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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7)
“형산 문인인가.”
놀란 백아의 귀에 복면을 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들어 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진가와 관련된 문파에서 보낸 사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아니라면 가라.”
“안타깝게도 형산 문인이오.”
백유의 시선이 백아를 향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이 움츠러들었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 그것을 느낀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가.”
긴장한 듯한 목소리다.
그러나 대치는 짧았다. 사내는 살기를 피워 올리며 검을 들었고, 그에 맞춰 백유 역시 검을 뽑았다.
두 번의 호흡을 거칠 시간이 지나, 대치는 검격으로 변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벌써 십여 차례의 공방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낀 백아는 눈을 크게 뜨며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강하게 이어지는 검격을 막아 내는 백유의 검은 역시나 비파검이었다.
태산마저도 쪼갤 듯한 검격.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위력을 가진 비파검이 연환(連環)을 이뤄 강격을 받아 냈다.
위태롭게 보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이었다.
오히려 압도하고 있는 것은 비파검. 백유의 검이었다.
‘말도 안 돼.’
저런 연환이 이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초식끼리의 연계가 아니었다. 그저 검의 연환일 뿐. 하나의 초식이 여러 개로 쪼개져 그들 스스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저런 연환을 시도한다면 내력이 얽혀 폐인이 되고 말 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자신 역시 발전했다. 그러나 지금 백유가 보이는 모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살며시 고개를 치켜들었던 자신감이 너무도 무참히 깎여 나갔다.
둘의 공방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만 벌어질 뿐이었다.
진신 무공을 쓴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공격으로는 백유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강한 공격을 한차례 퍼부은 사내는 그 반동을 이용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다면 보내 주시겠소?”
백아를 한 번 바라본 백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과 동시에 백아를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포위를 풀었다. 자신을 억누르던 압력이 사라진 것을 느낀 백아의 입에서 작은 숨이 토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도 저들은 백아를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백유 때문이었다.
백아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들은 금세 모습을 감췄다.
‘젠장.’
독기를 잔뜩 품은 백아의 눈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벌어져 버린 격차를 느꼈기 때문일까. 오히려 적개심마저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낀 백아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사형이 왜 여기 있는 거야?”
“형산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어.”
“어째서?”
“응?”
“하산했잖아. 그럼 형산과의 인연은 사실상 끊어진 거 아냐?”
“글쎄.”
딱히 할 말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억지에 가까웠다. 어디까지나 원칙에 지나지 않는 것은 언제든 어긋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했다.
백유가 형산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적의가 피어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보고 싶은 사람도 몇 명 있고…… 별로 큰 의미는 없지만, 한 번쯤은 들러 봐야 할 것 같아서.”
“…….”
“넌 아직 산에 있어?”
“응.”
고개를 끄덕인 백아는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했다.
어색한 느낌. 백유 역시 그런 것을 느낀 듯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련주 안으로 들어서서도 그런 상태는 한동안 이어졌다. 객잔에 들어가 숙소를 마련하고, 간단한 식사를 마치는 동안에도 둘 사이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다음날이 되어서야 끊어졌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기연이라도 있었던 거야?”
잠시 의아한 듯이 백아를 바라보던 백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바라는 건 수련에 방해만 될 뿐이야. 게다가 그렇게 쌓은 공력은 정순하지 못해.”
“삼합공만 수련했다는 거야?”
“그래.”
믿을 수 없었다. 건천공을 익힌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깊어 보이는 공력을 소유하고 있다면 기연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당연했다.
“어떻게?”
“아직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냐. 하지만 삼합공은 기초 공부라고 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그럴 리 없다.
삼합공을 익혀 고수가 된 사람은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형산의 역사 속에서 삼합공만으로 고수의 반열에 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형산의 인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합공은 건천공이나 현천공의 기반을 닦아 주는 역할만으로 족한 기공으로 평가되고 있어, 건천이나 현천을 얻은 무인은 그 순간부터 삼합공의 수련을 중단하기 마련이었다.
뛰어난 기공이 있는데, 굳이 기본공을 다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백유가 아닌데도, 백유의 태도는 삼합공이 건천이나 현천공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걸 알고 있는데도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너도 강해졌어.”
“……건천공을 익히고 있으니까.”
“건천공? 설마 적전으로 들어간 거야?”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백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손.”
“응?”
“손 내밀어 봐.”
이상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백아는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상한 느낌 같은 건 없어?”
“무슨 소리야?”
백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한테 배운 거야?”
“주화입마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유 사저한테 확인까지 받았으니까.”
“서연 사저?”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별문제 없겠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유는 뭔가 꺼림칙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사형.”
“응?”
“형산에 가서 뭘 어쩌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들르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기분이 나빠진 백아는 화제를 돌렸다. 약간 가시가 박힌 말투였지만 그런 것은 느끼지 못했는지, 백유는 바뀐 화제에 안도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며 재차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회합에 참가할 수 있을까 해서.”
“오악 회합?”
“그래.”
그만한 자격은 갖추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어제의 백유는 서연에 비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면, 백유는 형산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가서 뭘 어쩌려는 거야?”
“확인해 보고 싶을 뿐이야.”
백유는 검을 쓰다듬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범접하기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 되어, 마치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연에 비해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상향조정한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사형.”
“응?”
“정말 삼합공만 익힌 거야?”
“그래.”
조금 짜증이 났는지 백유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백아는 백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았다. 어차피 나올 대답이야 뻔하기에, 긁어 부스럼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뛰어난 검법은 뛰어난 신공을 필요로 한다. 신공이 절학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학 역시 신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록 본신의 절기를 숨긴다 해도 그 정수는 검에 실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검을 쉽게 막아 낸 백유라면 그에 못지않은 절학을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보이는 것은 비파검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것은 또 다른 무엇이어야만 했다는 뜻이다.
비파검만으로 그런 공격을 막아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떤 검이건 수련을 통해 정상에 오르면 차이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수련에 대한 열망을 키우는 도구로 사용될 뿐인 그런 말 따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절학이라는 단어가 있는 한, 그런 말은 그저 듣기 좋은 입발림 소리에 불과했다.
“그럼 검법은?”
“응?”
“비파검만 익힌 거야?”
“그래.”
“왜?”
오른손 검지로 콧등을 긁으며, 백유는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라니?”
“어제, 그 공격을 어떻게 막은 거야?”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절대로, 비파검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흐름을 끊으면 되잖아.”
너무도 쉽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쉽지 않았다.
백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백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유는 반응이 없었다.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대화는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너무도 태연한 모습의 백유를 본 백아는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태도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됐다.
불가능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모습.
천재란 저런 사람을 뜻하는 것이리라.
도저히 알 수 없어 막 입을 열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얻으려 할 때, 호남의 관문도시인 의장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내일까지는 형산에 도착할 수 있겠지?”
“응? ……어. 맞아.”
“겨우 일 년 반 정도인데, 굉장히 오래된 것 같네.”
들뜬 듯한 표정을 짓는 백유의 모습에 백아는 조금 전의 화제로 돌아가는 것이 꺼려졌다.
‘뭐, 언제라도 기회는 있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며 아쉬움을 달래는 사이, 그들이 탄 말은 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잠깐 의장에 들러 약간의 물품을 챙긴 후, 침주를 거쳐 형양으로 들어갔다.
이제 형산은 지척. 쉬지 않고 달리면 오늘 내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형양표국에 들러야겠지.’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광동으로의 진출은 형산과 형양표국의 합작이기에 형산의 수뇌진이 형양표국으로 내려왔을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경과를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 굳이 형산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뻗친 거리를 굽이돌자, 늘어선 상점가 끝으로 거대한 표국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호남 제일 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 비록 광주에 설치된 분국보다 작은 규모라 하나,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어떤 위압감은 이곳이 한층 더 컸다. 분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 비록 삼십 년 정도의 연륜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마치 수백 년을 버텨 온 거목과 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하군.”
말에서 내린 백유는 굵은 기둥을 쓰다듬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나야 뭐 그렇지. 그런데 이쪽은?”
“형산 제자, 백아입니다.”
“아아, 내가 표행을 나갔을 때 왔던 사람인가? 아무튼 반갑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은 가볍게 백아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시선을 백유에게 돌렸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인가. 지난번에 나갈 땐 다시는 안 올 것처럼 이야기하더니만.”
“표사 일을 다시 하려고 온 건 아닙니다.”
“그럼?”
“사제와 형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흐음.”
노인의 눈이 다시 백아를 향했다.
“적전이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놀랍군.”
잠깐 동안 의외라는 듯한 빛을 띄우던 노인은 백아와 백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적전이 아닌데도 그 정도라면 가볍게 대할 수 없군.”
“예?”
“정식으로 소개하지. 형양표국 삼국주 이효기라 하네.”
포권마저 취한 그의 태도에 당황한 백아는 그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이효기는 여전히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그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엔 대부분 포기하기 마련일세. 그런데 그 정도까지 무를 닦았다면 피나는 노력을 했음이 분명하니, 내 어찌 가볍게 대할 수 있겠는가.”
“하하, 조금 과하십니다. 사제가 당황한 것 같군요.”
“아니, 전혀 과하지 않네. 그만할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대접이니까.”
백아가 당혹감에 젖어 있는 사이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다 발을 뗀 그들을 얼떨결에 따라간 백아가 도착한 곳은 맹호원(猛虎院). 형양표국 표사들의 무예 수련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예?”
“저 표사들 말일세.”
이효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긴 백아는 한창 수련 중인 표사들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