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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3)


살아남은 왜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쪽 역시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는 넷에 불과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다.
팔을 잃은 사람도,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허리를 감싸 쥔 손에선 힘이 빠지지 않았다.
‘큭.’
날카롭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스친 것만으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구들이 사용하는 칼은 약했다. 심지어 모래밭에 박힌 칼을 뽑다가 부러지는 일이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경우도 있었다. 중검(重劍)도 아닌 백아의 검에 부딪치자마자 부러지는 경우가 다반사.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라기보다는 장식품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구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형편없는 철로 만들었지만, 날카로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원의 검을 능가하고 있었다. 무기로서의 성능을 모두 포기한 채 날카로움에만 집중시킨 형태의 검.
정도(正道)의 무기가 아닌 사도(邪道)의 무기에 가까웠다.
“괜찮아?”
“그럭저럭.”
지혈을 마치고 금창약을 발랐다.
통증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피가 배어 나오지는 않았다. 격한 움직임은 무리겠지만, 일상적인 동작은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살짝 내기를 움직여 그것을 확인한 백아는 조금 전까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향해 발을 떼었다.
‘죽을 뻔했어.’
조금 전에 서연이 양문위에게 말했던, 맡아 달라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말 죽을 뻔했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시체를 바라보며 자연스레 눈을 찡그린 백아는 다시 찾아온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통증을 안겨 준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시체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게 공격해 들어왔을 땐 정말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랐다.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몸에 붙어 버린 비파검법 덕분일 것이다.
눈으로 따라가지 못했던 공격을 팔이 움직여 막아 냈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은 피할 수 없었고, 그것은 허리에 긴 상처를 남겼다.
만약 세 번째 공격이 들어왔다면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공격은 없었다.
그 공격이 막 시작되려 할 때, 허공을 격하고 날아든 창이 왜적의 가슴을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그 기억을 떠올린 백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선이 닿은 곳엔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양문위를 찾아낸 백아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신창(神槍)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형산에 있을 땐 군문(軍門)의 무공이기에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격 대상이 자신이었다면 창이 날아드는 것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왜장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왜장은 날아드는 창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군문의 무공답게 간결했다. 그러나 화려한 초식에 실린 힘보다 간결함에 담긴 그것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백아는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형산의 무학도 그런 것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형산의 무학 중에서 가장 간결한 것은 역시 비파검과 육합검이다. 그러나 그 두 검 모두 고급 무공으로는 취급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기초 입문 무공에 지나지 않을 뿐, 절정으로 갈 수 있는 무학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원비칠식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지만, 형산 무공 중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무공은 ‘백변천환형산운무십삼식(百變千幻衡山雲霧十三式)’이라는 난해한 검법이었다.
물론 난해한 검법이니만큼 이걸 익히고 있는 형산 문인은 없었다. 비급은 남아 있으나 익히려는 사람도 없었다. 이 무공을 익힐 바에야 등천제룡십이식이나 회풍낙안검을 익히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형산 무학 중 최고를 꼽으라면 역시나 백변천환형산운무십삼식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백아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길을 걸어온 거라면, 비파검으로는 절정으로 들어갈 수 없어.”
한숨이 터져 나온다.
버릴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짐을 떠맡은 기분.
그보다 더 골치 아픈 건, 그 짐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힘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선을 느꼈는지 양문위가 다가왔다.
“아무것도…….”
고개를 젓는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양문위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씁쓸함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그냥 왜구라기엔 너무 강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양문위는 창대로 왜구의 시체를 툭툭 건드리며 입을 열었다.
“왜구는 무림인들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 소림 승려들이 왜구에 의해 도륙당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평지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집단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닌 집단의 능력이 우선시되는 싸움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무래도 무림인들이 불리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아, 물론 절정의 무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지만 왜구들 쪽에도 그런 무인이 있다면 결국엔 집단전에 대한 훈련이 잘된 쪽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잠시 입을 닫은 채 생각에 골몰하던 양문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분명히 그런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런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요?”
기척도 없이 다가온 장청을 향해 창을 내뻗으려던 양문위는 곧 창을 거둬들였다.
“기척 정도는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마터면 공격할 뻔했군요.”
“미안하외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요?”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양문위는 창대로 쓰러진 왜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무림인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그런 훈련을 받았을 겁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그랬다. 처음에도 느꼈지만 이들의 공격은 허점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그것을 메워 줄 수 있는 속도가 있었다. 쉽게 말해, 동귀어진만을 노리는 무공을 익힌 무림인과 같다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고수라 한들, 동귀어진을 노리는 적을 만나면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침착하게 대응한다고 해도 위협적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기에, 그 틈을 노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아도 자연스레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마구잡이 같아도 어떤 흐름이 있긴 하더군.”
“예. 그게 훈련을 받았을 거라는 이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나누는 둘을 힐끗 쳐다본 백아는 발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흐름이라고 했지만 자신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해 그런 것을 눈치 챌 만한 여유를 얻지 못한 탓이다.
왠지 모를 자괴감에 휩싸인 백아는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저기요…….”
반사적으로 검을 뽑을 뻔했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벌써 검을 뽑아 베어 버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떨리는 팔을 애써 억누른 백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문위 오라버니 못 보셨어요?”
“……저쪽에 있습니다.”
“고마워요.”
꾸벅 인사를 하곤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내달리는 가영을 본 백아는 한층 더 짙어지는 자괴감을 느끼곤 고개를 저었다.
“저기, 그런데요.”
‘응?’
어느새 다시 다가온 가영의 모습에 놀란 백아의 몸이 뒤로 움직였다. 간신히 진정시킨 팔이 다시 허리에 맨 검에 닿았다. 아직 뽑은 것은 아니나,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양 부족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얼굴이 왜 그래요?”
“…….”
불쾌하다. 언제나 그렇지만, 타인에게 간섭 받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었다.
“잠깐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인데요?”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린 백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민하고 있던 내용, 왜구의 검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슬그머니 흘러나왔지만, 그다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백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가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아마 이렇게 움직였던 것 같은데요.”
하얀 손이 가볍게 움직인다.
빠른 동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 왜도의 움직임과 너무도 비슷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은 백아에게 그 움직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리라.
“이런 것 같았는데.”
“그렇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백아의 머릿속으로 왜구의 모습이 다시 그려졌다.
가영의 손짓에 의해 되살아난 검로가 자신을 위협한다. 여전히 빈틈이 많지만 위협적인 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비파검이 가진 한계 때문. 도를 닦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검술은 실전성이 부족하기에, 살기를 잔뜩 머금은 왜구의 검을 아무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는 초식은 없었다.
한계를 느끼는 것은 검술만이 아니었다. 안력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가영에 비해도 상당히 부족했다.
아마도 내력 때문일 것이다.
‘광동진가…….’
명문이 가진 힘이 어떤 건지 새삼스럽게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달려가는 가영을 본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명문인 것은 형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 오히려 그 격으로 따지면 세가 강한 형산이 한 계단 위에 속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저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새삼스레 형산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아니, 아니야.”
유경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백아는 애써 그런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였다면 애초에 형산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백아는 고개를 들어 막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달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막 떠오른 달은 초승달.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남오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더 이상의 노략질을 포기했거나 왜국(倭國)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구들은 오지 않을 것 같군요.”
“그렇군요.”
양문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연은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도와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아니…… 사실 저희도 왜구들과 관련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러나 뭔가 미진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해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 건지, 양문위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광동성에서 일어난 일은 광동의 무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진가의 가주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광동을 침범하는 왜구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 갔다고 했다.
보통 왜인들이 주축이 된 해적들은 광동보다는 절강이나 복건 쪽을 주 목표로 삼는다. 왜국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중원인으로 이루어진 해적들과 마주치는 일도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그런 균형이 깨어져 버렸다.
중원인으로 이루어진 해적들이 갑작스럽게 사라져 갔다. 관군의 토벌은 없었고, 무림인들이 협의를 외치며 해적들을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상잔(相殘)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은 광동을 들썩이게 했다.
물론 해적이 사라진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이라는 것은 언제나 반대급부를 함께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는 왜구의 침입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럼, 왜구가 중원의 해적들을 몰아냈다는 건가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최소한 몇 번의 전투가 있어야 하는데, 어민들에게 물어도 그런 전투가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서연을 보며, 양문위는 말을 이었다.
중원의 해적들이 사라진 틈을 타 광동으로 들어온 왜구들은 심지어 향항(香巷)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그럼에도 관군들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아, 어쩌면 왜구들이 관병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혜주(蕙州)와 산미(汕尾) 사이에 위치해 있던 무파인 흑룡부(黑龍府)가 왜구들에 의해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해하기 힘들군요. 왜구들이 굳이 그런 곳을 공격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맞는 말이었다. 왜구는 노략질을 목적으로 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빼앗고 훔치는 일만을 목적으로 할 뿐, 무력을 가진 집단에 대한 공격은 최대한 피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