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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23화)
제10장 동상이몽(同牀異夢)(1)
1
강호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림 조직들은 응집력의 성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사제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문파요, 둘째는 이해관계에 따라 뭉쳐진 방회요, 셋째는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세가다.
해남파의 경우, 비록 그 명칭은 문파이지만 내부의 구조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해남파란 특정한 하나의 무림 조직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해남도에 기반을 둔 백여 개의 무림 조직을 통칭한다.
그 가운데는 문파, 세가, 그리고 방회의 성격을 지닌 집단들이 다양하게 혼재한다.
따라서 해남파는 그 자체가 단일한 무림 조직이 아니라 해남도를 기반으로 하는 강호 집단들의 연맹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다만, 그 응집력이나 구속력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 단순한 연맹체와는 다른 점이었다.
그래도 종족 본위의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는 해남도의 특성에 의해 해남파의 수뇌부는 여덟 개의 세가가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해남팔웅(海南八雄)이라 한다.
해남팔웅은 여덟 개로 구분된 해남강호의 영역을 하나씩 관할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옥류가(鈺流家), 비류가(琵流家), 황류가(煌流家), 뇌류가(雷流家), 청류가(淸流家), 사류가(師流家), 세류가(勢流家), 그리고 태류가(泰流家)이다.
해남팔웅은 저마다 십여 개의 귀속 집단들을 거느리고 각자의 영지에서 패자로 군림했다.
이들의 영지는 가문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서 각각 옥류림, 비류림, 황류림, 뇌류림, 청류림, 사류림, 세류림, 그리고 태류림으로 불린다.
지금까지는 각 영지의 패주인 해남팔웅이 삼 년씩 돌아가면서 해남파의 장문인 직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서는 옥류림의 패주인 옥류가에서 장문인을 독점하여 벌써 이십칠 년째 장기 집권을 하고 있었다.
이제 옥류가는 해남팔웅의 지위에서 벗어나 태상가(太上家)로 자리 매김 했고, 나머지는 귀속칠가(歸屬七家)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비록 독재의 폐해가 있기는 했으나,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옥류가를 중심으로 해남파의 힘 역시 더욱 막강해졌다.
해남파가 곤륜파를 대신하여 구대문파 가운데 하나로 복귀한 사실이 이를 반증했다.
이처럼 이제 숭의맹의 수뇌부로 편입됨에 따라 해남파는 대륙으로의 출입이 잦아졌다.
얼마 전에도 해남파의 장문인인 벽력호(霹靂虎) 옥류혁성(鈺流奕成)의 분부로 인성당주(人星黨主) 구미령(玖美鈴)은 숭의맹 예하 숭의삼원(崇義三院) 가운데 하나인 태미원(太微院)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구미령은 이제 일을 다 마친 다음, 휘하의 수행원들과 더불어 해남파로 복귀하는 중이다.
***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맑고 투명한 개천 하나가 수백 호의 가옥들이 옹기종기 자리한 촌락의 중앙을 가로질러 연녹색의 과실주처럼 아름다운 바다로 흘러든다.
수평선 부근으로는 중천으로부터 쏟아진 햇살을 머금은 물결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갈매기들이 그 위를 날아다닌다.
어촌 마을과 연하여 있는 해안의 서쪽 끄트머리에는 새하얀 백사장이 있고, 동쪽 끄트머리에는 굵직굵직한 고목으로 이루어진 푸르디푸른 숲이 위치하고 있다.
“여기가 어딘가?”
구미령은 옆에 있던 장청영(張淸營)에게 물었다.
그녀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 요염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다.
“이곳은 옥계촌(玉溪村)입니다. 이미 연통을 취해 두었으니, 머지않아 옥항(玉港)으로 배가 당도할 겁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아마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미 마을에 숙소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옥계촌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옥항 주변의 청청림(靑淸林)은 명물이지요. 그곳에서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시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시면 그리 지루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구미령은 해안의 동쪽으로 보이는 숲을 가리켰다.
“저게 바로 청청림인가?”
“그렇습니다.”
“허면 나는 저곳에 가서 잠시 쉬고 있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즉시 알려 주게.”
“존명!”
일행과 헤어진 구미령은 홀로 청청림으로 갔다.
‘과연 경치가 나쁘지는 않군.’
바위 위에 걸터앉은 구미령은 눈앞에 펼쳐진 남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산마루에 해가 걸린 가운데 온 세상은 서서히 어두움에 잠겨 들었다. 아울러, 중천에 매복 중이던 희미한 달의 자태 또한 점점 선명해지는 중이었다.
휘이이∼이!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서 구미령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콧속을 통해 그녀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구미령의 눈길이 해변으로 고정되었다.
그녀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그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누가 쓰러져 있는 것 같은데…….”
호기심에 사로잡힌 구미령의 발걸음은 이미 그쪽으로 향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해변에 쓰러져 있는 신형이 더욱 선명해졌다.
구미령은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대체 누구지?’
지척까지 이른 구미령은 발을 쭉 뻗어 엎어진 사람의 몸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죽은 건가?’
구미령은 발에 좀 더 힘을 주어 쓰러진 사람의 몸을 반대편으로 뒤집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뽀얀 피부를 지닌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몸은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가슴이나 팔다리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심하게도 당했군.’
구미령은 손을 내밀어 청년의 콧구멍 아래에다 손을 대어 보았다.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느껴지기는 했다.
‘용케도 목숨은 붙어 있었군.’
구미령은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강인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무척이나 고와 보였다.
청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구미령의 얼굴에는 금세 음험한 미소가 깃들었다.
‘장 총관이라면 필시 살릴 수 있을 터!’
2
청해 분타에서 일어난 참상을 알게 된 수라혈교는 발칵 뒤집혔다.
비록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혈해존자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섭동천을 위시하여 집단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 들었던 청해 분타 무인들의 왜곡된 보고만이 상부에 전달되었다. 이에 수라혈교의 내부에서는 한수겸에 대한 정확한 진면목은 모른 채 억측만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괴소문들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재생산되어 수라혈교의 내부에서 이제 한수겸이라는 존재는 과거 혈해존자에 버금가는 공포의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 무렵, 뇌진천은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청해 분타를 공략하는 과정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 바이지만, 뇌진천이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은 독보적이다.
그러나 역시 내공이 일천하다 보니 금세 한계에 부딪힌 것도 사실이었다. 아울러, 새로운 육체는 여전히 본격적으로 폭주하는 혈룡진기를 감당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몸소 체험한 뇌진천은 당분간은 내공을 키우고 신체적인 취약함을 보완하는 데 매진하기로 작정했다.
또한, 그가 이번에 절실하게 느낀 점은 정보의 중요성이었다. 낙양에 있을 때 그가 수라혈교의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면 이런 위험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정보력은 제대로 구축된 조직을 통해서 확보된다.
굳이 정보력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뇌진천이 천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면 반드시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그는 단순히 독보강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군림천하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뇌진천의 얼굴은 많이 노출되었다.
물론 이제는 그 어떤 고수의 추격도 따돌리고 충분히 달아날 수 있는 능력은 된다.
그러나 도망자로서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안정적으로 힘을 배양할 수가 없다.
이에 뇌진천은 방도를 궁리했다.
한참을 고민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던 뇌진천의 흥미를 끈 것은 바로 해남파였다.
중원대륙과는 외딴 해남도에 근거지를 둔 해남파는 신강에 근거지를 둔 수라혈교와는 거리상으로 극단이다.
게다가, 같은 편인 숭의맹조차 제대로 그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할 정도로 폐쇄적인 곳이다.
따라서 해남파라는 울타리 안에만 들어간다면 수라혈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뇌진천이 교묘한 심리전을 걸어 두었기 때문에 수라혈교에서는 그가 가까운 어딘가에 매복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한수겸의 행방을 알아내고자 굳이 해남도까지 추적자를 보낼 리가 만무한 것이다.
해남도는 무극신공을 완성하고 개인적인 역량을 키우면서도 강호무림에서의 군림천하에 필수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좋아! 결정했다. 해남파를 접수한 다음, 해남도를 기반으로 하여 혈곤륜을 재건할 것이다.’
***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뇌진천은 한동안 은밀하게 수소문하며 해남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그는 외지인으로서 해남파의 내부에 들어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양한 각도로 해남파에 침투할 좋은 방도를 궁리하던 그는 좋은 정보 하나를 입수했다.
해남파에서 숭의맹으로 사자로 파견된 무리가 용무를 마친 다음, 해남도로 귀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뇌진천은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고, 그 길목에서 수를 썼다.
뇌진천은 자신이 청해 분타에서의 혈전에서 입은 상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때 그는 하단전을 파괴당했다. 이것은 무인으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서였다.
무극신공을 사용하는 뇌진천으로서는 사실 하단전 같은 건 파괴되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도리어 이것은 타인의 눈을 속일 때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대체로 강호의 무인들은 상대가 하단전이 파괴당한 것을 보면 그다지 긴장하지 않게 된다.
이는 특히 내가고수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특히, 뇌진천은 청해 분타에서 얼굴을 제외하고서 거의 온몸에 빙살도와 환종침에 의해 심각한 외상을 입었다.
비록 상처는 가라앉았을지라도 그 자국과 흉터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실 뇌진천은 혈룡진기에 의해 기혈과 내장까지 보호를 받아서 보기만큼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처들 역시 남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는 그만이었다.
외견상으로는 누가 보든지 그가 이 정도의 상처를 입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를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심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것에 더하여 뇌진천은 충분히 자해를 하여 겨우 아물었던 모든 상처를 죄다 터뜨렸다.
그런 다음, 해남파의 사자 일행이 해남도로 복귀하고자 배를 기다리는 해변에서 시기 적절하게 엎드려 있었다.
뇌진천은 고도의 점혈술을 통해 의식은 또렷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척했다.
아울러, 뇌진천은 자신의 내공을 완벽히 갈무리했다. 사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하단전에 공력이 운집해 있다면 높은 경지에 도달한 고수의 촉수에 감지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나 뇌진천의 내공은 넓고 깊은 골수 속에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기에 누구도 그의 내력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처럼 뇌진천은 자신의 하단전을 완전히 파괴당하여 모든 내공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의 외상을 입은 것처럼 위장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과연 뇌진천의 예상대로 해남파의 사자 일행 가운데 여자 하나가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해 왔다.
‘나를 거두어서 해남파로 데려가 준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해코지하려 든다면 즉시 일어나서 내 얼굴을 본 자들을 몰살시키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다.’
3
환자를 뒤로한 채 문밖으로 나오던 장청영을 복도에서 기다리던 홍의여인이 있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중상을 입었고 출혈 또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호전되고 있습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장청영의 대답에 구미령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장 총관의 의술은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 냈으니, 과찬이 아니네.”
“하지만 소인이 한 건 별로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소인은 그저 상처를 소독하고 금창약을 바른 다음, 천으로 묶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 이후, 고작 하루가 지나갔을 뿐인데 벌써 상처 부위가 급속하게 아물고 있었습니다.”
“거참, 희한한 놈이로군. 가냘프게 보이던데, 의의로 강골인가 보지?”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지만, 몸을 보면 제대로 무공을 단련한 무인인 듯싶습니다. 비록 하단전을 파괴당하여 내공을 모두 잃어버리고 다시는 상승무예를 펼칠 수 없게 되었지만, 원래는 상당한 고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내가 어지간히도 재미있는 물건을 주웠구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정신은 차렸으나, 예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조차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구미령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표정이나 말투, 행동 등 모든 것을 세밀하게 살펴보아도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뤄 봐서 충분히 그럴 만하기도 하지요.”
“그럴 만하다니?”
“머리에 충격을 받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잃을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게 원인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면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자는 필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가족들의 죽음을 직접 목도했거나, 뭐, 그런 비참한 일을 겪었을 테지요.”
“일리 있는 말이군. 뭐, 그편이 더 잘된 일이네.”
“잘된 일이라니요?”
“어차피 나의 노리개로 삼을 작정이었네. 옛일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내 말을 더 고분고분하게 따를 테지.”
“설마 저자를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수상한 인물을 절대로 총단에 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작일 수도 있으니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더니……. 자네가 지금 감히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구미령의 서슬이 시퍼런 호통에 장청영은 당황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은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