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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25화)
제10장 동상이몽(同牀異夢)(3)


해남사당 가운데 하나인 인성당의 경내를 거니는 일남 일녀가 있으니 구미령과 뇌진천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초로당(初露黨)에서 삼 년 정도 머물러야 한다. 게다가, 조장이 되려면 정식으로 배속된 이후로도 평무사로서 최소한 십 년 이상의 경력을 쌓아야 하지. 이제 네가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지 알겠느냐?”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호오, 그래? 그럼 넌 본 당주에게 뭘 해 줄 테냐?”
구미령은 은근하게 물었다.
“당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뇌진천의 대답이 흡족한지 구미령은 까르르 웃었다.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본 당주는 장문인께서 분부하신 일이 있어 오늘부터 한 달가량 자리를 비우게 될 것이다. 본 당주가 복귀하고 나면 그날부터 매일 밤 내 침소로 들거라. 알겠느냐?”
구미령은 고혹적인 눈웃음을 선사했다. 뇌진천은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기꺼운 태도로 대답했다.
“존명!”
“혹시 뭐 궁금한 거라도 있느냐?”
“장문인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의 존성대명은 이미 알 테고……. 장문인께서는 벽력호(霹靂虎)라는 별호만큼이나 용맹하시며 또한 잔혹한 분이시지. 어떤 이들은 독재자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알력 다툼이 심한 해남파를 이끌어 나가시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해남파가 지금처럼 다시 하나가 되어서 구대문파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도 다 그분의 강력한 영도력 때문이지.”
구미령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장문인의 슬하에 있는 외동딸이 보통 왈가닥이 아니라서 그게 참 문제다. 아마 나이는 너랑 비슷할 텐데, 성정이 보통 고약한 게 아니야.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아주 신경질적이며,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지. 그래서 사갈미희(蛇蝎美姬)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최고 수뇌이신 두 분의 성품이 그러하다면, 불만을 품고 있는 자도 꽤 있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 내심 불만을 품은 자들은 있겠지만 감히 표출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즉결 처형이니까. 다만, 명목상으로 장문인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칠웅각(七雄閣)의 웅주(雄主)들은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리지. 사실 예전에는 그들 역시 돌아가면서 해남파의 장문인을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구미령은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장문인의 무예는 본문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게다가 그 위엄과 권위는 따를 자가 없다. 본문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잡음 정도는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이시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샘터에 이르렀다.
“목마르지 않느냐?”
“약간 갈증이 나긴 합니다. 그런데 저 물은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라. 본 당주가 너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테니까.”
이렇게 말한 구미령은 샘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춘 다음 고개를 위로 쳐들어 아래로 하강하고 있는 물줄기 하나에 입을 댔다.
그렇게 자신의 입에 물을 가득 채운 구미령은 다시금 뇌진천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뇌진천의 양 뺨을 붙잡은 구미령은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개었다. 그리고 그녀는 입 안에 담고 있던 물을 그의 입속으로 넣어 주었다. 그렇게 물을 전해 준 다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그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구미령이 자신의 뺨을 놓아 주자, 뇌진천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본 당주가 선사해 준 구전수(口傳水)의 맛이 어떠하냐?”
뇌진천은 난데없는 상황에 일순간 굳어져 버린 자신의 표정을 황급히 지운 다음, 공손하게 답했다.
“황홀했습니다.”
“깔깔깔!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번 출장만 마치고 돌아오면 매일 밤마다 맛보게 해 주마.”
구미령은 요염한 표정으로 뇌진천을 응시했다.
“영광입니다.”


7

동쪽에서는 밝은 빛이 아련하게 비춰 온다. 조금 전만 해도 하늘에 가득하던 별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이슬로 깨끗이 목욕재계를 마친 새벽 공기는 신방에서 다소곳이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홍조를 띤 채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침 직전의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던 만물도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잿빛의 하늘은 푸르게 바뀌었다.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자, 화들짝 놀라며 잠을 깬 다람쥐들은 나뭇가지 위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저길 봐. 아직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애송이잖아?”
“저놈이 구 당주의 새로운 정부(情夫)라지?”
“그래. 그 덕분에 이번에 인성당의 조장이 된 거잖아? 난 틀림없이 운삼이가 십이 조장이 될 것으로 여겼는데…….”
“원래는 그렇게 내정되어 있었지.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르는 저 풋내기가 조장이라니…… 기가 막히는군.”
“누구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얼굴 하나로 단번에 조장이 되고, 누구는 십 년이 넘도록 온갖 고생을 다 해도 이 모양이고……. 더러워서 이거! 다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이렇게 수군거리는 무인들은 저쪽에 있던 뇌진천의 시선이 향하자,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가 거니는 장소마다 끼리끼리 모여 힐끔거리며 이런 식으로 흉을 보곤 했다.
“흐∼음? 인성당주의 새로운 노리개가 바로 너로구나.”
경내를 시찰하던 뇌진천의 귓전에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무척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하지만 무척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흑색무복 차림의 무사 다섯 명이 시립했다. 그녀는 시장에서 물건이라도 구경하듯 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죄송하지만, 뉘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뒤에 있던 무인 가운데 하나가 말을 받았다.
“무엄하다! 감히 소가주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속하가 소가주님을 뵈옵니다.”
뇌진천은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지만, 무릎까지 꿇지는 않았다. 옥류비연은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래, 어디 내 앞에서도 재롱 한번 떨어 보아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인은 잘…….”
가까이 다가선 옥류비연은 뇌진천의 얼굴에다 대고 냅다 침을 뱉었다. 이에 그는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건방진 놈!”
옥류비연은 곧장 뇌진천의 귀싸대기를 세차게 올려붙였다. 그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뺨을 허용했다.
이를 시작으로 옥류비연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번갈아 가며 뇌진천의 뺨을 십여 차례나 연달아 후려쳤다. 이로 인하여 그의 두 뺨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그렇지만 뇌진천은 여전히 매서운 시선으로 옥류비연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테냐? 그 창녀 같은 계집년의 노리개 주제에……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 이거냐?”
뇌진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옥류비연이 눈짓을 하자, 후위로 도열해 있던 무사들 가운데 두 명이 뇌진천의 양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각각 그의 종아리 상단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로 인해 뇌진천은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는 형국이 되었다.
옥류비연은 뇌진천의 얼굴 앞에다가 자신의 오른발을 들이밀었다.
“자, 어서 개처럼 핥아서 내 신발을 깨끗하게 만들어.”
뇌진천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거부하자 옥류비연은 들었던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래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역겨운 녀석! 난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
옥류비연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대신, 그녀를 수행하던 다섯 명의 무사가 뇌진천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그들은 뇌진천을 향해 사정없는 발길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마구 짓밟았다. 뇌진천은 굳이 반항하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로 자신의 몸을 그냥 내맡겼다.
저만치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즐거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옥류비연의 입이 열렸다.
“그만하면 됐다. 잘못해서 죽여 버리면, 그 여우같은 계집년이 돌아와서 또 어지간히도 시끄럽게 굴 테니까.”
뇌진천을 공격하던 무사들은 일제히 물러섰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홀로 남겨진 그의 몰골은 상당히 처참했다.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든 채 퉁퉁 부었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섞인 진물이 질질 흘러내렸다. 입고 있던 흑색 무복은 하얗게 보일 정도로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상황이었다.
옥류비연과 그녀의 일행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뇌진천은 팽이처럼 몸을 휘돌리며 사뿐하게 일어났다.
머리칼과 옷에 묻은 흙먼지를 깨끗하게 털어 내는 것을 시작으로 뇌진천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대충 추슬렀다. 그런 다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처소로 향했다.
그때, 꽃잎 하나가 바람에 의해 뇌진천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8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으나, 칠웅각 지하 석실에서는 네 명의 웅주가 은밀히 회동을 가지는 중이었다.
“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참으며 옥류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단 말이오?”
뇌류세충(雷流世充)의 말에 수석웅주 비류경령(琵流慶齡)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대꾸했다.
“옥류혁성은 역대 장문인들의 갑절에 달하는 상납금을 짜내 온 것도 모자라 또다시 인상하려 하고 있소.”
청류중귀(淸流重貴)는 탄식하듯 말했다.
“구대문파에 들려고 막대한 뇌물을 쏟아 부었으니 해룡전 금고에 돈이 떨어진 게지. 그까짓 숭의맹이 뭐라고 우리의 고혈을 짜내어 깡그리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이오?”
이번에는 태류현청(泰流玄淸)이 말을 받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구대문파에 든다고 하여 우리 해남파가 얻는 게 대체 뭐가 있소? 결국 옥류혁성의 명예욕을 채워 주는 것 이외에는 득 될 게 하나도 없소이다.”
“옳은 말이외다. 지금껏 우리는 숭의맹 따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충분히 안전하게 지내 왔소. 예전처럼 해남도를 다시금 금역으로 만들어서 대륙에 일절 관계하지도 않고 간섭 받지도 않으며 지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오.”
태류현청의 말에 나머지 세 명의 웅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서 비류경령이 입을 열었다.
“다시금 예전의 체재로 바꾸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옥류혁성을 제거하는 것뿐이오.”
그 말에 나머지 웅주는 침을 꼴딱 삼켰다.
사실 그들도 지금까지 반역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옥류혁성의 무공과 위용이 워낙 절륜하여 지금껏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튀어나온 돌은 정을 맞게 마련이다.
괜스레 앞장섰다가 일을 그르쳐서 개죽음을 당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눈치만 봐 온 그들이었다.
“그, 그게 과연 가능하겠소?”
청류중귀의 의구심 어린 질문이었다.
다른 두 웅주도 비류경령의 입을 주목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옥류비연의 손에 어이없이 심복을 잃은 천성당주도 겉으로는 장문인에 대해 여전한 충성심을 과시하고 있으나, 내심으로는 그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오.”
뇌류세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웅주의 짐작이 옳을 게요. 그 계집년이 비록 그 사건 이후로 자중하고 있으나, 계율에 따르면 예외 없이 엄한 처벌을 받았어야 했소. 하지만 장문인은 그래도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과실을 눈감아 주고 넘어가 버렸지 않소? 강진항(姜進沆)은 틀림없이 벽력호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오.”
비류경령이 재차 말을 받았다.
“마침 벽력호의 오른팔과도 다름없는 인성당주가 지금 대륙으로 떠나 있소. 무위가 출중한 자들을 자객으로 삼아서 구미령이 해남도로 복귀하기 전에 암살하면 사실상 인성당은 마비될 것이오. 또한, 천성당주만 설득하면 평소 그와 친분이 두터운 지성당주도 결국 우리 편이 될 것이오.”
세 웅주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거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 중도파를 자처하는 나머지 세 웅주도 결국은 우리와 뜻을 함께하게 될 것이오. 게다가, 잘만 하면 좌호법도 포섭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도 얼마 전에 장문인으로부터 별것 아닌 일로 아주 크게 징계를 받아서 생긴 앙금이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오.”
“수석웅주의 말을 듣고 보니 거사가 그렇게 요원한 일도 아닌 것 같소. 의외로 쉽게 이루어질 수도…….”
조심성이 많은 청류중귀는 아차 싶었던지 말꼬리를 흐리며 비류경령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소이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면에서 지금의 상황은 우리에게 아주 유리하오. 본인은 가장 어려운 좌호법을 설득할 테니 태류 웅주는 천성당주를, 뇌류 웅주는 지성당주를 설득하시오. 그리고 청류 웅주는 나머지 웅주들을 잘 다독거려 끌어들이도록 하시구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