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1화
第五章 해남도(海南島)(2)


려족(黎族)이 살던 이곳에 명의 정책에 따라 이주된 묘족(苗族)이 들어오면서 생겼던 분란도 이제 서서히 멎어 갔다. 광동과 광서, 운남에서 건너온 한족(漢族)과 장족(壯族). 그리고 회족(回族)들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어, 해남은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들의 사회일 뿐, 해남의 무림은 아직도 혼란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해남으로 들어온 이민자들 중엔 무림인도 끼어 있었다. 범죄자도, 마인도 있었다. 당연히 해남의 무인은 그들이 벌인 혼란에 말려들어 그 와중에 간신히 통합을 이루고 있던 해남의 무림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갈려 버렸다.
운남에서 활동하다 점창파를 피해 해남으로 달아난 마인에 의해 해남 무림의 맹주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그 결정타였다.
삐걱거리던 해남 무림은 그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비록 맹주를 살해한 마인은 뒤를 쫓던 무인들에게 잡혀 죽었다 하나, 이미 와해되어 버린 맹을 다시 추스를 만한 인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해남파라는 이름도 사라져 버렸다.
비록 중원 무림은 아직도 해남의 무림을 통틀어 해남파라 부르나, 사실상 해남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하나의 맹으로 존재하던 해남파가 와해되면서 해남의 무림은 여섯 개의 문파가 지배하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다.
여모봉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남해검문(南海劍門)과 경해(瓊海)를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다진 대해검문(大海劍門)은 과거 해남파의 중심이 된 문파들이었다. 그리고 최근 강성해진 벽파검문(碧波劍門)은 해남파의 일원이긴 했으나, 그동안 해남파에서 받은 무시로 인해 쌓인 울분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해남과의 연관을 부정하려 했다. 그나마 정파를 표명하고 있기에 남해검문이나 대해검문과의 사이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서 좋은 것도 아닌 미묘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셋이 기존의 문파들이라면 나머지 셋은 중원에서 건너온 자들에 의해 세워진 곳이었다.
광동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해구(海口)엔 사상도법(四象刀法)으로 유명한 쾌도문(快刀門)이 있었고, 장족이 많이 살고 있는 창강(昌江)엔 장족과 려족의 결합으로 탄생한 송월파(松月派)가, 그리고 해남의 가장 남쪽인 삼아(三亞)에는 배화교(拜火敎)의 영향을 받은 회족들에 의해 탄생한 승화보(昇火堡)가 각자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수십 개의 작은 문파들이 존재하고는 있으나, 사실상 해남의 무림은 이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 여섯 문파에 속하지 않는 문파 중 독립적인 곳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해남파가 무너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문파들은 많았고, 그들 중엔 한때 저 여섯 문파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진 곳도 있었다. 오히려 다시 해남의 무림을 통일해 새로운 해남파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었던, 천강문(天剛門)이나 적룡마가(赤龍魔家)같은 곳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해남파의 일원이었던 남해검문과 대해검문이 연합하면서 천강문이 무너졌고, 쾌도문과 송월파, 승화보의 연합으로 인해 정안(定安)에 근거를 두었던 적룡마가가 무너지면서 해남의 무림은 새로운 질서로 편성되어 갔다.
정파는 해남파 출신의 문파들을, 사파는 외지의 문파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았던 혼란기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속해 있는 해남에서, 문창(文昌)에 위치한 효월장(曉月莊)은 다소 독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파에 속하는 효월장은 대해검문 계열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문창은 쾌도문의 영역, 당연히 정파 계열인 효월장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효월장은 근거를 옮기지 않았다. 쾌도문의 계열에 속한 문파들은 물론 쾌도문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문창을 지킨 지도 어언 십여 년. 당연히 얼마 못 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효월장의 선전은 해남의 문파들을 놀라게 했고, 그것은 해남의 북부를 점유하고 있는 쾌도문을 불쾌하게 했다.
더 이상 놓아두었다간 쾌도문의 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그들은 휘하의 문파들에게 일임시켜 놓았던 일을 하나씩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비록 대해검문과의 전면전을 꺼려한 쾌도문이 압박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하나 효월장 같은 중소 문파가 버티기엔 너무도 강한 압력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서히 장원을 옮기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문도들도 하나 둘씩 떠나갔다.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들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는 있으나,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서 와해되어 버릴 것은 너무도 뻔했다.
“후우―.”
효월장에 몸을 담은 지도 칠 년.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효월장의 무인, 남상운의 입에선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해검문에 지원을 요청한 것도 벌써 두 해 전이었다. 그러나 파견된 무인은 단둘. 그나마도 효월장의 무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장주나 대사형에 비하면 한 수 아래에 처지는 무인들임에도, 그들은 대해검문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주 이상의 대접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 때문에 아직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거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도.’
다시 씁쓸한 느낌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을 지배하는 법칙은 약육강식. 힘이 없는 자는 힘이 있는 자의 비호 아래에서만 당당할 수 있는 법이었다.
효월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중소 문파들 중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해검문의 비호가 없다면 쾌도문에게 멸문당할 수밖에 없었다.
효월장 같은 문파가 열이 있어야만 쾌도문과 맞설 수 있을 정도. 당연히 대해검문에 기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아.”
바람을 쐬는 걸로 기분을 전환하려 바다에 나왔건만, 오히려 침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해변을 거닐던 그의 발에 동강난 나뭇조각이 밟혔다.
“응?”
조각이라기엔 너무 컸다. 게다가 그런 조각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어선에서 떨어져 나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 이 근처에 있는 것만 끌어 모아도 어선 두 척 분량은 나올 것 같았다.
‘이상한데.’
해안가라고는 해도 만(灣)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곳에 함선의 잔해가 쓸려올 이유는 없었다. 혹여 가라앉은 지 오래된 잔해가 폭풍에 딸려 올라온 거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것이 올라오는 일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해남도의 함선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분명한 한족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중원의 함선이었다.
이상한 느낌에 젖은 남상운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 * *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쩐지 속이 메스꺼워 호흡조차도 힘들게 느껴졌다.
바닥에 등이 닿은 것을 느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아아.’
끊겼던 기억이 그제야 이어졌다.
선실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폭풍을 만났다. 분명히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을 시점이건만, 그럼에도 불어온 폭풍에 당황한 선원들의 대응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북풍에 밀려 꽤 남쪽으로 내려온 여객선은 임시 피난처마저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밀려와 있었다.
그렇게 폭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함선은 결국 폭풍에 쓸려 버렸고, 그 와중에 자신 역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그럼…….’
이곳은 어디인 걸까.
다시 힘을 끌어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실패한 백아는 살짝 눈꺼풀을 떨었다.
불안한 느낌에 내력을 끌어내 보았다. 단전은 다치지 않았는지 내력의 흐름은 예전과 동일했다. 혹시라도 근맥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력을 돌린 백아는 별다른 부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지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마 탈진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긴 어딜까.’
해남, 아니면 복건성 밑에 있다는 섬일 것이다.
‘해남이겠지.’
복건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다. 아무리 폭풍에 휩쓸렸다 한들 그곳까지 밀려가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이곳은 해남, 혹은 그 부근의 작은 섬이리라.
생각을 갈무리한 백아는 다시 내력을 돌렸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모르는 지금 해야 할 일은 내력을 운용해 굳어 버린 근육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혈맥마저도 정상이 아닌지 내력의 흐름은 평소보다 더뎠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폭풍에 휩쓸리고도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것은 천행(天幸)이다. 굳어 버린 맥도 시간이 지나면 풀릴 테니 크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후우―.”
반 시진 동안 내력을 운기하자 상체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근육은 경직되어 있어, 움직일 때마다 살이 찢기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들었다.
‘큭.’
눈물마저 찔끔 흘러내릴 정도. 칼에 베인 것보다 통증이 더 컸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백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떤 건물의 내부임은 확실하나, 그 외의 것은 알 수 없었다. 더 추측해 볼 수 있는 거라면 가난한 촌민의 집은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무가……인가.’
약간 낡은 듯한 장식장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못이 박혀 있었을 부분이 덜렁거리는 것으로 보아, 족히 이십 년은 된 물건으로 보였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벽면에 걸린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흔히 볼 수 있는 장검. 그러나 손잡이를 감고 있는 가죽 끈은 많이 낡아 있었다. 아마도 지독한 무공광의 검이거나, 저대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리라.
한동안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백아의 눈이 다른 방향을 향했다.
‘아아.’
한문(漢文)이다.
이곳이 해남이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물론 광동이나 복건의 해안에 떠밀린 걸지도 모르나, 벽에 걸려 있는 장검은 중원의 양식이 아니었다. 더욱이 운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박도(朴刀) 역시 아니었다.
더군다나 백아는 저런 형태의 검을 본 적이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기억을 흐릿하게 만드는 그 소리에, 백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윽.”
“아직 무리하지 말게나. 무인이라고 해도 부상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니까.”
“가, 감사합니다.”
끔찍할 정도의 통증이 또다시 찾아들었다. 오히려 뼈가 부러지는 것이 더 나을 정도. 도대체 얼마나 굳어 버린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대충 이레 동안이나 누워 있었으니, 아무리 내력으로 다스린다 해도 쉽게 풀리지 않을 걸세.”
‘칠 일이나 누워 있었나.’
어쩐지 힘이 없다고 느꼈다. 그저 피로 때문일 거라 생각했건만, 굶주림 역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허기가 찾아들었다.
“죽이라도 들겠나?”
백아의 표정을 본 노인은 그런 백아가 안쓰러웠는지 제안을 했고,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감사를 표했다.
“조금 식긴 했네만, 괜찮을 걸세.”
“어떻게…….”
“아마 오늘쯤 일어날 것 같아서 준비해 두고 있었지.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일어나더군.”
아직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그릇을 받아 든 백아는 거의 마시듯이 죽을 삼켰다. 턱관절에 통증이 느껴져 말하는 것도 힘든 지금, 씹어 삼키는 것은 무리였다.
죽이 들어간 뱃속은 곧 가라앉았다. 부족하나마 허기도 물러가 여유를 찾은 백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 그렇게 보지 말게. 자넬 건져 낸 건 내가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나하고 이 방을 같이 쓰는 녀석이 자넬 데려왔네. 남상운이라고, 여기에 칠 년이나 처박혀 있는 불쌍한 놈이지.”
어째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자부심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음? 아, 그렇지. 자넨 외지인이지?”
자문자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다시 백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효월장이라네.”
“효월장?”
“해남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무가일세. 뭐,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무슨 뜻일까.
심각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여유로웠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 백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궁금한가?”
“부정할 순 없군요.”
“뭐, 움직이지도 못할 테니 심심하겠군. 그럼 노인네 넋두리라도 들어 보겠나?”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겠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군.”
반색의 빛을 띄운 노인은 입을 열었다.
해남 무림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개중엔 백아가 알고 있는 것도 있었으나, 역시 해남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훨씬 더 자세하고 방대했다. 그래서인지 노인의 말이 끝나 갈 즈음엔 해남 무림의 정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단 복잡한데.’
“……그래서 지금 이곳은 멸문 직전이라 이거지. 아마 쾌도문이 전면전을 걸어오면 하루도 못 버틸 걸세. 잘 쳐 줘야 세 시진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 정도입니까?”
“쾌도문만 한 문파 셋이 모이면 대륙의 구파라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네. 물론 대륙 사람들은 부정하겠지만, 예전의 해남파가 무당과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해남 무림이 얼마나 치열한 곳인지 알 수 있지 않겠나?”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