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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6)
영락제 시절의 무당이 황실에서 받던 지원의 몇 배를 받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만큼 태산 문인들의 활동 거점이 된 태천장은 거대했다. 하원에서도 첫손에 꼽을 만큼 거대한 장원의 모습에 놀란 백아는 나중에야 그것이 서로 담을 맞대고 있던 네 개의 장원을 모두 구입해 손을 본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광주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기로 한 형양표국은 관의 지원을 끌어내어 거대한 장원을 짓기 시작했다. 형산 역시 태산에 눌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막대한 금액을 보내 공사를 독려했고, 그 결과 광주에 자리한 형양표국의 분타는 불과 사 개월 만에 거대한 장원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래서야 관사(官舍)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큰 건물이 없기 때문인지, 체감 면적은 이곳이 더 넓은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보다…….’
형양표국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마 며칠 내로 형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미 서연에게 밉보인 이상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조금은 서투른 면이 있는 그녀라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형산의 수뇌부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후우―.”
형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미 형산에 몸을 담아 다른 문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지금, 자신이 매화검수를 꺾을 수 있는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는 곳은 형산뿐이기에, 썩은 밧줄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질 뿐이었다.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종남으로 갈 걸 그랬나.’
쓴웃음을 지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일만 없었다면 자신 역시 매화검수를 목표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은 그렇게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틀어져 버린 일. 미련을 가질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더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백아는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몸을 반쯤 눕히고 있던 바위에서 일어난 그는 떠올라 있던 표정을 지우곤 눈앞의 건물을 향해 발을 떼었다.
형산의 전각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을 두 개나 거치고 나서야 본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참석할 사람들은 이미 다 모여 있었다. 그 안에 양문위와 진가에서 본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본 백아는 양문위와 진가의 선택이 형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짐작은 옳았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형산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셨던 듯합니다.”
“확답은 아니군요.”
“형산에서 양보한다면 확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형산이라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형양표국은 남곤산 이북에서의 활동만 허락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무파인 형산과 달리 상계에 속해 있기도 한 형양표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 더군다나 광주에 이렇게 큰 거점을 마련해 놓은 형양표국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건 형산에게만 한정된 조건인가요?”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애매한 답변이었다.
형산과 형양표국을 별개로 본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하산한 제자는 적전이 아닌 이상 형산의 울타리에 있는 무인일 뿐이기에, 형양표국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다수의 제자들을 하산시켜 형양표국을 돕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같은 존재로 본다면, 그런 것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렇다면 제가 답변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이군요.”
“형산에서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양문위의 옆에 앉아 있던, 자신을 진연상이라 밝힌 노인은 잠시 말을 끊으며 서연과 유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어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 쪽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는 했지만 힘이 모자란다는 것은 저희 역시 알고 있었으니 잡음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곳에 있는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희 중에서도 태산이나 해남에 붙으려는 문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에 여기…… 양 소협이 형산과의 결맹을 제의한 덕분에 그런 움직임이 많이 줄기는 했습니다만, 오히려 이번엔 그렇게 되면 힘을 잃을까 걱정하는 문파들이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말입니다.”
잠시 말을 늘였던 부분이 신경 쓰였다.
‘아니, 지적할 필요는 없어.’
집안 내의 일이었다. 아마도 진가의 핏줄을 이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대립일 거라고 생각한 백아는 미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것을 무시한 채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광동의 텃세들은 이쪽이니 형산에서 조금 양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보고하도록 하죠.”
서연 역시 확답은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진연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지던 회담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소득이 있다면 서로 입장 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것과 그것을 좁힐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는 것 정도. 그렇다고 해도 그 입장차를 획기적으로 좁힐 만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기다려.”
양문위와 진연상을 따라 막 몸을 일으키려던 백아는 서연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사저?”
“형산에 다녀와.”
‘응?’
당연히 서연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백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 접니까?”
“난 사람을 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 장문인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고.”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너, 수뇌부의 눈에 들고 싶어 했던 걸로 아는데.”
“…….”
“싫어?”
그럴 리가 없다.
기회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어떤 조건을 달더라도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걸 알아차릴 정도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의아함을 담은 채 계속 생각을 정리하던 백아는 곧 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유경이겠군.’
“대답해.”
“……알겠습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이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움직였습니다.”
“몇이나?”
“하나입니다.”
“하나?”
‘미끼일지도 모르겠군.’
“그냥 놓아줄까요?”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한 명. 너무 적은 숫자였다. 아무리 단순한 업무라 한들,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단 한 명을 보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사고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추적한다.”
* * *
양산에 도착해 다시 짐을 꾸렸다. 이제 련주를 지나기만 하면 호남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남의 관문인 의창에서 형산까지는 좋은 말을 타면 이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거리.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이르나 지금까지 한 번의 공격도, 견제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계속 긴장해 있을 이유는 없을 듯했다.
‘아니, 어쩌면 호남에 들어가는 순간을 노릴지도 몰라.’
긴장을 너무 늦추는 것은 위험했다.
지금까지 공격이 없었던 것은 우연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계획된 일일 수도 있었다. 광동에 파견되었던 형산 문인에 대한 공격은 광동의 이권 문제라는 것이 너무도 뻔히 보일 수 있는 일이다.
공격이 있다면 호남에 들어갔을 때가 가장 적합한 시점일 것이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태산이 자신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전의 광주 태수에게 입김을 넣었던 것이 태산이었다. 그런 그들이 형산의 존재를 주시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적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진가와 손을 잡았다고는 해도 광동 전체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태산에 종속된 문파들도, 해남과 손을 잡은 문파들도 있었다. 심지어 진가와 결맹한 문파들 역시 형산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형산과의 결맹이 불확실한 것으로 남기를 바랄 것이다.
청원을 지나면서 구입한 말을 몰아 도시를 빠져나갔다. 양쪽 옆으로 숲이 우거진 관도를 돌자 관도의 바로 옆을 지나는 물줄기가 보였다.
한강의 지류. 그러나 이름은 없었다.
련주까지 가는 동안 관도 옆을 흐르는 물줄기는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절반을 지나자 사라졌던 물줄기가 련주를 눈앞에 두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위험해.’
별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보던 백아의 뇌리로 위험 신호가 감지되었다.
이런 지형이라면 사고가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이미 저녁으로 접어든 시점이기에, 관도를 지나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기습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 이런 곳은 위험하다.
기분 탓인지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기분 나쁜 느낌이 가득했다.
련주는 지척. 말을 달리면 금세 도착할 수 있다.
‘아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육감이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검에 대었다. 언제라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한 백아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없어 자꾸만 초조해졌다.
호흡을 고르며 기를 끌어올렸다. 단전에 머물고 있던 내기가 눈으로 올라 안력을 키웠다.
“나와.”
흐릿한 흔적.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기운이다.
“…….”
‘넷인가.’
풀숲이 흔들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넷. 도망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만약 태산이라면…….’
백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포기하는 건 삶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태산이 아닌 무당이라 해도 포기할 수는 없다.
풀숲에서 나온 넷은 백아를 중심으로 한 네 방위를 점했다.
빠져나가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백아는 움직이려던 발을 멈춰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움직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짐짓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린 것이다.
그것이 먹혀들었는지 저들은 쉽사리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래간다 해도 문제였다. 자신의 내력이 저들만 못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백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반 시진 이상 대치가 계속된다면 이 압력만으로도 내력이 고갈되어 버릴 것이다.
‘안 돼.’
이대로 버틸 수도, 먼저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입술을 깨문 백아는 허세를 부려 내력을 더 끌어올렸다.
대치는 길었다. 꼬박 하루가 지난 것 같다고 느낄 때쯤, 포위망을 형성한 채 움직이지 않던 그들이 갑작스레 공격을 가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백아의 검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내력을 잔뜩 담아 공격을 쳐 낸 백아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해 후방의 공격을 막았다. 그 힘을 이용해 반 장가량 뒤로 물러나 세 번째 공격마저 피한 백아는 호흡을 고르며 다시 상황을 살폈다.
아직 포위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적들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포위망은 굳건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백아를 향해 두 번째 공격이 시도되었다.
갑자기 공격을 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공격을 쳐 내며 몸을 움직일 뿐, 반격이나 도주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왜?’
이런 실력이라면, 진신 무공을 보인다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왜 지금껏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군.”
관도 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그 주인을 확인할 틈은 없었다.
‘저 사람 때문이었나.’
계속 이어지던 대치를 깬 것도, 진신 무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저 목소리의 주인 때문일 것이다.
“정파의 무인을 자처하는 자로서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음을 양해 바라오.”
“…….”
간섭하겠다는 뜻. 그 말에 백아를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나타나 어둡던 백아의 눈을 밝혀 주었다.
‘사형?’
새로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본 백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흰 옷을 입은 사내. 틀림없는 백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