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6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5)
그것을 확실하게 느낀 순간, 방어에만 전념하던 백아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읏!”
연계가 끊겨 흐름이 엉켜 버린 유경의 검이 흔들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백아의 검이 흔들리는 유경의 흐름을 끊어 버리고, 다시 그 흐름을 거슬러 검을 쥔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 번 끊긴 흐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반쯤 땅을 구르듯이 공격을 피한 유경은 놀란 눈으로 백아를 바라보았다.
“너…… 너 어떻게 된 거야.”
“……글쎄.”
버리려 했던 움직임이 무심결에 흘러나왔다.
‘이건…… 아니, 아니야.’
유경을 이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우위를 점하다가도 수세로 몰려 패하거나 비길 뿐. 그나마도 유경이 형산에 오른 지 일 년이 넘은 이후부터는 비기는 것도 버겁기만 했다.
그렇게 기울어졌던 저울추가 의도하지 않았던 움직임에 의해 반대로 기울어진 것이다.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변칙적인 움직임은 검을 망칠 뿐이다.
“다시, 다시 해.”
“미안. 머리가 아파져서.”
“너…….”
“내일 보자.”
뭔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 유경에게서 등을 돌린 백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발을 떼었다.
귀를 울리던 유경의 목소리는 곧 사라졌다. 그러나 짧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던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백아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든 하늘은 핏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어느새 저녁. 해가 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버릴 수밖에 없겠지.”
변칙적인 움직임이었기에 당한 것뿐이다. 만약 유경이 아닌 서연이라면, 그리고 대무가 아닌 실전이었다면 그런 움직임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았으리라.
답답한 느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진가로 가 볼까.’
광주로 오는 길에 잠깐 들렀던 진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 번쯤 들러도 좋다고 하긴 했지만…….”
무공은 얻지 못할지라도 조언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꺼려지는 것은, 역시나 이런 변화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전진이라 해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매화검수 이상의 무공이라는 것.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업(業).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느낀 백아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제기랄.”
아직 멀었다.
너무도 먼 곳에 있는 목표는 손만 뻗으면 닿을 듯이 보이는 달보다도 멀리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달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에 있었다. 잡을 수 없을망정 눈에 보였다. 멀리, 아주 멀리 있지만 고개를 들어 올리기만 하면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 있었다.
손을 뻗어 달을 가렸다.
작은 조약돌만 하게 보이는 달이 눈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손을 떼면 다시 나타나 그 빛으로 눈을 채웠다.
이런 것처럼 자신을 막고 있는 것도 치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답답한 느낌에 질식할 듯한 기분이 들어 백아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떨어뜨린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 살짝 올라간 눈에 보인 것은 역시나 양문위의 모습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다지 말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것을 느낀 백아는 입을 다물려 했지만, 그는 갑작스레 치밀어오른 의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오신 겁니까.”
“예?”
“이곳은 그냥 바람을 쐬기엔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풀밭인 이곳에 있었다면 신에 흙이 묻어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렇군요.”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 겁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양문위는 한차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그를 본 백아는 몸을 일으켜 널찍한 바위로 자리를 옮겼고, 백아를 따라 바위 위로 올라간 양문위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형산이 노리는 건 뭡니까.”
“……저는 형산의 일개 제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걸 알고 싶으셨다면 사저에게 찾아가 보십시오.”
“이미 갔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에 묻은 흙은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백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저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제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잠깐 말을 끊은 채 고개를 숙였던 백아는 다시 고개를 들고는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그 짐작이라도 들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겨우 평제자인 제 짐작을 들으셔도 도움이 되진 않을 텐데요.”
“전 사람 보는 눈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단호한 말투. 거절하는 것이 까다롭게 느껴졌다.
어차피 틀려도 그만인 짐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맞아떨어진다 해도 자신에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원 확보입니다.”
“예?”
“아시겠지만, 형산과 형양표국은 협정을 맺었습니다. 형산은 무력을 대고, 형양표국은 금전을 대는 형식이지요.”
“알고 있습니다.”
“사실 무림 문파에게 광동은 그다지 인기 있는 곳이 아닙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그 평판도 낮아 광동의 패자가 된다 한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백아는 머릿속을 재차 정리라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오악검파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태산은 황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강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절강과 복건 무림으로 진출해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양문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태산은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화산을 제외한 오악검파는 그런 태산을 따르고 있습니다. 형산 역시 그 길에 동참했지요.”
“……상권이 목적인 겁니까?”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무림 문파 중엔 상권을 잡고 있는 곳도 여럿 있습니다. 그랬다간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잖습니까.”
“광동의 문파 중에서 형산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까?”
“…….”
대답은 뻔했다.
“광동 제일가인 진가라 해도 형산이 가진 힘의 이 할도 보유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광동의 문파들이 진가를 주축으로 맹을 결성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형산을 이길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배신자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지 않을까요.”
입술을 깨문 양문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처가가 걱정되시는 겁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요. 게다가 전 양가가 아닌 진가에 운명을 건 사람입니다.”
‘……데릴사위였나.’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흔적들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째서 양가의 사람이 광동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는지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했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형산이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면 확실히 광동으로서는 버틸 수 없겠군요.”
“형산보다는 태산을 걱정해야 할 겁니다.”
“예?”
“형산은 아직 문밖에 있지만 태산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왔지 않습니까.”
백아의 말을 들은 양문위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아직 형산은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온 것은 소수의 인원과 형양표국뿐. 이번에 관아에서 허락을 받은 것 역시 형산이 아닌 형양표국이었다.
형양표국의 이름을 빌린 형산이 들어올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양표국이 버티지 못할 때의 일일 뿐이다. 물론 장담은 할 수 없으나, 그렇다 해도 지금은 문 안으로 들어온 태산을 먼저 걱정해야 했다.
더군다나 태산은 이미 광동에 속한 문파들과 협정을 맺어 놓은 상태.
그 말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의 이름을 빌린 태산의 무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 올 수 있다는 뜻이다.
“형산의 문인이라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할 듯하군요.”
“형산의 문인이라는 입장이라면…… 무엇입니까.”
“형산에게 광동의 일부를 넘겨 태산을 몰아내십시오.”
백아의 말을 들은 양문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백아는 잠깐 시선을 그의 얼굴에 두었을 뿐, 그 외의 반응은 보이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태산은 이미 복건과 절강을 손에 넣었습니다. 심지어 절강에서도 보타문보다 태산의 이름이 더 높아졌지요. 이대로라면 광동이 태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표범을 부르라는 겁니까.”
“호랑이보다는 표범이 낫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냐는 듯이 반문하는 백아의 모습에 양문위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럼 형산의 문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형산의 문인입니다. 다르게 말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군요.”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습니다.”
백아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잠깐의 긴장이 연출되었다. 마침내 그 긴장을 참지 못한 양문위의 입이 열리자마자, 그 모습을 주시하던 백아는 그가 입을 여는 것에 맞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 외엔 없다는 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해남과 형산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선 형산을 추천할 수밖에 없지요.”
입을 굳게 다문 양문위는 몸을 일으켰다.
“가시는 겁니까?”
“예.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 생각보다는 진가주의 생각이 더 중요하겠지.’
굳이 입으로 낼 필요는 없기에 백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양문위는 몸을 돌렸다. 생각에 골몰한 듯 그다지 빠르지는 않은 걸음. 그래서인지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반 각이 넘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백아는 다시 몸을 돌렸고,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척은 좀 내 주셨으면 합니다.”
“해남은 왜 끌어들였지?”
“역시 들으신 겁니까.”
“말해.”
살짝 인상을 쓴 서연의 모습을 본 백아의 입이 열렸다.
“어차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말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되었겠지요.”
“확실하게 각인시키면 되는 문제야.”
“그럼 사저가 처리하지 그러셨습니까.”
“네가 여기 없었다면 그렇게 했겠지.”
‘……방해꾼이 된 건가.’
백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려 나쁜 점수를 받은 듯한 기분. 이래서야 형산에서의 평가가 좋아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눈 밖에 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에 백아는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 쉽게는 안 넘어갈 거야.”
단호한 말투. 확실하게 낙인찍혔다는 것을 깨달은 백아의 눈썹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사라지는 서연을 향하던 백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씁쓸한 느낌이 입 안을 가득 채워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형산 지도부의 눈에 들어 강한 검을 배우는 것은 포기해야 할 듯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후우―.”
형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때라고 느끼면서도, 그럴 수 없기에 더 씁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씁쓸한 눈빛을 담은 백아의 눈이 바다를 향했다.
* * *
겨울이 되었다. 형산에서라면 차가운 바람이 찾아들었을 법도 하건만, 광동의 겨울은 호남의 겨울보다 더 따듯하게 느껴졌다.
산서나 하남이었다면 여름에나 이런 공기를 맡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 포근한 느낌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백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광주의 외곽에 자리 잡은 삼 층 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형양표국 광주 분타’라는 명패가 달려 있지만, 어째서인지 형양의 본타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게 방해를 하던 광주 태수가 파면된 이후 형양표국은 완전히 입지를 굳혔다. 아마도 이진화의 입김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백아는 다시 한 번 눈앞의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태산 못지않아.’
얼마 전 하원(河源)에 있는 태천장(太天莊)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우연히 간 것은 아니었다. 태산과 손을 잡은 광동의 문파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양문위의 말을 들은 서연의 지시로 찾아갔던 것. 그리고 백아는 그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