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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22화)
제9장 영웅본색(英雄本色)(2)


그 무렵, 뇌진천은 바닥에 떨어진 폭마혈검을 다시 거머쥐고서 눈앞에 보이는 무인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가기 시작했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무섭게 폭주하는 뇌진천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성을 상실한 한 마리의 짐승이요, 피에 굶주린 야수요, 오직 싸움을 위해 태어난 광마였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악귀도 이보다 더 무시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사, 살려 줘!”
“으아아악!”
섭동천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전장에서 통솔하던 수뇌 급 인물들은 몰살을 당했다.
안 그래도 벌써부터 전의를 상실한 청해 분타의 무사들로서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에 저마다 기겁을 하며 그저 산채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했다.
한동안 피의 향연을 벌이던 뇌진천은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싸움에 심취해 있던 그는 그때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기억해 냈다.
그것은 바로 섭동천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뇌진천은 산채 뒤쪽의 비밀 통로를 향해 줄행랑을 치던 섭동천을 발견했다.
“저런 한심한 놈 때문에 나의 사문과 한씨 일가가 몰살을 당하다니…….”
다시금 극한 노기가 치밀어 오른 뇌진천은 섭동천에 대한 추격을 개시했다. 여태껏 그가 만들어 낸 살풍경을 목도한 무사들로서는 감히 앞을 막아설 생각조차 못했다.
오히려 뇌진천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라치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극한 공포심에 휩싸인 무사들은 심지어 오줌까지 지리면서 허둥대기도 했다.
그야말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무작정 도망가다가 서로 밟고 밟히는 사태도 속출했다. 사실 그 무렵, 뇌진천의 표적이 완전히 바뀐 터라 그의 손에 직접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사라졌다.
그러나 다들 여전히 뇌진천이 쫓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듯했다.
숫자가 많았던 탓에 좁은 입구를 통해 산채를 빠져나간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고로 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후위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은 뇌진천의 무위를 직접 목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열의 사람들보다 더욱 당황하며 허둥댔다.
본래 군중 심리라는 건 전염병과도 같아서 쉽게 퍼진다. 두려움의 기류가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가운데, 산채의 내부는 실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산채의 부근으로는 뇌진천을 놓친 외당의 주먹패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뇌진천이 처음 침투를 시작할 때부터 뒤를 쫓아서 이제야 본채로 당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히려 본채에서는 완전히 사색이 된 내당의 무인들이 치를 떨면서 산 아래로 허겁지겁 달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산채에서 빠져나온 내당 무리가 어찌나 공포에 절어 있던지 그것은 이내 산채로 올라오던 외당의 주먹패들에게도 급속하게 전염되어 갔다.
평소 외당의 주먹패들은 내당의 무사들을 질시하는 한편, 두려워하기도 했다.
내당의 무인들은 다들 전투 실력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먹패들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머지않아 외당의 주먹패들도 덩달아 심리적 공황에 빠져 들어 다시금 산 아래로 허겁지겁 내뺐다.
그러자 산채에서보다 더욱 큰 혼란이 일어났다.
서로 휩쓸리고 나뒹구는 가운데 밟혀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다. 산채 내부가 생지옥이었다면 이곳은 아수라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수라혈교 청해 분타의 무인들 전체에 해일처럼 덮쳐 가는 형국이 이어졌다.


5

무릇 태풍의 핵은 고요한 법이다.
섭동천의 뒤를 쫓는 뇌진천의 주위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감히 그의 앞을 가로막는 무사들이 또다시 등장했다. 다름이 아니라, 섭동천의 친위대 격인 북두일살의 무사들이었다.
뜻하지 않은 훼방꾼이 나타나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뇌진천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싼 무사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지?’
뇌진천이 이런 의구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이 정도의 무사들이 처음부터 뇌진천을 상대했다면 청해 분타의 피해가 그토록 크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실 북두일살은 혈교의 소속이 아니었다.
이들은 원래 복익혈대(伏翼血隊)라고 불리던 자객 집단이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용병들이었던 것이다.
예순네 명으로 구성된 복익혈대는 소규모의 합격술(合擊術)에 관한 한 강호 최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섭동천은 매월 거액을 주고서 사파무림의 재야에서 활동하는 복익혈대를 자신의 친위대로 부려 왔다.
다만 조건이 있었으니, 다른 임무는 일체 수행하지 않고 오로지 섭동천의 안위만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뇌진천이 청해 분타의 안방을 마구 휘젓고 있는데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뇌진천이 의뢰인인 섭동천을 직접 노리자,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복익혈대의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흑색 무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등 뒤로는 박쥐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피풍의를 하나씩 두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마치 투구처럼 생긴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박쥐의 면상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옷이나 신발, 피풍의, 요대, 가면까지 그들은 완전히 검은색 일색의 차림새였다.
저마다 손에는 자루뿐만 아니라, 찌르는 촉까지도 검게 칠해진 협인장창을 하나씩 비껴 쥐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까지 위력 시위를 했는데도 여전히 앞을 가로막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사실 뇌진천도 이제는 슬슬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섭동천을 제거하고 이곳을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다. 먼저 움직이기보다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살수 집단답게 복익혈대의 대장은 구차스러운 말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예순네 명의 무사는 각각 서른여섯 명, 열여덟 명, 아홉 명, 그리고 대장인 한 명까지 순식간에 네 방향으로 산개하면서 복익혈진(伏翼血陣)을 전개했다.
그들의 행동에는 군더더기라고는 없었다.
저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복익혈진은 사중의 포위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른여섯 명이 각각 여섯 명씩 여섯 방향으로 포위하면서 뇌진천에게로 쇄도해 간다. 그와 동시에 제이선의 열여덟 명은 제일선에 있는 동료들의 어깨를 밟고 도약한다. 같은 방식으로 제삼선의 아홉 명은 제이선의 동료들의 어깨를 밟고 도약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 예순세 명은 뇌진천의 주변을 완전히 반구(半球)의 형태로 감싸며 각자의 협인장창을 곧추세워 동시에 찔러 가게 된다.
복익혈대의 대장은 수하들이 이 진형을 갖추는 동안, 어기충소를 통해 높이 도약한다. 몸을 역전시킨 그는 반구의 형태가 되어 있는 진형의 중앙으로 수직 하강해 온다. 즉, 그의 협인장창은 뇌진천의 정수리를 노리게 되는 것이다.
복익혈진은 이처럼 물샐틈없이 상대방을 포위하며 동시에 예순네 개의 협인장창으로 예순네 개의 방향에서 시간차 없는 협공을 감행하는 공격진이다.
특히, 복익혈진이 펼쳐지는 순간에는 천잠사로 된 두터운 망토가 저절로 활짝 펼쳐지기 때문에 그 내부는 일순간에 칠흑처럼 어둡게 변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협인장창은 호신강기조차 뚫어 버린다. 그러니 그 어떤 절정고수라고 해도 복익혈진에 제대로 걸려들면 암흑 속에서 허둥대다가 전 방향에서 전광석화처럼 찔러 오는 협인장창에 찔려서 목숨을 잃게 마련이다.
복익혈대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복익혈진으로 사파무림에서 최강의 살수 집단으로 인정받아 왔다.
지금껏 복익혈대의 살생부에 오르고, 죽지 않은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복익혈진을 파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뇌진천은 이처럼 악명이 높은 복익혈진에 걸려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말이다.
하지만…….


6

촤아∼아악!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붉디붉은 핏빛 안개!
그 틈바구니에서 폭마혈검을 지팡이 삼아 우뚝 서 있는 뇌진천의 신형이 보였다. 그의 주변으로는 거대한 혈룡이 빙글빙글 돌면서 마음껏 활개를 치는 듯했다.
그것은 혈룡무상검의 구극절예인 혈룡분혼섬(血龍粉魂殲)이었다. 이것은 검법의 최고 경지로 손꼽히는 무형검의 반열에 있는 기술로 전설의 귀검(鬼劍)과도 일치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자, 무극신공을 육성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혈룡분혼섬을 펼쳐 내는 데 성공했다.
사실 혈해존자 시절에는 내공이 지나치게 심후하고 신체적인 자질이 워낙 탁월하여 마룡동에 갇히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위기다운 위기를 맞아 보지 못했다.
뇌진천은 무형검의 전 단계인 이기어검(以氣馭劍)을 곤륜파의 륜법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말년에 크게 위세를 떨치는 사행혈륜(四行血輪)을 창안했다.
이기어검을 포함한 이기어병(以氣馭兵)은 강력한 만큼 실로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는 극상승의 무공이었다.
따라서 설사 이기어병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내공이 딸리어 결코 긴 시간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뇌진천은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막대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뇌진천은 이기어병의 한 형태인 사행혈륜만으로도 천하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기에 무형검의 경지에 도달한 다음에도 그것을 실전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검으로는 살이 찢기고 선혈이 낭자하는 살육의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참한 살풍경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이기어병의 륜법이 훨씬 취미에 맞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은밀하게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혈해존자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허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뇌진천은 일부러 무형검을 성취하지 않았다.
아예 그 단계를 배제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공도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일천하여 막대한 내력이 소모되는 이기어병은 아직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무공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육체 또한 강환지체에 비해 많이 취약했다. 이런 가운데 맞이한 위기는 뇌진천이 새로운 경지로 올라설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렇듯, 한계를 넘어선 뇌진천이 전개한 혈룡분혼섬 앞에서는 복익혈진조차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바람의 칼날 앞에 뇌진천의 주변을 둘러섰던 복익혈대의 무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예 공중에서 분해되고 만 것이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어찌 보면 아름답기까지 한 혈무(血霧)와 취해 버릴 것 같은 혈향(血香)만이 남았다.

***

울컥!
뇌진천은 상당한 양의 객혈을 토해 냈다.
그와 동시에 다리의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는 자신이 토해 낸 객혈 위로 엎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뇌진천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무렵, 날은 슬슬 저물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 모금의 진기도 남지 않았군.’
다행히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뇌진천의 주변에 살아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곳은 피바다였다.
‘비록 섭동천은 놓쳤지만, 이쯤 했으면 확실한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사실 혈교에 이런 사실을 직접 목도하고 알려 줄 인물로는 섭동천이 제격이지. 그래. 네 목숨을 조금만 연장시켜 주마. 그래야 죽이는 맛도 더 커질 테니까.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너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이고.’
뇌진천의 얼굴에는 사이한 미소가 깃들었다.
‘목형준과 맹소홍, 그리고 노도경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목숨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매일 밤마다 두려움에 잠을 설치겠지. 좋다.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우선은 생지옥부터 맛보게 해 주겠다. 그리고 너희가 이제는 평안하다, 이제는 안전하다고 느낄 바로 그 순간에 목숨을 취해 주마.’
뇌진천은 청해 분타 북두전의 벽면에다가 자신이 쏟은 피로써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긴 채 사라졌다.

혈곤륜 개파조사의 유일한 전인인 나 재래혈존(再來血尊)이 이르노라! 앞으로 일 년의 기한을 주노니, 그 안에 수라혈교를 완전히 해체하라. 그렇지 않으면 혈교도는 단 한 놈도 남김없이 나 재래혈존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내 말에 대한 증거로서 일 년 안에 혈교의 간부 열두 명의 목숨을 취하겠다.
사부이신 혈해존자의 존성대명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내가 죽인다고 선언한 이상 이들의 죽음은 절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