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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第四章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뛰어난 서예가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9)
형산오신검이 비파검에 꺾였다. 무공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전한 검마저도 부러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부용검법(芙蓉劍法)이군요.”
“너, 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움, 그리고 허탈함. 그 두 가지에 흠뻑 젖은 백경의 얼굴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검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잊으시면 언제라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백유답지 않은 싸늘한 반응이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일까. 백경은 그런 말을 듣고서도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가자.”
왠지 모르게 불쾌해 하고 있는 듯한 백유를 따라나선 백아의 얼굴엔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평소답지 않은 반응. 어떤 일이 일어나도 평정을 지키고 있을 것만 같던 백유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래?”
“별거 아냐.”
“아닌 것 같은데?”
화가 나 있던 얼굴이 씁쓸함이 깃든 얼굴로 바뀌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백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끝나자,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을 지운 백유의 입이 열렸다.
“그런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곳에 머물러 있는 사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뿐이야.”
비파검만으로도 여기까지 올라온 백유에게 있어, 저런 검을 가지고 있는 백경은 동경의 대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무너졌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되는 일이었다.
“넌 어때?”
“글쎄…….”
백유에게서 더 높은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래?”
“별로 신경 쓸 이유도 없잖아. 사형이 더 강했던 것뿐이니까”
“그럴까?”
“……그래.”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은 백아를 본 백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도 납득하기는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마치 일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만해도 될 그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하게 보여,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응?”
“아니, 사형답지 않아 보여서.”
“아아.”
의미 없는 한숨을 내쉰 백유는 머리를 흔들어 자신을 추슬렀다. 그것이 적중했는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금 당황했어.”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담벼락에 몸을 기댄 백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하늘. 그 청량함이 혼란에서 막 벗어난 머릿속을 맑게 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 그 제의 말인데.”
“응?”
“받아들일게.”
잠시 무슨 소리인지 몰라 하던 백아는 당황하며 품을 뒤졌다.
“아, 여기.”
“고마워.”
황지를 접어 만든 봉투를 건네받은 백유는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빠지지 않는지 확인을 해 본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시하고는 다시 백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어디로 갈 거야?”
“글쎄…….”
딱히 결정한 것은 없었다.
“광동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난번 일도 있으니까.”
“아아…….”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렇다. 그들을 다시 마주친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백유 정도의 실력을 갖추면 모를까, 지금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광동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보다 몇 배나 더 강해지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위험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자신 역시 왜구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얻은 기연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직까지도 삼류에 머물고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게.”
정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백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표국을 벗어났다. 곧 형양의 번화가가 나타났고, 형산으로 향한 길로 들어선 백유를 향해 손을 저어 준 백아는 그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대로 나아가면 광동성이었다.
‘역시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평안보다는 목표에 다가갈 기회가 있는 위험이 나았다.
백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광동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걸음을 옮기던 백아의 발이 멎었다.
자신을 습격했던 자들. 그들을 다시 만난다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버틸 수 없었다.
“젠장.”
무력감에 화가 치밀었다.
남쪽을 향하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광동이 아닌 광서를 향한 길.
지금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진 이후 그들과 부딪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십 년은 더 있어야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경지에 지금 와 있지 않은가.
“후우―.”
짙은 한숨.
그것을 내뱉은 백아는 느릿한 걸음으로 서쪽을 향해 발을 떼었다.
경유지로만 생각했던 광서에서 약 일 년을 보내, 백아도 이제 열일곱이 되었다. 키도 제법 커지고 말라 있던 몸에도 살이 붙어 이제는 청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였다.
박백(博白)을 지나 신의(信宜)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언덕만 지나면 원래의 목적지였던 광동이 나온다.
‘너무 남쪽으로 내려온 것 같은데.’
애초의 목적지였던 광주와는 몇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관도 역시 남북으로만 나 있어, 광주로 가려면 오천(吳川)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할 것이다.
“하긴, 그것도 나쁠 건 없지.”
어차피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었다. 광주로 가려는 것도 그곳의 상황이 궁금했을 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필요한 은자 역시 광서성을 지나며 보충해 놓은 상태이기에, 딱히 장소를 정해 놓고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편에 남아 있던 불편함도 사라져 백아는 기분 좋은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고개를 넘어 몇 리를 더 걷자 신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저 그런, 도시라기엔 조금 작은 읍이었다.
‘응?’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무사들의 모습에 백아는 흠칫 놀라며 몸을 숨겼다.
‘왜 이런 곳에…….’
간간이 느껴지는 기파로 볼 때 이류 정도의 무인들이었다.
광서에서 일 년을 보내며 일류에 근접한 자신에 비하면 약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부류였다. 거대 문파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게다가 삼류 문파도 보기 힘든 이곳에 이류 이상의 무인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납득되지 않는 일이라 해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왕왕 있어 왔고, 지금 역시 그런 예외에 속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그것에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 * *
‘해남이었군.’
이상한 느낌에 한동안 그들을 뒤쫓던 백아는 미행을 중단했다.
해남의 무인이라면 납득이 됐다. 광동의 문파 일부가 해남에 원조를 요청한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파들이 있는 곳이 주로 이 광동성의 서남부기에, 저 정도의 무인이라도 해남에 속한 자들이라면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저렇게 많은 인원이 몰려 있을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모르겠어.’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남이 무엇을 하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무시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저 정도의 인원이라면 문제가 생길 경우 빠져나가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백아는 떠오른 생각을 털어 내고는 거리를 지나 관도로 들어섰다.
고주(高州)와 무명(茂名)을 지나는 동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것은 오천에 들어서도 마찬가지. 길을 잘못 들어 양강으로 온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많은 무인들이 도시를 점거하고 있었다.
적어도 삼 할 정도는 해남의 무인이었다.
“너무 많아.”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무인이 들어와 있었다.
본토의 일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해남에서 이 정도의 인원이 움직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중심 도시인 양강도 아닌 이런 곳에 이렇게 많은 해남의 무인이 올라왔다는 것은, 어쩌면 해남의 관심이 본토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광동으로 진출한 형산은 또 한 번 실패를 맛볼지도 모른다.
형산을 떠난 거나 마찬가지라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백아는 오천을 돌며 조금씩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해남에서 파견된 무인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은 저녁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곤란해.’
숙소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백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의 해남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해남에서 건너온 무인의 수만 어림잡아 사백여 명. 이곳 오천에 근거를 둔 운학검문(雲鶴劍門)에 속한 무인의 말에 의하면, 이미 그들은 정호산 이남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다져 놓았다고 했다.
기존의 문파들은 사실상 해남의 지부와 다를 것이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에 눌려 반항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랑이를 쫓기 위해 부른 엽사가 오히려 호랑이로 변해 버린 격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건가.”
아무리 해남파가 해남도를 벗어나는 일이 적다 해도 그들 역시 무림 집단임에는 분명했다. 당연히 그들 역시 이권에 개입하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이권의 일부, 혹은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불러들인 것은, 그것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것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날이 바뀌었다.
어느덧 동편에서 해가 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백아는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가벼운 명상을 거쳐 건천공을 다듬자 단전에서 흘러나온 두 줄기의 내력이 몸을 휘돌아 그간 쌓였던 피로를 지워 주었다.
“후우―.”
피로를 씻어 낸 백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는 높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묘시. 배를 타려면 지금 나가야 했다.
일층의 객잔으로 내려가 간단한 식사를 마친 백아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선착장은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선에 걸터앉아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모습과 그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선원들의 모습만이 선착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선이 몰려 있는 곳을 지나자 막 잠에서 깬 듯한 얼굴의 선원이 지키고 서 있는 여객선이 보였다.
눈을 비비던 선원에게 조사 중에 구입한 승선권을 건네준 백아는 여객선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른 시간이기 때문인지 승선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두 시진이 흘러도 승선자의 수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해남 출신으로 보이는 무인이 몇 명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
그래서인지 승선자 중 무인이 아닌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양강으로 가려는 걸까.’
저들이 정말 해남의 무인이라면 경유지인 양강에서 하선할 것이다. 물론 이 배는 광주까지 운항하지만, 형산과 형양표국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그곳으로 가는 것은 저들에겐 상당한 위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백아가 탄 배는 선착장을 빠져나왔다.
배의 속도는 느렸다. 아직 겨울이 완전히 가지 않아 북풍이 불어와 동쪽을 향한 항해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양강에 도착하는 것은 내일 아침이 되어야 가능할 듯싶었다.
“잠이나 잘까…….”
운기로 피로를 몰아냈다고는 해도 잠을 자는 것만큼 확실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누적된 피로가 다 가시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자 물러갔던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잠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물결의 흐름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아직도 북풍이 불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피곤에 젖은 눈꺼풀이 자꾸만 쳐지는 것을 느낀 백아는 선실 안으로 몸을 옮겼다.
第五章 해남도(海南島)(1)
해남은 섬이다.
광동의 끄트머리와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지만, 섬이라는 특성은 이곳을 중원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연도, 사람도, 모두 중원과는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