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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25화)
10. 왜의 사신들을 불러들이다(3)
인종이 말을 끝내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듯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주 잠시간이지만 충격에 사고가 멈춰 버린 것이다. 그만큼 이것은 문제가 되는 발언이었다.
만약 이를 허락한다면 대마도와 오오우치 가문이 다스리는 지역은 조선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한동안 말없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인종이 쓴웃음을 짓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왜의 사신은 놀랄 것 없다. 과인이 영토 욕심에 하는 말이 아니다. 너희들 또한 동래에 공관을 설치하면 된다. 하여 산구나 대마도에 있는 공관에서 아국 조선으로 오는 선박에 출입증을 발급해 받아서 조선으로 오는 것이고 아국에 있는 공관에서는 너희 대마도나 산구로 들어가는 배에 출입증을 발급받아 들어가는 것이다. 어떠냐? 이리하면 출입증 없는 배는 모두 조정의 허가를 득하지 않은 것이니 어떠한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고 아국 조선 또한 출입증 없는 왜의 배는 엄히 다스려도 너희들이 뭐라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인종은 왜관과는 전혀 다른 공관을 설치하라 했다. 왜관은 조선에서 만들어 왜인들이 드나들 때 무역이나 사신의 숙소로 활용한 것이라 조선조정의 통제를 받는 곳이지만 공관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인종의 말대로 자신들의 관원을 파견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이것을 오오우치 가문에 하라 한 것은 오오우치 가문을 왜의 대표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조윤방과 종웅만은 다시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왜 내부에 극심한 분란을 야기 시킬 수도 있었다.
아무리 조선과 명의 무역을 오오우치 가문이 독점한다 해도 오오우치 가문이 왜의 왕은 아닌 것이다.
하나 이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오오우치 가문은 왜를 대표하는 조정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조선의 국왕으로부터 말이다. 매우 큰 거래였다. 손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엄청난 거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잘못하면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을 명분으로 다른 각지의 영주들이 손을 잡고 오오우치 가문을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신관으로 돌아온 이조윤방과 종웅만는 잠자리에 들 시간임에도 따라온 일행들 6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방안은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아까 연회장에서 나온 술잔이 분명 유리잔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리잔이었습니다.”
“어제 한양에 도착해서 타 본 그 자전차 말입니다. 참으로 편리해 보이던데, 우리의 장인들이 만들 수 있을까요?”
“못 만듭니다.”
힘들다는 것도 아니고 못 만든다고 딱 잘라 말하는 일행이었다. 그러나 질문한 일행 또한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도 귀한데… 유리잔이라니, 아마 유리로 다른 것도 만들겠지요?”
“그럴 겁니다. 일부러 유리잔만 보여 준 것 같습니다.”
“오늘 밖에 나가서 본 것 더 없습니까?”
“소금 한 섬에 쌀 8되더군요.”
“소금 값이 많이 내렸군요?”
이조윤방을 따라온 이들은 구주와 대내 가문 지근거리에 있는 지역의 토호 가문에서 따라온 이들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듣고만 있던 종웅만은 이조윤방을 바라보았다. 궐을 나오면서 결정을 하기 전에는 다른 일행들에게는 말하지 말자고 했던 공관 설치 문제를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
대마도 입장에서만 보면 공관 설치는 매우 환영할 일이었다.
가장 큰 이유가 왜구 때문이었다. 왜구는 대마도 입장에서 매우 근심거리였다. 일 년에 두 번 세견선 60척을 조선에 보내면 쌀을 보내 준다. 그리고 종씨 가문은 조선에 관직을 받고 왜구를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한다.
물론 대마도에서 자체적으로 노략질을 나가는 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본토나 주변 섬에서 대마도를 거쳐 노략질을 나가는 이들도 있다.
힘이 있다면 전부 막겠지만 힘이 없으니 전부 막지도 못하고, 식량 사정이 급하면 살기 위해 은밀히 노략질도 한다.
그런데 공관이 설치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역량이 늘어날 것이다. 공관설치는 무역량의 증가를 조건으로 설치되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본토나 타 지역의 왜구들에 대한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대마 도주 종웅만은 인종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오오우치 가문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오오우치 가문이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좋겠으나 어찌 결정할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만약 유리로 만든 그릇들과 장신구를 남방의 여러 나라에 가져다 팔 수 있다면 엄청난 이문이 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종웅만이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며 한 말이다.
“그야 당연하지요. 하나 그 귀한 것을 우리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종웅만의 말에 구주에서 온 소이전이 대답한다. 정작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이조윤방은 말이 없다.
지금 이조윤방은 그보다 더 큰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바로 대내(오오우치) 씨족의 일이었다. 오오우치 가문은 백제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오오우치 가문은 성종 16년(1485년) 승려 원숙을 보내 성종 임금에게 자신이 백제왕의 후손이니 백제 왕족의 족보와 역사 기록물을 달라고 했다.
그때 성종은 백제의 온조 뒤의 세계(世系)는 홍문관으로 하여 간략하게 써서 주라고 했다. 한데 정말 간략하게 써서 준 것이다.
조선은 단군에게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조선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땅을 내려 그 땅에서 나는 곡물로 매년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 말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역사를 매우 잘 간직하고 있으며 보관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다르게 생각해 보면 조선이 국명을 조선이라 정한 것부터 역사기록을 얼마나 소중히 했으면 잘 관리했는지 나타내 주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모르는데 어찌 조선이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아니까 쓴 것이다. 당시 조선이라는 이름을 명나라 서고에서 보고 만들었겠는가? 아니다. 조선이 건국할 때 까지만 해도 너무도 당연하게 고조선의 역사와 그 후대의 역사가 책으로 존재했고 많은 선비들이 탐독했다.
한데 문제는 그 후다. 태종, 세종, 세조, 예종을 거치면서 회유와 협박을 해서 수없이 많은 책들을 거둬들이게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명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시기 조선의 건국과 그 후 100년 동안 벌어진 일 때문에 수없이 귀중한 역사서들이 불에 타서 사라진 것이다. 통탄스러운 일이다.
각설하고 그리하여 제대로 된 백제의 국사를 전해 받지 못한 오오우치 가문은 조금이라도 백제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사서가 있다면 소중히 받아갈 준비가 언제라도 되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기에 있다고 해도 쉽게 내주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궐을 나올 때 이조윤방은 인종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너희 가문의 가주가 그토록 원하는 백제사는 지금 땅에 묻어 두었다. 만약 대내의융(오오우치 요시타카)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한 인물이라면 과인이 땅을 파서 조상의 기록을 넘겨줄 것이다. 하나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넘겨줄 수 없다. 보관할 능력이 안 된다면 그냥 땅에 묻어 두는 것이 후손들을 위해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이조윤방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관할 능력이란 무엇인가? 업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대내 가문에서 조선에 보낸 사신만 수십이며 진상한 물품이 얼마던가. 조선 임금 또한 왜 대내 가문에서 그리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역과 외교를 독점하면서 클 수 있었던 가문이다. 더불어 조상의 인연까지 가지고 있는 대내 가문이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탈피하여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인종 1년 12월 10일 5번째 기사.
형옥을 허술히 하지 말 것에 대해서 아뢰다.
형옥(刑獄)을 적간(摘奸)한 단자를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옥해가 퇴락하여 허술한 곳이 있고, 이런 추운 겨울철에 바닥에 짚을 깔지 않아 죄수들이 거의 동사(凍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관원을 추고하고 차지(次知) 등 관계 없는 자들은 모두 즉시 방송하라.”
인종 1년 12월 15일 첫 번째 기사.
경사전과 영모전에서 망제를 지내다.
경사전과 영모전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는데, 백관들이 배제(陪祭)하고 상은 친행하지 않았다.
12월 들어서면서 눈이 많이 내렸다. 폭설이라고 불릴 만큼 눈이 내렸는데 이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가축이 얼어 죽거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따로 명령을 내려 죄가 가벼우면 방면하고 동사한 죄인들의 장례를 조정에서 치러주며 형판에게 명령해 각별히 신경 쓰라고 일렀다.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면 다음해 농사가 잘된다는 말이 있지만 인종의 마음은 썩 좋지가않았다.
인종 1년 12월 18일 첫 번째 기사.
양사가 윤원형의 조카인 후궁(後宮) 윤씨(尹氏)를 궁에서 나가게 할 것을 청하나 불윤하다.
양사가 아뢰기를,
“후궁(後宮) 숙빈 윤씨(淑嬪 尹氏)는 역적 윤원형의 조카입니다. 그의 시비(侍婢)에게 흉악한 편지를 주어 왕복시킨 일의 정상이 이미 역적의 공사(供辭)에 드러났으니 궐 내에 머물게 할 수 없습니다. 빨리 궁에서 나가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록 역적의 친척이기는 하지만 예가 같지 않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윤원형 일파가 역적으로 몰려 모두 물러나고 대비 윤씨와 인종의 후궁인 숙빈 윤씨에 대한 압박이 심했다. 왕세제인 경원대군 마저 폐해야 한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하나 인종의 태도는 단호했다.
역모와 관련하여 전혀 연관이 없으며 사사로이 인척이기는 하지만 남과 같이 지냈기에 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인종도 알고 당사자인 숙빈 윤씨나 대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나인들도 거짓임을 알았다.
중종 대왕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수시로 중궁전에 모여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번 거사 때도 뒤에서 대비가 어느 정도 관여를 했을 것이다. 제일 억울한 것이 사실 숙빈 이었다.
양사가 나서서 숙빈 윤씨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대비나 경원대군을 폐하지 않으면 숙빈 이라도 본보기로 쳐내라는 것이지만 인종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 사람 중 하나라도 처내게 되면 그들이 작당한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인지라 결국 세 명 모두를 쳐내야 한다.
인종 입장에서는 동생인 경원대군을 쳐내는 것도 대비 윤씨를 쳐내는 것도 힘든 결정이었다. 어차피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상황이었다.
내버려 둬도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더 이상 다른 일을 꾸미지는 못할 것이라 판단했기에 단호하게 신하들의 주청을 거부했다.
원 역사에서는 이시기 숙빈 윤씨가 아닌 귀인 정씨를 내쫓으라고 간하던 이들이 이제 반대로 숙빈 윤씨를 내쫓으라고 간했다.
인종 입장에서 보면 숙빈 윤씨든 귀인 정씨든 후궁일지라도 모두 부인이었다. 본래 성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지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부인과 인척들을 내칠 수는 없는 인종이었다.
이런 인종의 성정이 후일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이점 때문에 인종을 높이 사기도 한다.
인종 1년 12월 23일.
한겨울이라 움직이기가 매우 싫어졌다. 궐은 일반 사가보다도 더 추웠다. 물론 인종이 거처하는 강녕전이나 교태전 등은 온돌을 깔아 따듯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집무실이 화로 한 두 개로 버텨야 하기에 추위와 싸우며 버텨야 했다.
한나라의 대신들 사정이 이러한데 백성들의 상황은 더욱 안 좋을 것이라 여겼다. 추운데 배고픔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급격하게 아사자나 동사자가 나오기 쉽기 때문에 인종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승지 들라 하라.”
“네,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승지 이명규가 들었다.
“네 듣기로 폭설과 추위로 백성들이 매우 힘들다고 하는데 나무 살 돈이 없는 이들은 추위에 떨며, 곡식이 없는 이들은 허기진 배 때문에 더욱 추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전국 팔도 관아에 명하여 땔감이 없는 집 곡식이 없는 집을 파악하여 조치를 취해 주라 명하라 만약 아사자나 동사자가 나오면 그 지역을 관할하는 수장은 그 죄를 엄히 다스릴 것이라 명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추위가 혹독할 때에는 몸에 기름이 축적되어야 버틸 수 있다. 하니 내 내탕고에서 은 2천 냥과 쌀 5천 석을 내어 줄 터이니 그것으로 되야지(돼지)와 군마로 쓸 수없는 늙은 말과 식견을 구해서 사대문 밖에 거주하는 천인들과 양인들 중에 생계가 곤궁한 이들과 어린 아이들에게 먹이도록 조처하라.”
“전하의 성은에 만백성이 감읍할 것이옵니다.”
인종의 조치에 도성밖에 거주하는 천인들이 생각지도 못하게 고기를 먹게 되었다. 고기를 받아 들거나 관아에서 직접 끓여서 나눠 주는 고기를 먹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고 주상 전하 천세를 외치는 자들도 있었다.
인종의 이런 조치는 양반들 그중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임금이 자신의 내탕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직접 고기를 먹이고 땔감을 나눠 주는 등의 행동을 취했는데 대지주나 양반들이 그대로 있게 되면 그것 또한 불경죄였다.
왕실이 나서서 백성구제를 실시하는데 동참하지 않는다면 인색하며 선비의 도리를 다하지 못 한다 손가락질 받을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때아니게 전국 팔도에서 솥을 걸고 고기 삶는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덕분에 춥고 배고픈 겨울을 그나마 안전하게 날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대왕인종』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