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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4)


그런 그들이 무림 문파를 공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희도 처음엔 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긴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흑룡부는 이름만 거창한 삼류 문파였기에, 왜구들의 공격 대상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광동의 무인들은 왜구들에 대한 경각심을 줄여 나갔다.
그러던 도중, 용천(龍川)까지 들어온 왜구들에 의해 광동 무림의 큰 축인 남가보(南家堡)마저 무너져 버렸다.
“남가보는 광동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문파입니다. 물론 형산 같은 거대 문파가 보기엔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절대 왜구들에게 무너질 만한 곳은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용천?’
잠시 광동의 지리를 떠올린 백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경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백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용천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 아냐?”
“관도를 이용해도 며칠은 걸려.”
대답을 건넨 백아는 다시 양문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남가보가 무너진 것에 놀란 광동의 무인들은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 왜구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광동이 하나로 뭉치자마자 그들의 행동은 여느 왜구들과 다를 것이 없어졌다. 그저 약탈과 방화만 반복하며 해안을 누비는, 그런 왜구들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광동의 경계는 다시 느슨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광동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문파가 왜구들에 의해 습격당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바람에 광동 무림이 아예 둘로 갈려 버렸습니다.”
“둘이라면 어떤…….”
“광동 내에서 해결하자는 측과 외부에서 힘을 빌리자는 측이었습니다. 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셋이겠군요.”
“셋?”
“광동의 일은 광동 내에서 해결하자는 측이 하나, 해남의 힘을 빌리자는 측이 하나, 그리고 관부나 태산의 힘을 빌리자는 사람들도 한 부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태산이라고 했나요?”
“예. 태산은 복건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복건을 침입한 왜구들 다수가 태산에 의해 격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형산은 없었습니까?”
“형산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따지면 해남 역시 위험하지만, 해남은 해남도를 거의 벗어나지 않으니 형산과는 다르게 보였을 겁니다.”
질문을 던졌던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대답이 이상했는지, 장청은 양문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선 형산한테 도움을 받았잖소.”
“형산의 문인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 형산에게 도움을 받은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엄밀하게 따지면 무파인 형산이 아닌 상인 집단인 형양표국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대답을 들은 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니기에 그녀는 반문 대신 상황 설명을 보충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왜구들의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동부의 무파들은 태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지금은 안전하지만 해안가에 있기에 언제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는 서부의 무파들은 해남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해남은 이를 받아들여 소수의 무인을 양강(陽江)에 있는 벽해검문(壁海劍門)으로 보냈다.
그리고 내륙에 위치한 문파들은 광동진가를 중심으로 혈맹을 결성했다.
“광주에서 본 태산 십검수는 그 일 때문에 왔던 건가요?”
“그럴 겁니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양문위는 조금 전의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자꾸 외부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광동의 동부는 태산의 세력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가요?”
“예. 그래서 진가를 중심으로 한 문파들이 해안을 돌며 왜구들을 처리하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서 태산이 순순히 물러갈 것 같지는 않은데요.”
“태산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우선은 왜구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게 목적입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일까.
그럴 것이다. 왜구도 몰아내지 못한 지금 태산의 세력을 몰아내겠다는 것은 그저 반항이나 객기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태산을 몰아낸다 해도, 왜구들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이 다시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왜구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일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예?”
“양가는 산동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정확하게는 산동과 하북입니다. 산동이 본가이긴 하나 지금은 거의 하북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백아는 양문위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광동의 문파가 아닌 양가가 이 일에 관여하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당황해 하던 양문위를 대신해 나선 것은, 그의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가영이었다.
“저희 언니하고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양가가 관여한 건 아니라는 겁니까?”
“그, 그렇습니다.”
당황을 지우지 못한 채 대답한 양문위에게서 시선을 돌린 백아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뭐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문파의 간섭을 거부한다 해도 개인의 간섭은 허용했다. 그렇다면 형산이라는 문파가 아닌 일개 무인으로 손을 잡으면 되는 일이다.
그 형식이야 어찌 되었건, 형산은 광동의 문파들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
아마 서연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성사된다면 형산에서의 지위도 올라가겠지.’
물론 그것은 자신이 아닌 서연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문파 내의 서열은 말할 것도 없고, 가진 무공의 차이도 컸다. 당연히 광동에 빚을 지워 놓는 것은 평제자인 자신이나 속가제자인 유경이 아닌 서연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내상도 거의 다 나았을 테고.’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야, 너.”
“지금은 없습니다.”
“지금은?”
“예.”
“……알았어.”
어차피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걸 눈치 챈 서연은 알았다는 듯한 기색을 띠었다.
“그게 무슨…….”
“자, 이제 돌아가죠.”
막 질문을 던지려던 양문위의 입을 막은 유경은 서연을 돌아보았다.
“안 갈 겁니까? 감찰어사와의 약속은 끝났으니, 이제 여기 있을 이유는 없잖습니까.”
“그래.”
맥을 끊어 버리는 대답이다.
더 이상 무엇을 물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무리를 해서 질문을 던진다 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 양문위는 찝찝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형산과 형양표국 일행,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떠난 산두에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마저 모두 죽어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한 버려진 마을로 남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모습은 수평선 위를 노니는 갈매기들뿐이었다.

남오도는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어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산두에 머물던 왜구들이 사라진 이후 광동에 출몰하는 해적의 수는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광동에 온 지도 두 달. 형산과 형양표국은 광동에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아냐.”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 리 없었다.
머릿속으로 왜구들의 움직임이 지나갔다.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역시나 그 무인. 아마도 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점점 빠르게 변해 가는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백아의 신형이 흔들렸다.
천천히 움직이던 발의 흐름이 급격히 변했다.
사방(四方)으로는 그 흐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검을 쥔 백아의 몸은 얼핏 보면 규칙이 없이 쓸려 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던 흐름이 다시 멈췄다.
“…….”
보법이 변하는 것은 좋다. 임기응변이라 해도 실전에서 쓰기에 적합한 형태라면 문제가 없다. 기본적인 골격만 갖추고 있다면 보법의 변형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검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법은 언제나 변할 수밖에 없다. 보법을 펼치는 지형은 항상 다르기에, 같은 동작을 취한다 해도 조금씩은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같은 경로를 밟을 수 있는 무인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무인이 존재한다면, 그는 무예가 신에 근접한 초인이거나 원칙에 틀어박혀 발전하지 못한 바보이리라.
그러나 검은 그런 보법과는 다르다.
지형에 영향을 받는 것은 팔이 아닌 다리다. 따라서 검의 변형이라는 것은 그 보법에 맞춰 검이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른 검법이라면 모를까, 하나의 검법은 그 형식을 언제나 유지한다.
변초라는 것 역시 그렇다. 변초는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같은 형식이 다른 흐름을 타는 것뿐이다.
지형의 차이는 보법의 차이를 만들지만, 그 보법은 검의 흐름을 바꿀 뿐 형태를 바꾸진 않는다.
“안 돼.”
검이 변한다.
보법의 변화에 따른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다.
독자적인 변화.
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뜻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을 팔을 바라보았던 백아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또 한 번의 검무가 펼쳐지고, 형산의 오래된 검법인 비파검이 그의 팔에서 새로운 생을 얻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의식하지 않아도 풀려 나오는 초식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었다. 그야말로 교본이라는 말이 적합할, 그런 움직임이다.
두 번을 지나 세 번째 연계가 이어졌다.
‘…….’
흐름이 멈춘다.
동작을 멈춘 백아의 눈이 다시 팔을 훑었다. 그러나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역시 검이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그려진 왜구의 움직임이 섞이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의 비율이 같았던 비파검이 공격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방어 초식은 점점 줄고, 공격을 위한 초식의 비중이 늘었다.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공격 초식이 단조롭게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필살만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모습. 아직 비파검의 형태를 갖추고 있긴 하지만,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비파검이라 부를 수 없는 검으로 변질되고 말 뿐이다.
‘곤란해.’
더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의 변화라면 그것을 포기하고 원형에만 집중해야 했다.
곤란한 것은 이 변화가 그 둘 중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포기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꺼려졌다. 검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방향을 알려 줄지도 모르나, 지금 근처에 있는 고수는 서연과 장청, 양문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신과는 다른 방향의 무예를 익히고 있었다.
무예의 본질에 대한 문제라면 얼마든지 조언을 구할 수 있지만, 이런 변화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리자.’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것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더 큰 것을 원했다. 지금 가진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지금 가진 것마저 잃어버릴 수는 없다.
절대로 위험 부담을 안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뭐 해?”
“별로.”
고개를 저으며 검을 집어넣은 백아의 눈이 정면을 향했다.
“아, 잠깐만.”
“왜?”
“수련하던 중이었지?”
부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유경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무(對武)나 한번 해 볼까?”
“……그러지.”
나쁠 건 없었다. 어차피 섞여 들어온 흐름을 버리기로 한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실행에 옮기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전에서 그런 시도를 할 수는 없다. 자칫 검이 흐트러지기라도 한다면 치명적인 위기를 겪을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목숨을 건 싸움에서 검을 다듬기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혼자서의 수련보다는 역시 대무가 나을 것이다.
막 집어넣었던 검을 빼 든 백아는 유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백아를 본 유경 역시 검을 뽑았다. 금방이라도 검을 내지를 것 같은 자세. 절영검의 기수식이었다.
“먼저 간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뻗어 나오는 검을 쳐 낸 백아의 몸이 뒤로 흘렀다.
공격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유경이 쥐고 있었다.
빠르게 날아드는 검은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방어, 그리고 또 방어뿐. 조그만 틈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간결한 공격이 날카롭게 짓쳐들었다.
‘닮았어.’
방어에만 전념하면서도, 백아는 유경의 검이 왜구의 공격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왜구의 공격이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인 데 반해 유경의 검은 방어를 포함하고 있는 공격이었다.
비록 지금은 공격 일변도지만, 언제라도 방어 초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