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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8)


젊었다. 가장 나이가 든 사람이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 웃통을 벗어젖힌 그들은 투박한 박도를 든 채 굵은 나무 기둥을 후려치고 있었다.
흠집이 나지 않는 나무 기둥을 본 백아는 표사들이 들고 있는 검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나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베기를 연습하고 있는 게 아닌, 타격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리라.
“왜? 눈에 차지 않나?”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백아는 다시 표사들을 바라보았다.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적어도 반 시진 이상 수련을 했음이 분명한 모습. 그런 그들을 본 백아의 입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본만 다지고 있는 건가.’
명문이 아닌 표국의 수련인 이상 한계가 있음이 당연했다. 그러나 저들 중에도 높은 수준의 무예를 접한다면 더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곳에서 기본기만을 다지는 모습에, 백아는 형산에서의 자신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가?”
“날카로움이 부족하군요.”
“흐음?”
이효기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백유를 돌아보았다.
“자네하고는 다른 말을 하는군.”
“그렇군요.”
“사형은……?”
“아아, 자네 사형은 너무 힘이 실려 있다고 말했네. 강함도 좋지만 흐름을 잃어버리면 그것마저 잃어버린다고 했던가?”
이효기는 백유를 돌아보았고, 백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땐 제가 건방진 소리를 했습니다.”
“아니, 아니야. 광서삼귀를 베어 버린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건 겸양이 아닐세.”
이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형양표국의 삼국주에게 들어서인지, 지난번에 들었던 것과는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
자신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연을 얻은 지금의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느낀 백아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런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곧…….’
따라잡으리라.
“삼국주님 오셨습니까!”
“아아, 인사는 됐네.”
시끄러웠던 건지 셋의 등장을 눈치 챈 수련자들이 이효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수련은 어떤가?”
“자, 잘되고 있습니다.”
“무리하지 말게나.”
근처에 있는 수련생을 다독인 이효기는 백유와 백아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느낀 백유는 살짝 인상을 썼고, 그 모습에 또 한 번 의아함을 느낀 백아는 고개를 돌려 이효기를 바라보았다.
“자네들, 잠시 수련 상대가 되어 줄 수 있겠나?”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군요.”
찌푸려져 있던 얼굴을 본래대로 돌린 백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넌?”
“……아니, 난 됐어.”
“그래.”
고개를 끄덕인 백유는 수련생들이 물러난 연무장으로 발을 옮겼다.
“자네 사제는 오지 않는 건가?”
“낯선가 봅니다.”
“아쉽군.”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이효기는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는 신호를 보내곤 수련생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황해 하던 그들은 그가 원하는 것이 대련용 목도라는 것을 곧 깨달아,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목도 두 개를 뽑아 그와 백유에게 건네주었다.
“조금은 봐주게나. 여기서 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은가.”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사제 앞에서 엉망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허허…….”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효기를 본 백아는 다시 한 번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둘 다 산에 있을 땐 이 정도로 큰 격차가 나지 않았다.
‘왜…….’
백유는 저만큼이나 앞서 나갔는데, 자신은 겨우 이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걸까.
“그럼, 부탁하네.”
자세를 잡은 순간 강한 기파가 들이닥쳤다.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고 있던 백아에게도 강하게 느껴질 정도의 기세였지만, 백유는 아무 저항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응?’
그 모습을 보던 백아는 의외의 광경에 눈을 크게 떠올렸다.
놀랍게도 선공을 취한 쪽은 백유가 아닌 이효기였다.
‘상문십이도?’
놀라움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이효기가 시전하는 도법은 틀림없는 상문십이도. 형양표국주의 일가에게만, 그것도 단 한 명에게만 전수되는 도법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백유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날카롭게 날아드는 도격을 피하고, 두 번째로 날아든 공격을 보법만으로 무효화시켰다. 그런 백유의 보법은 지둔보(蜘遁步). 틀림없는 형산의 보법이었다.
경신 수련을 위한 기본적인 보법이 저렇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둔보는 그저 공격을 피해 대각선으로 움직이는 것을 수련하기 위한 기초적인 보법이었다. 당연히 실전에서 쓰일 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건만, 백유의 발에서 피어오른 지둔보는 회피가 아닌 공격을 위한 보법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회피조차도 공격의 시작. 밀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하는 쪽이 등 뒤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움직임. 그러나 그것에 신경을 쏟으면 곧바로 전면의 요혈을 향해 검이 짓쳐들었다.
초식명조차도 외치지 않는 대무. 비무에 속한다기보다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후우―. 그만 하지. 늙으니까 기력이 모자라는군.”
“아직 백 년은 더 사실 것 같습니다만.”
“이 사람, 농도 그만하면 빨리 죽으라는 소리로 들려.”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린 이효기는 백아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나와 보지 그러나.”
“……사양하겠습니다.”
저 공격을 받아 낼 수 있는 건 백유 정도. 자신이라면 열 합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쉽구먼.”
이효기는 일어난 흥을 다스리기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백아는 그런 그를 향했던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다시 한 번 거부를 표명했다.
고수와의 비무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백아는 갑자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좋은 기회이건만, 실력 부족으로 인해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이 지나쳐 자신에게 화마저 일었다.
‘하지만 언젠간…….’
저들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아―.”
그렇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간 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조금 더 노력하면 뛰어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저들이라고 처음부터 고수였던 것은 아닐 테니까.
“간만의 대련이었는데 말야.”
“삼국주님.”
“응? 대무를 하겠다는 건가?”
얼굴 가득 반색하는 빛을 띄운 이효기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백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형산에서 오신 분은 아직 남아 계십니까?”
“운중자라면 형산으로 돌아갔네만.”
‘벌써…….’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순간 오악 회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납득이 되어,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효기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직도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효기를 뒤로한 채, 백아는 백유를 향해 손짓을 해 그를 불렀다.
맹호원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텅 빈 공터를 지나 사람의 출입이 적은 곳으로 걸음을 내디딘 백아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백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할게.”
“부탁?”
“원래는 내가 해야 하는 거지만, 사형한테 부탁해도 될 것 같아서.”
백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형산이 광동으로 진출한 건 알고 있지?”
“형양표국과의 합작이라면 알고 있어. 광동을 지날 때 들었으니까.”
“경과보고서야.”
“……너?”
“아무리 강해도 적전이 아니면 회합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어. 사형도 알겠지만, 평제자가 회합에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백아는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내색할 필요는 없어, 그는 한차례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낭보를 가지고 온 제자가 부탁한다면 참여하게 해 줄 거야. 그런 소식을 가져간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그렇게 되면 평제자 한 명 정도 데려가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너는?”
백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형산에 있어 봤자 가망이 없잖아.”
“그건 아냐.”
“글쎄.”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백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사형처럼 일찍 형산을 나오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게다가 나도 산을 내려와서 더 강해졌으니까. 산에 있었다면 이 정도까지 오는 데 몇 년은 더 걸렸을걸?”
만류하려던 백유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자신 역시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문 백유를 본 백아는 입가에 맺힌 씁쓸한 웃음을 지웠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지금 임무를 팽개치겠다는 건가?”
백유의 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걸 깨달은 백아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
“이래서 평제자들은 안 된다는 거야.”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백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산의 적전이었다.
“백경…… 사형.”
“형산을 떠나겠다는 놈에게 사형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떠나겠다는 건 아닙니다만.”
“그럼 형산에서 내치게 해 주지. 너 같은 놈 따위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경멸마저 띄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경에게서 시선을 뗀 백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눈빛, 지나치게 불쾌했다.
“말이 지나치시군요.”
“후―. 유유상종이라더니, 같잖은 것들끼리 옹호하는 거냐?”
하찮은 것을 본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럴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평제자 따위, 모든 것이 약속되어 있는 적전에게는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백아는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뭐냐, 그 웃음은.”
“평제자보다 형편없는 적전이 하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군요.”
“뭣!”
비웃음을 띠고 있던 얼굴이 흉포하게 변했다.
“유 사저라면 모를까, 사형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언어도단이라는 뜻입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눈에 독기마저 피워 올렸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강한 기파가 몸을 때렸다.
적어도 일류,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만 하시죠.”
살짝 눈을 일그러뜨린 백유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너, 너…….”
강하게 뿜어지던 기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고는 있지만, 그것은 백유가 그것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백경을 본 백아는 과연 그가 그것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기연이라도 얻은 거냐.”
“기연 따위, 필요 없습니다.”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더불어 평제자 따위에게 얕잡아 보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 역시 진하게 녹아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속엔 하찮게 보았던 평제자가 자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역시 들어 있었다.
“건방진 놈.”
이를 가는 소리가 섞인 고함이었다.
“검을 뽑아라.”
“한쪽이 속가라면 모를까, 동문끼리의 대무는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이건 네놈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뿐이다. 비무 따위가 아니니 그런 건 필요 없어.”
잔뜩 독기를 품은 백경의 모습에 백유는 고개를 저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다음엔 네놈 차례다.”
독기를 품은 웃음을 띤 채 자신을 바라보는 백경을 본 백아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백경은 백유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극도로 흉포해져 있는 지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마공을 익혔다면 모를까, 형산의 정종 무공을 익힌 사람은 저런 상태에서는 제 실력을 낼 수 없음이 너무도 당연했다.
결론은 뻔했다.
‘이십초나 버티면 다행이겠군.’
그러나 그것도 힘들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막연히 그럴 거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 그것을 떠올린 백아는 검을 뽑아 든 채 서로를 바라보는 둘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선공을 취한 쪽은 백경이었다.
가르침을 내리겠다 말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 오히려 그 검을 받는 백유가 가르침을 내리는 것만 같아 보인다.
독기를 지나 살기마저 띄운 검이 백유의 전신을 노렸다.
‘바보 같아.’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건만, 백아는 헛웃음을 물며 백경을 바라보았다.
요혈을 노리는 검 날이 모두 옷깃을 스칠 뿐이었다. 공세를 이어 가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뿐. 공격이 제대로 이어지지도 않는 그가 백유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날카로운 검명이 귀를 울렸다.
무언가가 바닥을 뒹구는 소리. 잠시 시선을 돌렸던 백아는 그 소리에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백경의 입이 조금씩 열렸다.
“이, 이게…….”
검이 꺾였다.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 검이 꺾인 것이다.
잘 정련된 청강장검이 형편없는 몰골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청색 수실이 달린 자루도 흙먼지에 더럽혀졌다. 반만 남은 검 날을 매달고 있는 자루마저 놓쳐 버린 손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