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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23화)
9. 대월국 사신의 방문(3)


인종 1년 10월 17일 첫 번째 기사.
경상 수사 송진이 대마 도주가 조선을 향하던 왜적 11급을 베어 왔음을 아뢰다.

경상 수사(慶尙水使) 송진(宋軫)이 치계(馳啓)하기를,
“왜선(倭船) 1척이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하고서 ‘도주(島主)가 귀국(貴國)으로 향하려는 왜적(倭賊)을 보고 선박 1척을 엄포(掩捕)하여 11급(級)을 베어서 서계(書契)와 함께 보냈다.’고 하니, 대마도를 거절한 이후로 도주가 화평을 청하려는 의도로 적을 베어서 내보 낸 것입니다. 지금 만약 엄히 거절하면 원망하고 분개하는 마음을 가질까 두렵고, 그가 왜적이라고 일컫는 자도 믿기 어려우며, 간교(奸巧)한 계략은 더욱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과 의논하라고 하였다.

본래는 1546년에 벌어질 일이나 인종이 남치근을 보내 대마 도주와 밀약한 것이 있어 대마 도주가 서둘러 행동을 했다.
시체야 가까운 왜의 본토에 널리고 널린 것이 시체였다. 그런 시체 11구를 구해서는 조선으로 향하는 왜구를 자신들이 잡아서 보낸 것이라 하며 화친을 청한 것이다.
인종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대신들과 논하라고 했다. 지금도 인종으로서는 고민이 많았다.
저 왜구들이 한두 해도 아니고 고려 때부터 끊임없이 약탈과 납치를 일삼으니 도저히 심정적으로는 용서가 안 된다. 그러나 후손들을 생각하면 마냥 이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갈 수도 없다. 문제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고 해서 쳐들어올 왜구가 안 쳐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결정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쉽지 않으니 머리가 복잡한 인종이었다.

인종 1년 10월 17일.

봉성군 이완이 북방총병사가 되어 떠난 지 근 두 달이 되자 장계를 올렸다. 북방총병사는 양계 즉 함경남북도의 군권을 가지는 자리로 북방의 최고위 장수이다.
이완이 떠나기 전 많은 소란이 조정에서 있었지만 인종의 강력한 밀어붙이기로 북방총병사에 오른 이완은 포부가 대단했다.
왕족으로 세종 대왕의 업적을 뛰어넘는 만주 전체를 조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엄연히 만주는 명의 땅이었고, 형식적으로나마 만주를 지배하는 각 부족의 족장들은 명의 신하였다. 즉 병력을 키워 그들을 공격한다면 명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이라면 명이 만주 지역에 대한 실권이 사실상 거의 다했다는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 작위를 내리는 형편이었다.
또한 그 작위는 당연히 대물림되고 있었다. 만주에는 건주좌위, 건주우위, 모린위로 나뉘는 백두산 일대의 건주여진이 있었고 하다국과 예허국으로 나뉘는 송화강 일대의 해서여진과 연해주 일대에 야인여진 이렇게 크게 세 개의 부족이 있었다.
이중 건주여진은 조선과 잦은 마찰을 빚고 있었고, 해서여진은 몽골과 혈연관계이나 같은 부족 안에서도 반목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한쪽은 반명이었고 한쪽은 친명이었다. 나머지 야인여진은 사실 친 조선에 가까운데 야인여진의 파아손(巴兒孫), 착화(著和), 홀라온(忽剌溫)과 함께 세종 시절부터 꾸준히 조선과 내왕하며 일부는 조선으로 귀화한 부족이다.
이들 중에는 전대 임금인 중종에게 조선의 관직을 받고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에 사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명과 조선을 오가며 실리를 취하는 것이다.
‘소제가 북방에 도착하여 강계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병력을 점고하니 평안도 병사가 8천이고 함경도 병사가 갑사 3,400, 기병 6,500, 보병 2,000으로 도합 1만 1,900명으로 함경도 전체 병사가 1만 5천이 아니 되옵니다. 병적에는 2만 6천이온데 그 반도 아니 되옵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함경남도 병사 조광원, 함경북도 병사 윤담, 평안 관찰사 황헌, 함경도 관찰사 이청, 평안 병사 이광식과 논하여 청을 올리옵니다. 이곳 함경도와 평안도는 좌우로 넓은데 고작 2만도 안 되는 병사로 지키기는 너무 힘이 드옵니다. 야인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 또한 조선인이 월경을 하여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일전에 단천에서 은을 채취하여 군비를 사용케 하였는데 은을 들고 월경하여 군비와는 무관한 품목과 교환하는 폐단이 있어 금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하오나 은이라도 채취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군비를 충당하여 병력을 유지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더불어 함경도는 철이 나는 곳이 많사온데 이 또한 야인들에게 넘어가 화살촉이 된다하여 금하였사온데 소제의 생각으로 은과 철의 채취를 허하시오면 은과 철을 모두 수매하여 도성으로 보내도록 하고 그 대금으로 호조에서 포목과 군량으로 보내주신다면 병사 300을 내어 담당케 하고자 하옵니다. 부디 윤허하여주십시오’

인종은 장계를 받고 역시 봉성군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에 누가 있어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처음 봉성군이 출정할 때 인종은 가서 병력을 점고하고 1차 목표를 폐 4군을 다시 설치하라하였다. 본래 세종 때 만들어진 4군 6진 중 6진은 그 명맥이 이어졌으나 4군은 철수했다.
해서 그곳을 폐 4군이라 한다. 현재는 폐 4군 지역뿐만 아니라 그 안쪽까지 야인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마치 자신들의 땅인 것처럼 활개를 치는 상황이었다.
폐 4군을 다시 설치하고 그 땅에 머무르는 야인들을 몰아내는 것은 명으로써는 뭐라고 할 수 없다. 엄연히 조선 땅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조선으로 약탈을 하기 위해 들어오는 부족들을 징치하는 것도 명 입장에서는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군이 넘어가 징치하고 그곳에 장기간 주둔을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복잡해진다. 아무리 명이 만주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고 해도 엄연히 그들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진족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명 조정으로서는 여진과 조선이 싸우는 것을 매우 반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나서서 여진 인들이 서로 싸우게 조장하기도 한다. 그들이 결집하여 금나라 때와 같은 상황이 올 것을 걱정해서이다.
장계를 받아서 본 인종은 또 다른 고민을 했다. 은과 철을 채취하여 가져온다 해서 그것을 모두 포목과 군량으로 바꿀 수 있을지가 걱정된다.
지난날 왜의 사신이 은을 가져왔을 때도 당장 입고 먹는 것이 아니니 중요치 않다며 되돌려 보낸 대신들이었다. 그것은 대신들이 물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시대 상황과 조선의 입장이 은을 쌓아 둘 만한 형편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들 말대로 먹고 입는 것이 시급한데 먹지도 못할 은을 가지고 있어봐야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며칠을 고민에 고민들 거듭하던 인종은 결단을 내리게 된다.
‘어쩔 수 없구나, 화폐개혁을 해야겠어. 금 본위 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은과 동을 보조하게 해야겠어, 은화를 크기별로 5종류 만들고 금화를 3종류, 동화를 2종류 만들어서 가장 낮은 1원과 5원을 동화로 하고 10원부터 50원, 100원, 500원, 1,000원을 은화로 그리고 고액화폐로 5천 원과 1만 원 5만 원을 금화로 만들어서 그 이외의 모든 화폐를 금하도록하면 정착되겠지? 그런데…… 발행량이 따라 줘야 할 텐데…….’
유통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년에 계획대로 강화와 김포에 공방들이 들어서고 조정에서 녹을 전부 새로운 화폐로 지급하며, 소금을 전매하면서 대금을 신화폐로 지금하면 기존의 화폐보다 유통은 쉽게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현재 취급되고 있는 화폐를 모두 수거하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도 전국 팔도에 관아를 이용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그만큼의 양을 찍어 낼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바꿔 주거나 지급할 화폐가 준비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 화폐개혁이고 물가가 폭락하거나 폭등하는 등의 시세 변동이 심하게 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너무 적게 찍어 내면 폭등할 것이고 많게 찍어 내면 폭락할 것이다. 그 기준을 잡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숙제였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그렇게 해도 식량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녹봉으로 곡식을 지급하는데 결국 화폐로 받게 되면 그 돈으로 곡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대월과 문제없이 무역을 할 수 있다면 해결될 듯도 한데…….”
관건은 대월과의 무역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대월의 쌀은 안남미라서 조선이나 왜의 쌀과는 다르다.
밥을 하는 법부터 다르고 점성이 달라서 맛 자체가 다르다. 그래도 넉넉하게만 사올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있기만 하면 쌀국수라도 만들어 먹으면 되는 것이다.



10. 왜의 사신들을 불러들이다(1)


인종 1년 10월 20일.

대신들 간에 논의하라고 했던 대마 도주의 문제에 답이 없자 인종은 직접 삼정승을 불러 답을 달라고 했다. 한데 세 사람 모두 다른 소리를 한다.
“전하 이것은 대마 도주가 무역을 재개하고자 술수를 쓰는 것이 옵니다. 이런 간교한 계략에 넘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대마도뿐만 아니라 왜와는 일절 무역을 금해야 하옵니다.”
영의정 유관의 답이었다.
“전하 만약 그것이 대마 도주의 계략이라 하더라도 받아 주셔야 하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화를 키우는 것이옵니다. 저들은 왜의 본토와 아국 조선 간의 중개무역으로 먹고 사는데 무역을 금하게 되면 당장 저들은 먹을 곡식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악한 족속들이온데 그리되면 언제 또 변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사옵니다.”
좌의정 권벌의 답이었다.
“전하! 차제에 대마도를 정벌하셔야 하옵니다. 따지고 보면 대행 대왕마마 시절에 했어야 하오나 당시에는 대행 대왕마마께옵서 옥체 미령하시어 그럴 상황이 못 되었사옵니다. 저 왜구들은 살려 둬서는 안 되는 족속들이옵니다. 아무리 국은을 내려도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들을 납치해 가는 포악한 놈들로 다시는 우리의 땅에 올라설 엄두를 내지 못하게 씨를 말려야 하옵니다. 정벌을 명해 주십시오.”
우의정 성세창의 말이었다.
세 사람 다 결론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왜인들이 매우 포악하며 간교하고 인간 같지 않은 족속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점에서는 인종도 동의했다. 고려 때부터 수도 없이 노략질을 일삼던 족속들이고 가끔가다가는 수천에 이르는 왜구가 떼거리로 몰려오기도 했다. 물론 인종만 아는 내용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족속들이다.
“과인도 그 족속들이 어떠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소. 하나 무조건 금한다고 왜구가 안 올 것도 아니고, 또 쉽게 허한다면 만만하게 볼 것이며 정벌을 하기에는 여건이 좋질 못하오. 해서 여가 나름 고민을 해 보았소. 대마도가 동래에서 지척이라 날이 좋으면 반나절이면 간다하던데 맞소?”
“맞사옵니다.”
“왜구들이 저리 포악하고 간악한 것은 모두 성현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공부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오. 하고 대마 도주의 말을 들어보면 왜구가 모두 대마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왜 본토의 각 지방의 번에서 보낸 것이라 하는데 그 말을 믿을 수도 아니 믿을 수도 없는 것은 우리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오. 해서 대마도에 스승을 보내고 그를 호종할 병사 수십을 보내서 대마도 인들과 대마도를 왕래하는 왜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교화하는 한편 왜의 내정을 살피게 하는 것이오. 왜는 듣기로 지방의 방백들이 각기 나뉘어 싸우기를 밥 먹듯 한다 하니 과인이 생각하기로 그리 싸우다 패전하여 오갈 데 없는 족속들이 살기 위해 아국 조선을 약탈한다 생각하오. 하니 미리 그 상황을 안다면 능히 대처할 수 있지 않겠소?”
인종의 말에 세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각기 한마디씩 한다.
“대마 도주가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좋은 계책이 될 것이옵니다. 하오나 대마 도주가 자신들을 감시하려 한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하오리까?”
영의정 유관이 답하자 좌의정 권벌이 이어서 한마디 한다.
“전하! 참으로 뛰어난 계책이옵니다. 그들이 안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지은 죄도 있으며 무엇보다 급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저희들이니 살려면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소신 역시 찬동이옵나이다. 한데 그리되면 오랜 기간 동안 타국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들의 안전과 경비는 어찌 충당하시렵니까?”
성세창은 더 나아가 현실적인 것을 물었다. 명나라를 한 번 다녀오는데도 엄청난 경비가 들어가는데 언제까지일지도 모를 기간 동안 못해도 100여 명은 돼야 할 인원을 파견하는 것이니 경비와 안전이 제일 문제였다.
“경비야 대마 도주가 일정 부분 부담하게 해야지요. 무역을 재개해 준다면 그리 해 줄 겁니다. 물론 일정 부분은 아국에서도 지원을 해 줘야겠지요. 더하여 안전은 동래와 대마도가 멀지않으니 10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동래의 관원을 보내 안전을 확인하고 더하여 취합한 정보를 받아와야 하지 않겠소?”
인종의 설명에 세 사람은 모두 수긍하며 그리하자고 했다. 인종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왜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며 성사시킬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인종 1년 10월 25일.

강화도의 해안군에게서 장계가 올라왔다. 근 한 달 만에 소다회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세척력이 뛰어난 비누와 유리의 제조가 성공하였고 공인들에 의해 더 뛰어난 물건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인종은 특별히 어식을 보내 주어 상찬했고 더불어 비누와 유리를 이용한 각종 상품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비누는 각종 약제와 천연 재료를 혼합하여 미용과 피부 질환 등의 치료 등에도 사용할 수 있게 그 종류와 혼합할 재료, 방법 등을 알려 주었고 유리는 그림을 그려 일일이 용도, 기능 등을 적어 주며 하나씩 만들어 보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안경, 천리경, 경대, 돋보기, 여러 종류의 식기, 장식품, 여성들이 사용하는 각종 장신구, 유리등, 수족관, 창유리 등이었다.
더하여 응용하여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기존의 물건을 대체할 물건을 만들어도 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유리제품의 희소성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공인들의 실력을 쌓을 수 있게 최대한 지원하라 했고, 유리제품에 색을 넣는 기본적인 방법을 알려 주며 다양한 모양과 쓰임새가 있는 물품을 개발하도록 노력하라 하고 그에 따르는 지원을 약속했다.
해안군에게 답신을 보내고서 인종은 호조판서를 불러들였다.
“소금 전매는 어찌 되어 가나?”
“네, 전하! 경기도 일대와 충청도의 염한들이 강화에 들어가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간 뒤 모두 새로운 제조법으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염전을 만들고 있사옵니다. 해서 공조에 협조를 얻어 도공들을 파견하여 주었고, 일부에서는 새로운 제조법으로 소금을 생산하여 경기도에 경창과 충청도의 공진창으로 소금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 양이 매우 많사옵니다. 이 속도라면 조만간 창고를 더 늘려야 할 듯 보이옵니다.”
“그래, 허면 한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각 조창에 일러 창고를 늘리고 호조관원을 파견하여 불민한 자들이 소금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관리를 철저히 하라 이르게, 그리고 지금 소금의 시세가 얼마인가?”
“경기도는 소금 한 말에 쌀 한 말이옵니다. 강원도와 평안도는 소금 한 말에 쌀이 한 말 반이옵니다.”
“허면 소금 한 말에 쌀 6되로 균일하게 적용하여 판매하고 그중에 3되는 생산자인 염한에게 주고 2되는 호조에서 나라의 세수로 걷고 나머지 1되는 염매 공사로 보내도록 하라.”
“허면 관에서 직접 백성에게 소금을 파는 것이옵니까?”
“아니다. 조창이 없는 곳은 관찰사가 있는 관아에 창고를 마련하도록 하게하고 조창이 있는 곳은 그곳에서 각도별로 소금을 모아 해당 지역 장사치들에게 판매하되 소금 한 말에 쌀 8되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길 시는 상행위를 다시는 못하게 할 것이며 해당 상단의 행수는 장 100대에 10년간 노역을 시킬 것이라 공포하여라.”
“알겠나이다.”
소금 전매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만간 그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한숨 돌릴 것이라 예상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보면 다행히 올해 농사는 흉작이 아니라 내년 봄에 굶어서 죽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인종은 경기도에 있는 경창에 소금이 5천 석 이상 모였다고 하자 그중에 1천석을 북방의 강계로 보내 북방총병사인 봉성군으로 하여금 군비로 쓰도록 했다. 봉성군이라면 그것을 잘 활용하여 요긴하게 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