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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현월비화 1권 (1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1)


아침부터 심상치 않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사천성 성도의 외진 곳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장원.
빗줄기는 분풀이라도 하듯 장원의 지붕을 두들기고, 세찬 바람은 귀신의 울음처럼 문틈을 비집고 있었다.
장원의 내전, 마루를 조금 높여 놓은 위쪽에 자리한 태사의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인 듯 관을 쓴 머릿결에 조금씩 흰빛이 보였으나 각이 진 얼굴은 남자다웠고, 굳게 다문 입술이 의지의 견정함을 말해 주는 사내였다.
그의 아래쪽으로는 십수 명의 사람들이 둘러싸듯 서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도 있었고, 청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태사의 바로 아래쪽으로 열서넛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과 불안한 기색으로 그 소년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암울한 기운이 실내를 짓누르고 있었다.
태사의에 앉은 사내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마치 눈 안에 담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 사내의 눈빛은 집요함을 담고 있었다.
사내가 눈을 감으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요함이 깨어져 나갔다.
“살문은 오늘부로 폐문한다.”
사내의 말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지만 힘겨움을 감출 수는 없는 듯,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다시 눈을 뜬 사내의 눈동자에는 아릿한 아픔이 가득했다.
몇몇 사람은 주저앉듯이 무릎을 꿇었고,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허탈함과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문주님!”
“사부님!”
문주라 불린 사내의 눈에 단호한 기색이 어렸다.
“살문의 문주로서 마지막 명을 내리겠다. 살아남아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라. 그리고 살아남거든 살문을 잊어라! 복수 같은 것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말거라!”
울분을 터트리는 듯 소리치는 사내의 목소리에 몇몇의 눈가에는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 살수가 행적이 드러나면 추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잊을 수 있으면 잊고, 잊지 못하겠거든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할 것이다.”
사내의 입에서 탄식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말을 하면서도 사내의 심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원한을 가지든 잊든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인데, 지금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떠올려 보면 단 한 명의 생존자를 기대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천성의 패자를 자부하는 당문의 정예 백여 명이 그리 크지도 않은 장원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었다.
세간의 평가와 같지는 않으나 스스로 정파라 자부하는 당문인지라 형식적으로나마 투항을 권유했고, 그 덕에 잠시나마 여유를 얻기는 했다.
하나 문도와 잡일을 하는 일꾼들을 모두 합쳐 봐야 수십 명에 불과한 살문에 별다른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원한은 열 배로 돌려줘도 모자라다 말하는 당문이었다.
모르고 한 일이라 해도 당문의 제자가 죽었다.
투항한다고 해도 본보기라 하여 모두 죽일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눈가에 희미한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돌려 태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소년과 소녀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운비야, 이리 오너라.”
사내의 말에 소년이 차분한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얼굴이 어울려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잠시 따스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나와 네 사형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 포위망을 뚫어 볼 생각이다. 너는 옥화와 수로 쪽에 몸을 숨겼다가 기회가 나는 대로 시장 방향으로 빠져나가도록 해라. 이곳까지 드러난 상황에 당문이 나선 일이니 요행히 빠져나간다 해도 추적이 없으리라 보기는 힘들 게다. 허나 하늘의 도움이신지 쉬이 그치지 않을 폭우가 내리고 있으니, 네 재지라면 생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거운 분위기에 맞지 않는 사내의 부드러운 말이었으나 운비라 불린 소년은 얼굴을 굳히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옥화를 보호하여 빠져나가야 한다면 무엇으로 보아도 저보다는 대사형이 낫습니다.”
소년, 조운비의 입에서 날이 선 듯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는 가볍게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가진 능력이 너보다 첫째가 낫다는 것을 몰라서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느냐? 사천제일세라는 당문이다. 분명 우리 살문의 중요 인물들에 대해서 적지 않은 조사를 했을 것이다. 천인살이라 불리는 첫째가 사라진다면 당문이 어찌하겠느냐?”
사내는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은 듯 곧 말을 이어 갔다.
“네 대사형이 옥화와 함께 빠져나간다면 필히 당문은 총력을 기울여 추적을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구라 해도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게다. 허나 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살행을 나간 적이 없다. 당문에서 너를 안다고 해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부는 그러한 점에 한번 기대를 해 보려는 것이다. 알겠느냐?”
설득력 있는 말이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유였으나 조운비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피가 흐르도록 입술만 깨물었다.
“사제.”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조운비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마른 체형에 창백한 안색의 청년이 조운비를 향해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게. 다른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네. 사제가 가지 않는다면 옥화가 꼼짝이나 할 것 같은가? 사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네.”
애써 웃음을 짓는 청년의 말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옥화는 어린 나이 탓인지 명확한 상황은 모르는 듯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에 억눌린 듯 무척이나 불안한 표정이던 이옥화가 조운비의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발견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사내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켜 조운비에게 다가섰다.
크고 투박한 손이 조운비의 손을 부드럽게 덮었다.
“운비야, 옥화를 부탁한다.”
살문의 문주이자 이옥화의 아비인 사내의 처연한 눈빛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쏴아아!
비는 강풍에 파도라도 되는 듯 사위를 휩싸고 있었다.
장원의 정문에서 이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두 명의 녹의인이 있었다.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하관이 가는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날씨가 더 험해지는군. 포위망을 벗어나는 놈이 있으면 추적하기가 쉽지 않겠어.”
노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는 눈매의 중년인이 살짝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염라대가 백입니다. 우중이라 하나 살수들 따위가 빠져나갈 틈은 없습니다.”
약간의 불만이 섞인 중년인의 말이었으나 노인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만의 바탕에 깔려 있는 자신감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리라 생각되네만 조금 더 주의해서 손해날 것은 없겠지. 몇 명을 뒤로 빼서 주변을 살피라 이르게.”
부드러운 노인의 목소리에 중년인이 가까운 곳에 있는 녹의인 한 명을 불러 무어라 지시를 했고, 녹의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날렸다.
노인, 당문의 장로인 추혼수 당태화는 차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의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폭포수 같은 빗줄기와 세찬 바람에도 조금의 허술함도 보이지 않는 녹의인들의 모습에 당태화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당태화의 시선이 다시 장원으로 향했다.
“시각이 어찌 되었는가?”
당태화의 나직한 음성에 중년인, 염라대의 대주 당화기가 입 꼬리를 가볍게 비틀었다.
“반 식경 정도가 남았습니다.”
“그럼 곧 움직임이 있겠군. 적지 않은 악명을 얻은 자들이라 하나 고작 살수에 불과하니 피해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당태화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당화기에게 향했고, 당화기의 눈빛이 잠시 차가운 빛을 뿜었다.
“있어 봐야 해가 되는 놈들이니 손속에 정을 남기지 말라 하였습니다.”
물음에 맞는 답은 아니었으나 당태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느꼈는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순수한 무공만을 본다면 몇몇 세가나 구대문파의 정예에 조금의 모자람이 있었다.
하나 무공을 살인의 기술로만 본다면 천하제일의 정예라 자부할 수 있는 염라대인 것이다.
제압이 아닌 제거이고, 손속에 정을 두지 않는다면 살수들 따위에게 피해를 입을 염라대가 아니었다.
삐이익!
폭포수인 양 요란한 빗소리를 가르며 날카로운 소음이 장원의 동쪽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녹의인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종일 쏟아져 내린 폭우에 시달려 늪이라도 된 듯 길은 질퍽거렸지만 녹의인들은 한 몸이라도 되는 듯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삐이익!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또 한 번의 날카로운 소음이 대기를 갈랐다.
당태화는 미간에 주름을 접으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부질없는 노력이겠으나 그저 목을 내밀 수는 없을 터이니…….”

* * *

층층이 하늘을 뒤덮은 칠흑 같은 먹구름은 긴 여정의 무게를 덜어 내려는지 끊임없이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이옥화는 반 시진 가까이 대책 없이 맞은 비에 한기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바르르 몸을 떨었다.
꼭 쥐고 있던 자그마한 손의 울림에 조운비의 고개가 돌려졌다.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에 드러난 조운비의 눈동자에 근심의 빛이 떠올랐다.
이옥화는 괜찮다는 듯이 파랗게 질린 입술로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니 조금만 더 참아 보거라.”
조운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이옥화는 애써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괜찮아.”
대답의 의미와는 달리 이옥화의 목소리는 온몸에 스며든 한기로 인해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이옥화를 바라보던 조운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사부와 사형들의 희생으로 장원의 포위망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장원을 촘촘히 포위했으니 굳이 다른 준비가 없을 수도 있지만 상대는 당문인 것이다.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침착한 얼굴로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조운비였으나 그러한 겉모습과는 달리 실상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부와 사형들을 죽음 속에 놓아두고 도망가고 있다는 생각이 쉬지 않고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녹의인들의 손짓에 피 흘리며 쓰러지던 문도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만 같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부님과 사형들 또한 녹의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운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옥화를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살아남는다면 언젠가는 갚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는 잊으라 했고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것이 진심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죽을 줄 모르고 불길에 날아드는 나방의 운명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조운비도 사부의 생각이 그르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복수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던 자신을 구해 준 사부였고, 하인을 삼아도 감지덕지할 자신을 제자로 거두어 자식처럼 대해 준 사부였다.
사부님이라 불렀으나 아버지라 생각했었고, 남들은 살귀라 해도 자신에게는 친형제 같던 사형들이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눈앞에 골목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에 이르면 시장 길로 들어서고 사방으로 퍼지는 미로와 같은 길들 사이로 자신과 옥화는 몸을 감출 수 있을 것이다.
문뜩 조운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딱히 무엇인가를 봐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골목의 끝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운비는 몸을 멈춘 채 잠시 동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조운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이옥화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조운비는 곧 자신이 받은 이상한 느낌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바람과 짙은 어둠에 휩싸인 골목의 그림자 한편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듯 보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조운비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긴장감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하자, 조운비는 깊이 숨을 들이켜 심호흡을 했다.
피해 갈 길은 없었다.
혼자라 해도 힘들 터인데 옥화를 데리고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이없는 기대이겠으나 당문과 상관없는 자이기를 빌어 보았다.
조운비는 조심스럽게 꼭 쥐고 있던 옥화의 손을 떼어 내며 그녀의 앞으로 몸을 옮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옥화는 조운비의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의지를 느끼며 그의 손길에 따라 뒤로 물러섰다.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어느새 녹의인으로 변해 있었다.
조운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짐작한 일임에도 막상 당문의 제자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전신을 옥죄어 왔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녹의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설마 했는데 빠져나오는 것들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이런 꼬맹이들이라니.”
녹의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절망 어린 눈빛이 되어 녹의인을 바라보던 조운비가 터질 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멍하니 있어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자신과 옥화의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신의 어설픈 무공으로 당문에서도 정예라 할 수 있는 염라대의 인물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지만 곱게 죽어 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