜구는 검을 뽑던 도중에 날아든 공격을 막지 못해 숨이 멎었다.
그 운이 지독히도 나쁜 동료를 본 왜구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욕설을 내뱉는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날카롭게 해안을 울렸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
전투의 시작이었다.

숨이 거칠었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다. 폐부를 울리는 공기가 너무도 뜨겁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밤이 내린 지도 오래되었는데도, 몸속을 오가는 공기는 마치 사막의 그것처럼 건조해져 있었다.
손이 떨린다.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부작용일 것이다.
애써 몸을 진정시킨 백아는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