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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第五章 해남도(海南島)(4)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강렬한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응?’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올린 백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둘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남해검이었나?”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광동으로 나간 문파라면 쾌도문일 터……. 역시 남해검은 쾌도문에 있었군.”
구 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해남파의 절기가 외부에서 들어온 문파에게 흘러 들어가다니.”
구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백아는 그 속에서 아쉬움이 아닌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다. 왜 저런 표정 속에서 아쉬움이 아닌 다른 것이 엿보이는 걸까.
“하긴, 남해신룡(南海神龍)이 사라진 곳이 경산(瓊山) 부근이었으니 쾌도문에 남해검이 전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어.”
“그, 그랬습니까?”
“해남 무인이라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냐?”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 남상운을 향했다. 찔끔한 남상운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구 노인은 혀를 차며 백아를 바라보았다.
“그 검에 섞인 게 남해검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비파검만 익혔다 했으니, 남해검이 섞인다 해서 손해 볼 건 없지 않겠나.”
“그건 곤란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백아는 다시 입을 이었다.
“비파검만 익힌 상태라면 모를까, 다른 것이 섞인 상태에서는 더 강한 무공을 얻어도 익히기 어려워질 뿐이니까요.”
“남해검 역시 떨어지는 무공이 아닐세. 게다가 그런 무공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또 한 번, 기분이 가라앉았다.
너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런 무공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남해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 적어도 화산의 무공에 뒤지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어느 정도의 무공을 원하는 건가?”
“……화산의 무공을 아래로 볼 수 있을 정도랄까요.”
“허허.”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구 노인의 눈이 백아를 향했다.
왠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는데도 자꾸만 몸이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 백아는 살짝 고개를 젓고는 구 노인의 시선을 받아 내었다.
“그럼 무당이나 소림으로 가 보지 그러나.”
“이미 형산의 제자가 된 몸입니다. 받아들여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군요.”
조금은 질렸다는 듯한 얼굴을 한 남상운도 백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르신.”
“응? 뭐냐?”
“해남 무공엔 그런 게 없습니까?”
질문을 건넨 남상운을 향해 그럴 리가 있냐는 표정을 지은 구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당에도 비견되던 해남 무림이다. 그런 무공이 없었다면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없었겠지.”
구 노인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모습.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되어서야 구 노인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남해삼십육검이라면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이나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에 뒤지지 않겠지. 매화검법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러고 보니 이백 년 전의 해남 장문인은 남해삼십육검으로 검성으로 불렸던 적도 있군. 물론 무당은 넘지 못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어르신, 남해삼십육검은 이미…….”
“그건 알고 있냐?”
“해남 무림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껏 아쉬움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절전된 건가.’
그런 느낌이 전달되었는지, 백아 역시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남아 있었다 해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아 역시 무인. 강한 무공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지. 적룡마가의 무공이나 천강문의 천강검(天剛劍)…… 아니, 천강검(天|劍)도 실전되었으니까.”
“천강검이라니요?”
남상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다.
“천강검(天剛劍)은 들어 봤습니다만, 천강검(天|劍)이라는 건…….”
“하긴, 젊은 놈들이야 모르고 있겠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 구 노인은 말을 이었다.
“천강검(天剛劍)의 강화판이라고 보면 된다. 뭐, 무당에서 말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과는 전혀 반대되는 개념의 무공이지. 강능단유(剛能斷柔)라고, 강한 것은 부드러움을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게 천강문이니까.”
“그렇습니까?”
“강(剛)으로는 부족해서 강(|)의 경지까지 노리던 무공일세. 강함으로만 따지면 중원의 어느 무공보다 수준이 높겠지. 비록 적룡마가의 무공에 꺾였었다고는 해도, 그건 숙련도의 차이 때문이었으니 완벽하게 익히기만 했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을 거야.”
사뭇 진지한 투로 말을 잇던 구 노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천강문이나 적룡마가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 남은 건 남해검문의 청해풍운검(淸海風雲劍) 정도겠구먼. 그나마 남해삼십육검의 잔해를 모아 만든 거니 말이야.”
확언이 아닌 추측이었다.
해남의 강한 무공은 전부 실전되어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까.
“그럼…….”
“아, 형님!”
막 질문을 건네려던 백아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입을 닫았다.
뒤를 돌아보자 평복을 입은 사내가 보였다. 급히 달려왔는지 숨이 찬 듯한 모습. 그 모습에 남상운은 채 숨을 고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쾌도문이냐?”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는 입을 벙긋거렸다. 급하게 뛰다 갑자기 멈추자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잠시 동안 억지로 말을 하려 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빌어먹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급히 뛰어가는 남상운을 보던 백아는 구 노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뭔가?”
“안 가십니까?”
“이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저 늙으면 따듯한 아랫목에 누워 있는 게 제일일세. 저런 데 끼어 봤자 괜히 눈치만 보게 만들어.”
허허거리며 웃던 구 노인은 이제야 숨을 고른 사내를 돌려보냈다. 그 사내 역시 구 노인을 향해 뭔가 말을 꺼내려 한 듯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사라져 갔다.
이상한 느낌이 다시 백아를 찾아들었다.
“별일 아닐 걸세. 애초에 일을 벌이려면 이럴 틈도 안 주고 급습할 놈들이야.”
“그렇습니까.”
“적룡마가를 무너뜨릴 때도 그랬지. 정상적인 공격이었다면 적룡마가가 무너질 리 없었건만…….”
구 노인은 다시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 정도 배짱밖에 없는 놈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너무도 태평한 모습. 백아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자네.”
“예?”
“술 좋아하나?”
“허허, 그래서 말일세…….”
얼떨결에 잡혀 들어가 술을 마신 지도 벌써 한 시진 반. 내력으로 취기를 몰아내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어질어질한 눈으로 구 노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이 취한 것처럼 보였으나 백아는 그가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한잔 더 하게나.”
손을 내저으려 했다. 그러나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취해서가 아니었다. 약간 어지럽긴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도,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언제 눈을 감았던 걸까.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달이 대신하고 있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어지럼증을 느꼈다. 내력을 돌려 남아 있는 취기를 몰아내자 그제야 흔들리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후우―.’
맑아진 눈을 들어 올렸다.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적막.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내력을 운용해 몸을 가볍게 만든 백아는 벽에 걸려 있는 검을 챙겨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곳곳에 횃불이 켜져 있었다. 상당히 엄중해 보이는 방어 태세가 갖춰져 마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요새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달이 만든 그림자 안으로 숨어든 백아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구 노인이나 남상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상운이야 그렇다 해도 구 노인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그 노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한동안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백아의 눈에 오전에 보았던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나면 놀랄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인기척을 낼 수도 없는 일.
잠시 고민하던 백아는 소리 없이 다가가 인기척을 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수혈(睡穴)을 짚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핀 백아는 그를 담벼락 밑으로 옮겼다. 한차례 호흡을 골라 빨라진 맥을 추슬러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간 백아는 잠들어 쓰러진 사내를 흔들어 깨웠다.
“으…….”
“괜찮으십니까?”
“으…… 으아앗! 누, 누구…….”
“오전에 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기파를 내뿜어 큰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 백아는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놀란 눈을 한 채 몸을 움츠리던 사내는 한참 후에야 그를 기억하고는 진정된 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지금 무슨 상황인 겁니까?”
“쾌도문이…… 아!”
다시 당황한 기색을 띄운 사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 수상한 사람을 못 보셨습니까?”
“담장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태도를 보인 백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내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쾌도문이 급습한 겁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백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쾌도문이 오전에 급습했다면 이곳으로는 지금까지 막아 낼 수 없었을 텐데요.”
“그, 그게…… 오전부터 포위만 하고 있습니다.”
‘포위만?’
이상한 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아 무너뜨릴 수 있는 곳을 포위하고만 있는 이유가 무엇인 걸까.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에, 방에 안 계십니까? 장주님께서 찾으신 것도 아닐 텐데?”
“장주님께서 어르신을 자주 찾으시나 보군요.”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가끔…….”
계속 말을 이어 가던 사내는 갑작스럽게 말을 끊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왜 그러십니까?”
“제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된 겁니까?”
“반 각도 되지 않았습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었다. 아마도 정찰 중이었던 듯, 사내는 다시 주변을 살피고선 백아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분들은 소협의 얼굴을 잘 모르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 계시는 게…….”
백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백아는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느껴진 이상한 기운에 백아는 발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가까운 곳이군.’
조금만 더 먼 곳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도의 미약한 느낌이었다.
“잠시 피해 계시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예?”
“그럼.”
짤막한 인사를 남긴 백아는 그대로 담을 뛰어넘었다. 당황한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담을 두 개 정도 더 넘자 인공적으로 조성된 듯한 숲이 보였다.
경계를 펼치고 있는 무인들을 피하느라 늦어진 탓인지 조금 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백아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기척을 죽였다. 눈으로 보지 않는 한, 다 자란 사슴이나 멧돼지 정도로 느낄 것이다.
한참 동안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살짝 몸을 떨었다. 의도적인 움직임. 사람이 아닌 동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한 동작이었다.
그제야 사라졌던 기운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걸 느낀 순간, 백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달라.’
구 노인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백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생각했던 사람은 아니라 하나, 분명히 지금의 자신보다는 강한 사람의 기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온 경험 덕분일 것이다.
반 각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슬슬 이렇게 있는 것도 한계라고 느낄 무렵, 순간적으로 강한 기운이 명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뛰쳐나갈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그와 동시에 근처에 있던 기운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 백아는 그 기운이 희미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형을 날렸다.
그게 너무 늦었던 걸까.
예상 지점에 도착한 백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나무와 풀이 우거진 평범한 숲의 모습뿐이었다.
사람을 놓쳤다는 것을 확인한 백아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찾은 흔적은 희미했다. 그러나 찾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아마도 구 노인으로 착각했던 사람의 흔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