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대왕 인종 1권(24화)
10. 왜의 사신들을 불러들이다(2)


인종 1년 10월 28일.

군기시정 이진이 초지기가 완성되었음을 알려 왔다. 무려 2달하고 8일 만에 자세하게 그려 주고 설명까지 해준 초지기를 만들어서 시험 운영했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군기시에 공인들이 무려 120여 명이 더 늘어났음에도 사람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그것은 모두 자전차 탓이었다.
처음에 인종이 만들라 한 것은 당연히 인기가 좋아 대신들이나 한양의 돈 좀 있는 양반들은 전부 한두 대씩 구매를 했고 지방의 유지들도 한두 개씩 주문을 한 상태였다.
더불어 귀인 정씨 덕분에 아이들 용 자전차까지 만들게 되면서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매일같이 밤을 새는 군기시였다.
해서 인종은 몇 번에 걸쳐 공인들을 추가로 뽑도록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바빠서 초지기의 완성이 많이 늦어졌다.
“그래, 종이의 질은 어떠한가?”
“손으로 뜨는 것 보다는 못하지만 생산량은 매우 뛰어납니다.”
“그래? 손으로 뜨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르지?”
“그것은 정확히 계산해 보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손으로 뜨는 것을 쉼 없이 연속으로 뜬다고 보시면 되옵니다. 더불어 따로 말리는 시간이 안 들어가니 그 속도는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그럼 공인을 더 구해서라도 초지기를 더 생산하고 초지기가 완성 되는대로 공조의 조지서공인들에게 사용법을 알려 주고 초지기를 이용하여 종이를 생산하도록 하게.”
“알겠나이다.”
인종은 종이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음 단계로 집현전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생각에 빠진다. 이미 집현전에 충분한 인원을 뽑아놨기 때문에 준비는 다된 상황이다.
“이언적을 들라 하라.”
집현전 제조인 영전사 이언적을 불러들였다.
“전하 찾아계시옵니까?”
“그래, 영전사 어서 오시오.”
이언적이 자리에 앉자 그동안 지시했던 일의 성과를 물었다.
“일의진척은 어떻소?”
“네, 전하 구전되는 이야기를 엮어 정음으로 정리한 것이 모두 126개로 그중 13개는 목판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 경서와 법전은 소신이 직접 주관하여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등을 주석을 달아 완성하였고 법전은 후일 개정과 새롭게 재정될 법이 있다 하여 뒤로 미루고 있나이다.”
“아무래도 목판 화사의 숫자가 적어 일이 더딘듯하니 선공감에 일러 목판 화사를 더 충원하라 해야겠소. 허고 영전사를 이리 부른 것은 종이를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초지기라는 기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요. 하여 앞으로 종이의 생산이 매우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여 일을 더욱 서두르고, 더불어 새로운 일을 의논하고자 함이요. 조정의 일이란 것이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것과 알려도 무방한 것, 꼭 알려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중에 무방한 것과 꼭 알려서 백성을 개도하고 참여토록 해야 하는 것을 보름에 한 번씩 취합하여 정음으로 발행하였으면 합니다.”
“조보를 집현전에서 발행시키실 요량이십니까?”
조정의 일을 정리 취합하여 발행하는 것은 이미 오랜 전부터 해 오던 일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 때부터 대신들이나 귀족들이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사용됐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담당하는 곳이 승정원이었고, 승정원이 정리 취합하여 편집해서 각 기관에 돌렸다.
“조보와는 다르오. 조보는 관인들만을 위해 발행하는 것이니 이번에 발행하려 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오. 내 지침을 내려주겠소. 집현전에서 발행해야 하는 것은 신보이고 이것은 보름간 나라에서 일어난 변고나, 포도청과 사헌부, 의금부 등에서 조사하거나 밝혀 낸 사건과 사고, 과인이 백성에게 전하려는 말들, 국가적 대사에 관한 조정의 입장, 명, 왜, 유구, 야인과 그 외의 타지에 관련된 일들을 사실적으로 적고 또한 더불어 백성의 교화를 위해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을 연재형식으로 넣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고 싶은 내용이 있는 자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내용을 넣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하시오 허면 이를 작성하여 매월 1일과 16일에 발행하여 전국 팔도 관아에 배분하고 한양은 이를 따로 받아보고 싶은 양반이 있다면 얼마간의 돈을 받고 팔도록 하시오. 하면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 중 일부는 충당될 것이오.”
“이해하겠사옵니다. 허면 이것은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는 소식지이겠습니다.”
“그렇소. 물론 이것 또한 매우 중한 일이라 사관들이 작성해야 할 것이고, 기록에 남는 것이니 거짓이 들어가서는 아니 되오. 하니 젊은 선비로 직필할 수 있는 자로만 사관을 삼아 작성케 하시오. 만약 거짓이나 당파에 따라 작성이 되어 문제가 되면 그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전하의 명을 명심하겠나이다.”
“신보의 이름은 정확히 조선신보라 하는 것이 좋겠소. 허고 상단에 조선신보라 넣고 옆에 회차를 넣으며 날짜를 넣도록 하시오. 해서 후세에 사람들이 이를 참고하여 과거를 알 수 있도록 함이 좋을 듯하오. 첫 발행은 내년 1월 1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동안 조지서에서 충분히 종이를 생산할 것이오. 하면 첫 신보에는 조정의 개각과 인사이동, 소금의 전매, 지난달 10일 있었던 양반회합에 관한 사관들의 논담, 용양위의 북방이동, 왜와의 무역중단에 관한 전말, 과인의 조선신보 첫 발행에 대한 인사, 마지막으로 구전되는 이야기 하나를 넣도록 하고, 첫 회이니 군기시에서 만들고 있는 자전차를 판화로 그려 넣고 상세한사용법과 종류 가격 등을 넣어 알리고 누구나 군기시에 대당 10냥의 기술 사용료만 내면 만들어 팔 수 있음도 알리시오. 이제 신보가 어떤 성격의 회보인지 이해가 가시오?”
“가옵니다. 하면 양반들에게 판다하면 1부에 얼마를 받아야 하옵니까?”
“첫 회에는 무리해서라도 많이 찍어 내시오. 해서 신보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이 중요하오. 하여 쌀 한 섬이 4냥이니 4냥을 내면 일 년 동안 신보를 보내 주는 것으로 하여 판매한다고 하시오. 물론 관아에는 무료로 지급하고 따로 한 부씩 팔 때는 5푼을 받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이런 지시를 내려 놓고 인종은 궐 밖으로 나섰다. 신보의 가격을 정하다 보니 화폐개혁을 늦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절대 화폐인 금화와 은화를 사용하니 처음엔 힘들어도 노력을 한다면 차차 좋아질 것도 같았고, 화폐를 막상 새로 만든다고 해도 준비 기간이 1년은 돼야 할 것 같아 미리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주화를 만드는 주전소의 터를 보기 위함이다.
주전소는 상시 기관이 아니라 필요할 때 설치하여 임시로 만들었다가 폐하는 기관이었다.
가장 큰이유로 재료의 부족과 시장의 규모가 작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제 그 기능이 달라질 것이다. 주전소와 더불어 은행 역할을 할 기관도 설치할 생각이었다.
이미 기관의 이름과 운영방법까지 생각해 둔 인종이었다. 새로 발행하게 될 주화들의 이름은 대동화 그리고 그것을 관리할 관청으로 대동청을 만들고 대동청산하에 주전소를 둘 것이다.
처음에는 한양과 전국8도에 하나씩 설치하고 점차 인구가 많은 곳으로 늘려갈 계획이었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 없이 입출금과 대출, 조세의 납부만을 담당할 계획이었다.

인종 1년 11월 15일.

첫눈이 내렸다. 조정은 개각과 인종이 벌이는 새로운 사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 역사와는 다른 여러 가지 사건이 며칠간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마 도주가 한양으로 직접 가신들을 이끌고 입조한 것이다. 그를 따라 오오우치의 가신도 입조했다. 동래부사 조희를 시켜 은밀하게 대마 도주와 오오우치 요시타카에게 밀지를 보낸 지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본래는 내년 봄이나 되어야 접촉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서둘러 입조를 시켰다. 타국 관리들을 부른다고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금물이다. 적어도 조선의 임금은 왜와 야인들에게 타국의 왕이 아니었다.
국경과 가까운 야인 추장들은 조선의 관직을 받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었고, 왜의 관리들 또한 특히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오오우치 가문의 경우는 오라면 와야 하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제발 알현하게 해 달라고 부탁과 사정을 해도 감히 천한 왜인이라며 안 만나 주는 것이 조선의 임금이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근 150여 년 동안 왜의 사신들이 임금을 알현하려고 왔다가 쫓겨난 것이 알현에 성공한 것보다 적어도 3배는 많았다.
벌을 줄 것이라면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무역을 금하고 상종을 안 해 버리는 식으로 행동하면 피가 마르는 것은 왜인들이었다.
이렇게 불렀다는 것은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해서 아주 급하게 서둘러 대마 도주 종웅만과 오오우치 가문에서 특별히 보낸 이조윤방(니죠우 코레후사)이 경복궁에 입조했다.
이조윤방은 관백을 지낸 인물로 현재는 오오우치 가문에서 생활한다. 말 그대로 오오우치 요시타카는(대내의융) 현재 전국대명으로 일본 최고의 세력이었고 그 힘은 조선과 명에까지 알려지고 있었다. 공식적인 접견을 마치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대신들과 인종 사신들이 함께 했다.
“듣자 하니 대내 가문이 일왕의 지근거리에서 정사를 펼친다고?”
인종은 사신 이조윤방과 종웅만이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 한마디 건넸다. 의도는 당연히 일본의 정국을 오오우치 가문이 가져갔냐는 것이다.
물론 인종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확인 겸 또한 같이 자리한 대신들에게 알려 줄 겸 물은 것이다.
“네, 전하, 국은으로 오오우치 가문이 전국을 아우르는 대명에 올랐사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은 그 성세가 더욱 높아졌으니 자랑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일본은 동북아의 명, 원, 조, 일 중에서 가장 수준 낮은 국가로 취급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타국은 모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왕조 국가를 세우는데 일본만은 아직도 봉건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학문, 기술, 문화 어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고 왕의 명령하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선은 당연히 자신들보다 크게 보였다.
그런데 딱 지금의 시기를 벗어나면서부터 일본이 달라진다. 전국시대 기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무역선이 들어오면서부터 왜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그전에 조선이나 명이 왜에 학문과 기술에 인색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유럽의 무역선을 만났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변태 국가로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면 통제를 하지 못하고 휘두르는 것처럼 일본은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의 역사는 나름 이해라도 하지만 이후의 역사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게 행동한다.
임진왜란만 보더라도 조선의 뒤에 명이 있음을 그들 또한 알고 있고 조선 또한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구들이 그동안 수도 없이 침략하여 조선을 노략질했지만 그것은 변방에서의 일이고 그들 또한 조선의 수군에 관해서 나름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기 집권을 위해 정치적 반대파들의 병력 소모라는 극악한 수라를 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일국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며 그것을 지지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전쟁을 일으킬 때는 필승이 보장되었을 때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인이 일전에 왜의 사신이 진상품을 올릴 때 보니 왜에서는 나지 않는 산물도 포함되는 것 같은데 그대 대내 가문에서는 남방으로도 무역을 하느냐?”
명과 조선이 하듯이 조공 무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역하는 왜관을 열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부정기적으로 왜관을 드나드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진상품을 올린다. 인종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네, 전하! 아국은 유구국, 여송국(필리핀), 안남국, 대두국(대만) 등과 무역을 하옵니다.”
이조윤방은 어차피 알고 질문하는 것이니 시원스레 답하여 준다. 진상품으로 올린 약제 등을 보면 왜에서 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제는 주로 명에서나 보는 것들로 명에서도 남방의 여러 나라들에서 조공 무역 형식으로 진상 받는 것이다.
인종이 이런 것들을 물어보는 것은 오오우치 가문을 중간상으로 쓰기 위함이다. 물론 배가 완성되면 직접 대월국까지 무역 항로를 개척할 생각이었지만 당장 군선도 모자라는 판에 무역선을 계속 만들기도 힘들고 오오우치 가문을 이용해 왜의 역사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사신으로 참석한 이조윤방은 대내의융(오오우치 요시타카)이 1551년 부하의 반역으로 죽을 때 같이 죽는 인물이다. 우선은 그때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변화를 살펴가며 대처할 생각이었다.
“과인이 왜의 사신을 들라한 것은 조정에서 일전에 대마 도주 종웅만이 올린 서계를 가지고 논하였는데, 전조인 고려조부터 아국 조선이 건국한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구 문제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으니 차제에 이 문제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고 논하여 보기 위함이다. 왜사신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모두 도적들이고 대마도와는 관계없다 하나 무릇 국가에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관리를 안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며, 조정에 신고하지 않고 운행하는 배들을 모른 척 내버려 둔다는 것도 아국 조정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다. 좀 전에 이조윤방은 왜가 유구, 여송, 안남, 대두등과 무역한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국가에서 정한 법에 의하여 무역하는 것 일터, 대마도와 아국 조선의 무역 또한 법으로 정해놓고 하는 것인데 지난 왜변을 보면 수십 척의 배들이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아국의 변방에 와서 노략질하기를 수차례였다. 또한 과인이 듣기로 아국의 변방을 노략질하는 왜구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다 패하여 오갈 데 없는 번병들일 가능성도 있다하니 만약 무역을 재개하려 한다면 대마도와 대내(오오우치)가의 조정이 있다는 산구(山口―야마구치)에 공관을 설치하여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그 들고나는 것을 직접 확인하게하고, 또한 더불어 포악한 왜의 백성들을 높은 아국 문화로 교화하도록 함이 어떠하냐?”
인종의 뜻밖의 말에 이조윤방과 종웅만은 마치 얼음이 된 듯 놀란 얼굴로 인종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사대를 하는 국가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일종의 관청을 두자는 것인데 매우 심각한 주권 침해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