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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第五章 해남도(海南島)(3)
확실히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문창을 뜨는 게 좋을 텐데, 장주는 끝까지 버티겠다고 하는 중이지. 덕분에 우리 같은 무사들만 죽어나고 있고. 뭐, 나야 이제 나이도 있으니 상관없다지만 젊은 녀석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죽을 맛이겠지.”
“그 대해검문이라는 곳은…….”
“말도 말게.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도 모를 이류 무사 둘을 보내 놓고는 할 거 다 했다는 듯이 버티는 놈들에게 뭘 바라겠나.”
약간은 감정이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윽.”
“아아, 무리하지 말게나. 좀 쉬어야 할 것 같으이.”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쉬어 두지 않으면 회복이 더뎌질 것 같았다.
“그럼 나가네. 편히 쉬게나.”
백아의 상태를 살핀 노인은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백아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갔다.
예정과는 어긋났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단 하나, ‘그’를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광동 무림보다는 해남이 나을 것이다.
‘윽.’
다시 통증이 몰려오자 몸을 움츠려 통증을 줄여 갔다. 그것이 사라질 무렵엔 누적되었을 피로가 몰려들었다.
피곤함에 몸이 지쳐 가는 것을 느끼며, 백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점점 높이 떠오르는 해가 지면을 달궜다. 따듯해진 공기가 위로 올라갔다.
아지랑이. 아직 피어오르기엔 이른 시점이건만, 해남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몸은 좀 괜찮은가?”
검을 거두고 호흡을 고르는 백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무리하진 말게. 다 나은 것 같아도 어혈(瘀血)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으니 말일세.”
“주의하겠습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신을 구 노인이라 부르라고 한 저 노인은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무인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느낌이 자꾸만 자신을 사로잡았다. 일류와 이류의 경계 사이에서 맴도는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면서도, 어쩐지 모를 괴리감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공으로 따지면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남상운이라는 청년이 조금 더 강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그 청년이 구 노인에게 지나치게 깍듯이 대하기 때문이리라.
“아, 일어나셨습니까.”
“지난번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아, 아니.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거참. 구해 준 놈이 저자세로 나가면 어쩌겠다는 거냐.”
“어르신!”
“이해하게나. 이놈이 원래 좀 어리버리해서 말이야.”
남상운은 껄껄 웃는 노인에게 항의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런 것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러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포기한 쪽은 남상운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항복 선언을 한 남상운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보았다. 그러나 허허거리며 웃는 구 노인은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남상운은 백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신입니까?”
“……예.”
그것이 걱정되었다면 그냥 놓아두면 되었을 일. 그것을 감수했음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쾌도문이라는 강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곳의 무사에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무인의 출신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남악, 형산의 제자입니다.”
“아아.”
남상운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그럼…….”
“적전은 아닙니다.”
백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상운은 그런 백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 태도에 백아는 오히려 당황해 버렸다.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남상운을 바라본 백아의 귀에 구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의외로구먼.”
구 노인 역시 남상운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해할 수 없다. 무엇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왜 그러십니까?”
“명문의 제자라고 생각했네. 물론 적전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왜…….”
“당연하지 않나. 명문의 적전이 아니고서야 그 나이에 어찌 그 정도의 내력을 쌓을 수 있겠나.”
당혹감이 더 깊어진다.
별것 아니라고 했던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력에 한정된다고는 해도, 백아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강한 사람들과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자신과 함께 있었던 것은 항상 자신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신경 쓰고 있던 사람이 그런 부류였을 뿐. 다른 사람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당혹감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식의 차이,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형양표국의 삼국주인 이효기 역시 이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가.
“이만한 평제자를 길러 내다니, 무당이라도 두렵지 않겠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구 노인은 남상운을 바라보았다.
“네놈도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있으면 수련이라도 해라. 비어검(飛魚劍)도 겨우 육성밖에 못 익힌 주제에 이렇게 마음 편하게 있어도 되겠냐?”
남상운이 찔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으나 노인의 시선은 집요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으면서도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느껴져, 남상운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밤낮 연습만 한다고 실력이 느는 건 아니잖습니까.”
“말은 잘한다.”
“맞는 말 아닙니까.”
“쾌도문이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항복해야지 별수 있습니까.”
“그럴 생각도 없는 놈이 말은 잘해요.”
구 노인은 그런 남상운을 보며 혀를 찼다.
백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남상운에겐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쾌도문에 맞서고 있다고 했던가.’
잠깐 돌아본 효월장은 생각보다 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했던 것에 비해 큰 것뿐이었다. 형산은 물론 형양표국이나 광동진가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속한 무사의 수도 채 마흔이 되지 않아 보였다.
이런 규모의 단체가 해남의 북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쾌도문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벌써 십여 년을 버티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 그래서 이렇게 작아졌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놈아, 그럼 실전 연습이라도 해 둬야 할 거 아니냐. 무공이 낮으면 경험이라도 많아야 하는데, 네놈이 경험한 거라고 해 봤자 고작 해적 몇 놈 쓰러뜨린 것밖에 없으니…… 그런 실력으로 고수를 만나면 십초도 못 버티고 죽을 게 뻔하다, 뻔해.”
“꼭 그렇게 악담을 하셔야 합니까.”
생각에 잠겼던 백아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남상운과 다투던 구 노인은 그런 백아를 보며 눈을 빛냈고, 그것을 느낀 백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이놈아.”
“그럼 어르신이 가르쳐 주시면 되잖습니까.”
“내가 이 나이에 팔팔한 놈하고 겨루게 생겼냐. 날이 갈수록 뼈마디가 쑤시는 게, 조금만 움직여도 죽을 맛이야.”
“그럼 말을 꺼내지 마시던가요.”
약간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남상운을 보며 허허 웃던 구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야.”
“……알겠습니다.”
“허어?”
“저도 해남의 무공이란 걸 보고 싶군요.”
“거참, 눈치도 빠르구먼. ……저놈이 자네 반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야.”
“어르신!”
항의 섞인 외침이지만, 구 노인의 얼굴에 깃든 웃음은 한층 더 짙어졌다.
“겨우 비어검이니 눈에 찰지 의문이구만.”
“저도 비파검 외의 것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까 한 말 취소네. 형산이 무당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
약간 얼굴을 찡그린 구 노인은 고개를 젓고는 남상운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쩔 거냐?”
“괜찮으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렇다는구먼. 그럼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백아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인 남상운 역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잔뜩 굳은 표정을 한 남상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긴장이 지나쳐 대답을 하기도 버거운 모양이었다.
저래서야 제대로 검을 펼칠 수나 있을까.
“이놈아, 생사결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는 없잖냐.”
“후우―.”
긴 한숨이 토해진다. 그걸로 진정되었는지 몸이 조금 전보다 가벼워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남상운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안정된 자세. 그것만으로도 한 단계 더 높은 상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서로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살짝 들어 올린 백아의 신형이 빠르게 짓쳐들었다.
“웃.”
간신히 검을 쳐 낸 남상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이격이 날아들었다. 측면, 왼쪽에서 내리쳐진 검이 사선을 그렸다. 한 발 물러나 공격을 피한 남상운은 그 뒤를 바짝 추격해 온 검날을 피해 나려타곤을 반쯤 닮은 수법으로 땅을 굴렀다.
‘지당권?’
적절한 회피. 그러나 그것에 담긴 것은 해남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공이었다.
약간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건 주도권이 아직 자신에게 있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순식간에 당혹을 지워 낸 백아의 검이 다시 빛을 뿌렸다.
비파검의 검로를 착실히 밟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정확하지는 않았다.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검이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버리기로 했던 것이 끼어들었다. 쉽사리 떨쳐지지 않아 당혹감만 깊어 갔다. 비록 공격은 더 날카로워졌지만, 일 년이 지났음에도 안정시키지 못한 검.
아직, 이것은 자신의 검이 아니었다.
백아는 황급히 초식을 물렸다. 그러자 그 틈을 탄 남상운의 검이 백아를 노렸다.
휘청거리는 검격. 비어검이라더니, 정말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닮았다.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흐름을 빼앗기자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방어, 그리고 계속 방어뿐. 그런 백아의 하체를 노린 공격이 날카롭게 들어왔다.
왼쪽 발을 뒤로 물려 공격을 피했다. 마치 그 발을 물려는 듯이 검날이 날아들었다.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먹이를 노리는 모습 그대로를 닮은 공격을 들어 올린 발로 검을 밟아 막아 내었다.
“큭.”
“후우―.”
남상운의 검을 밟아 땅에 박아 넣은 백아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았다.
“져, 졌습니다.”
백아는 검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검을 밟아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놀랐다는 표정을 지은 남상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백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식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발을 움직인 것뿐. 만약 그 동작이 무엇이었는지 느꼈다면 아마도 중간에 멈췄을 것이다.
“자네, 왜 그랬나?”
“…….”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해, 백아는 입을 다문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아까 검을 거두지 않았다면 수세에 몰리지 않았을 걸세. 아니, 아예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르지.”
불확실하게 말하고 있지만, 구 노인은 은연중에 결과를 단정 짓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 공격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더 빨리 끝났을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남상운의 대응은 조금 늦은 감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제대로 막아 내기 어려웠으리라.
“경험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백아는 어쩐지 취조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을 다문다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검로가 어긋났습니다.”
“무슨 소린가?”
구 노인만이 아니라 남상운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검이 더 날카로워졌던 것 같은데, 검로가 어긋났다니?”
‘후우―.’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입을 열기가 어려웠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에 손을 든 백아는 광동에서의 일을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해남 무공?”
“남해검이라고 하더군요.”
백아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