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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24화)
제10장 동상이몽(同牀異夢)(2)


“백구(白鷗, 갈매기)는 지금도 깨어 있는가?”
구미령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장청영도 이내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해변에서 주웠고 기억을 잃었으니 그 청년에게 백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이리라.
“탕약을 먹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당주님께서 원하시면 바로 깨우겠습니다.”
“됐네. 그만 물러가게.”
“존명!”
장청영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구미령은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는 그녀가 백구라는 이름을 붙여 준 청년이 담요를 덮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해변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날도 어두웠고 모래도 많이 묻어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뽀송뽀송한 솜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백옥의 피부와 긴 속눈썹, 석류처럼 붉고 육감적인 입술, 선이 단아한 이목구비까지…….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용모를 지닌 이 청년은 다름 아닌 뇌진천이었다.
“호오! 밝은 실내에서 말끔하게 닦아 놓고 보니 해변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미남인걸?”
구미령은 뇌진천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천천히 걷어 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또다시 이채가 떠올랐다.
여성스러운 얼굴과는 달리 뇌진천의 몸은 상당한 근육질이었다. 마치 철옹성을 연상시키는 듯한 강인하고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툼한 가슴과 윤곽이 뚜렷한 근육들은 마치 조각을 한 것처럼 정교하고 짜임새가 있었다.
이것은 그동안 충실하게 신체 단련을 해 온 결과였다.
구미령은 절반만 걷힌 담요를 완전히 치워 버렸다.
그러자 뇌진천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청영이 몸 상태를 살펴보고 치료하느라 옷을 모두 벗겼던 것이다.
얼굴을 제외한 뇌진천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움푹 팬 하단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뇌진천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는 구미령의 만면에는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기대 이상인걸. 비록 몸에 흠집이 많기는 하지만, 이건 또 이것 나름대로 매력이 있군. 좋아, 아주 좋아.”

***

뇌진천은 처음부터 잠이 든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뛰어난 내가요법을 통해 자신의 호흡과 기척을 조절하여 그렇게 행세할 따름이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애당초 자신을 발견한 여인이 들어온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뇌진천은 상대가 전혀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여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구미령이 난데없이 발가벗겨진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미령은 아주 짙은 염기를 자아냈다. 영락없는 요부의 그것이었다.
낙양에서의 사 년 동안 지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뇌진천은 여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다.
곤륜파에 있을 때에도 무공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한수겸의 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을 때도 이성으로서의 여자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음녀에게 걸려들 줄이야. 이것 참 기분 더럽군. 하지만 풍기는 기도로 볼 때 대단한 고수다.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아마 해남파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을 터. 이 여자를 잘만 이용하면 손쉽게 해남파의 심장부로 침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큰일을 이루기 위해 한순간의 수치심 정도는 참아 내야만 한다.’
뇌진천의 이런 속내를 전혀 모르는 구미령은 마치 품평이라도 하기 위함인지 그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며 더듬기도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금 담요로 그의 몸을 덮어 주었다.
구미령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당장에라도 품어 보고 싶지만, 당분간은 참아야겠지. 모처럼 얻은 보물인데 허무하게 망가뜨리기는 싫으니까.”
이 말을 끝으로 구미령은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뇌진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는 채양보음술(採陽補陰術)을 익힌 마녀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나를 해칠 의사는 없다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나의 내력이 감지되어 일을 그르칠 수가 있지.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가 문제로군. 아무튼 해남파에서 완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 저 여자의 환심을 얻어야 해.’


4

남해의 물길을 따라 거선 한 척이 범주 중이었다.
선체의 중앙 부위에는 삼층 높이의 누각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 위치한 선루의 돛대에는 정방형의 횡범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하단으로는 조범(操帆)을 담당하는 선원들과 잘 무장된 무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앙 전각의 지붕 선교에는 중후한 필체로 ‘해남파’라고 적혀진 휘장이 하단으로 길게 드리워져서 바람에 펄럭였다. 선박은 수면을 미끄러지듯 운행하는 중이었다.
갑판 위에서는 무기를 든 무사들이 배치되어 삼엄하게 보초를 섰다. 쫙 펼쳐진 돛의 펄럭이는 소리와 물결을 지치는 많은 노의 찰싹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 무렵, 뇌진천은 선교의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아예 난간을 등지고 앉아서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바람을 품 안에 안고서 수태한 여인처럼 불룩해진 돛이 시야에 들어왔다.
“뱃멀미를 하는 것이냐?”
붉은 장삼을 걸친 구미령의 풍만한 가슴이나 둔부, 그리고 허리 옆쪽에 이를 정도로 뜯어진 치마 사이로 보이는 늘씬한 허벅지는 성숙한 여인으로서의 농염한 매력을 잘 보여 주었다.
특히 그녀의 만면에 떠오른, 그 누구라도 매혹시켜 버릴 것 같은 교태 어린 표정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뇌진천은 구미령이 다가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허둥지둥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다.
“소인 백구가 당주님을 뵈옵니다.”
“무리할 것 없다. 그냥 앉거라.”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래, 몸은 좀 좋아졌느냐?”
“이제 다 나았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 말에 구미령은 뇌진천의 옆구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뇌진천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신음했다.
“어억!”
구미령은 피식 웃었다.
“낫긴 뭐가 다 나아?”
뇌진천은 귓불까지 붉게 물들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황송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감히 당주님께 거짓을 고한 소인을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깔깔깔! 귀여운 녀석!”
잠시 뇌진천의 뺨을 쓰다듬던 구미령은 말을 이었다.
“안색이 창백하구나. 아직 거센 바닷바람을 쐴 때가 아닌 것 같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
“생면부지인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시고 돌봐 주신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갈 곳 없는 소인을 거두어서 이렇게 아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게 감사하는 마음은 나중에 몸이 다 회복되고 나면 그때 갚도록 하고 어서 가서 쉬어라.”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옵니다.”
누각 안으로 들어가는 뇌진천의 뒷모습을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구미령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곁으로 다가오는 장청영을 향해 말했다.
“어디서 조런 게 굴러 왔을꼬. 볼수록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앞으로 곁에 두고서 많이 예뻐해 주어야겠어.”
“혹시라도 다른 속셈을 가진 세작이면 어찌합니까?”
그 말에 구미령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본 당주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하는 건가?”
“당치도 않습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백구는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귀티가 자르르 흐르는 게 필시 귀한 집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워진 귀공자일 테지. 그러다가 원한을 사서 멸문지화라도 당했겠지. 강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 않는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백구가 세작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네. 무엇보다 하단전을 파괴당하여 앞으로는 상승무예는 전혀 펼칠 수가 없게 되었지. 설령 다른 마음을 품더라도 본 당주가 저런 애송이 하나 통제하지 못하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았습니다. 속하가 괜히 주제넘게 나섰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한동안 백구를 곁에 두고 키워 볼 생각이네. 내가무공은 불가능하지만, 자질은 좋으니 외가무공을 꾸준히 연마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무인이 될 것일세. 게다가, 머리는 영특한 듯하니 충분히 나를 보좌할 수 있을 테지. 그래서 말인데, 장 총관이 하나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네.”
“속하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명만 하십시오.”
“지금 당장은 내가 상관이라고 하나 총단으로 돌아가면 총관부는 인성당의 예하에 있지 않은데 내 어찌 명령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부탁을 하려는 것이다.”
“허면, 총단에 돌아가서 할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들어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앞으로 나의 총애를 받는 백구를 시기하는 녀석들이 은밀하게 괴롭히려고 들지도 모르네. 내가 함께 있을 때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장문인의 명으로 머지않아 또다시 출타하게 될 때가 문제지. 다음번에는 외총관과 동행할 테니 내가 없더라도 장 총관이 백구를 잘 보호해 주었으면 하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5

깎아지른 듯한 수십 장 높이의 절벽 위로는 드높은 성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성곽의 내부에는 수많은 가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해안과 연한 해남파의 총단 북문은 그 자체가 군항(軍港)이었다. 총단 경내의 석호(潟湖)는 사주(沙洲)의 좁은 협곡을 통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처럼 자궁을 연상시키는 형세의 군항에는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질서 정연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군항을 갖춘 해남파의 총단 내부는 가히 별천지라고 할 만했다. 실록의 정원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야자수의 수림 속에는 각양각색의 새들이 깃들어 지저귀었다.
망중한의 평화를 즐기며 뛰노는 원숭이나 다람쥐 따위의 짐승들도 곳곳에서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의 여러 전각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후원의 별궁, 곧 어린궁(魚麟宮)이었다.
전각 전체가 하얗게 도색된 어린궁은 삼층 높이의 전각으로 연못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궁과 외곽 지대 사이에는 황금빛으로 도금된 난간을 지닌 석교가 가로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품격 높은 어린궁의 자태와는 어울리지 않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뭐가 어쩌고 어째∼애? 감히 내 뜻을 거역하다니, 당장 가서 그놈의 목을 취해 오도록 해.”
이렇게 호통하는 여인은 해남파의 장문인이자 태상가의 가주인 옥류혁성의 외동딸 옥류비연(鈺流斐燕)이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꽃봉오리처럼 주름을 잡은 다음, 감아 올린 것 같은 파란 천이 감겨 있었다. 두건 사이로는 아름다운 흑단의 머리칼이 그녀의 양 어깨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물결처럼 일렁였다.
몸에는 새하얀 천을 그냥 휘감고 있는 듯, 우아하고 세련된 주름이 잡힌 느슨한 포피형식(包被形式)의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특이한 복장만큼이나 옥류비연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두 눈은 흡사 매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실로 빼어난 미녀였다.
바닷물에 표백된 빙산과도 같은 화사한 살결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단의 머리칼, 살짝 드리워진 양 뺨 위에 살포시 새겨진 보조개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깃털 같은 속눈썹으로 장식된 설야(雪野) 위에 놓인 두 개의 구슬은 마치 월광(月光)을 머금은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듯 아름다운 용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얼음장 그 자체였다.
“하오나, 그는 천성당주(天星黨主)가 총애하는 무사입니다. 함부로 죽였다가는…….”
찰싹!
옥류비연의 앞에 선 장한의 뺨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생겨났다. 그녀는 그렇게 몇 차례나 더 손찌검을 했다.
“감히 내게 말대꾸를 하다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좋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네놈이 대신 죽기 싫다면, 그놈이 누구든 상관없다. 가서 무조건 죽여라.”
“존명!”
장한이 물러나자 시녀 하나가 다가왔다.
“아가씨! 인성당주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옥류비연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빨리도 복귀하는군. 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다더냐?”
“숭의맹에서의 일은 잘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디서 낯선 남자 하나를 데려온 모양입니다.”
시녀의 말에 옥류비연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또 시작이로구나. 정말 같은 여자로서 창피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어째서 아버님께서는 그런 창녀 같은 계집을 그렇게 높은 자리에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래도 무공이 출중하고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당주들 가운데서는 가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평입니다.”
“젠장! 그딴 건 몰라. 난 다만 그 계집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야. 언젠가는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뜨려 주겠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옥류비연의 안광이 번뜩였다.


6

“이제는 몸이 많이 회복된 모양이구나.”
“모두 다 당주님께서 돌봐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헌데, 어인 일로 소인을 부르신 것이옵니까?”
“때마침 내가 이끄는 인성당(人星黨)에 조장 자리가 하나 비어 있다. 그 자리를 너한테 주마.”
구미령의 말에 뇌진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같은 게 감히 어떻게…….”
“긴말 필요 없다. 이것은 명령이니라.”
뇌진천은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속하가 당주님을 뵈옵니다.”
구미령은 까르르 웃었다.
“이해가 빠르군. 그런 영민함이 아주 맘에 든다.”
“황공하옵니다.”
“일개 회도라면 모르지만, 조장 급 인물을 세우려면 총관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두 식경만 있으면 해룡전(海龍殿)에서 수뇌 회의가 있다. 그때 보고하여 내일까지는 정식으로 인성당의 제십이 조장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하겠다. 그전까지는 일단 인성전(人星殿)의 객실에서 머물도록 해.”
“당주님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구미령이 눈짓을 하자, 무인 하나가 뇌진천을 인도하여 당주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