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현월비화 1권 (2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2)


냉정을 되찾은 조운비의 눈빛이 빠르게 가라앉으며 힐끔 주위를 살폈다.
‘저자 혼자다.’
녹의인은 혼자인 데다 자신을 그저 어린아이로만 생각하고 무시하는 듯 보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린 조운비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듯 한 발을 뒤로 옮겼다.
그런 모습에 녹의인은 비웃음을 떠올리며 긴장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겁먹은 꼬맹이들에게 굳이 암기나 독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조운비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스쳤다.
겁을 먹고 물러서는 연기를 했지만 실제로는 공격을 하기 위한 자세를 잡은 것이다.
녹의인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으나 녹의인은 오히려 조운비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여 더욱 무시하는 듯 보였다.
“흐흐,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녹의인이 입가의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다섯 걸음 정도 앞까지 다가섰다.
조운비는 겁먹은 모습을 보이며 뒤로 뺐던 오른발을 힘주어 박차며 몸을 날렸다.
섬전처럼 몸을 날린 조운비의 양손이 정신없이 휘둘러졌다.
퍼엉!
녹의인의 발밑에서 흰 연기가 치솟았고, 녹의인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쇄액!
연기 속에서 세 가닥의 빛살이 솟아 나와 녹의인을 덮쳐 갔다.
안색이 굳어진 녹의인이 빠르게 손을 휘두르자, 세 자루 단검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감히!”
녹의인이 채 분기를 터트리기도 전에 조운비의 신형은 녹의인에게 부딪쳐 가고 있었고, 녹의인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러 가고 있었다.
녹의인은 이마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맨손으로 단검을 쥔 조운비의 팔을 쳐 나갔다.
너무 거리가 가까워 암기나 독을 쓸 수도 없었고 검을 뽑을 만한 틈도 없었다.
그저 겁먹은 꼬맹이라고 생각했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퍼억!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검을 찔러 오던 조운비의 팔이 늘어졌고, 조운비는 튕겨 나가듯이 뒤로 물러섰다.
녹의인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암기를 손에 쥐었다.
“이 쥐새끼 같은……. 으윽!”
분기 어린 말을 내뱉던 녹의인이 신음을 흘리며 시선을 자신의 가슴으로 옮겼다.
녹의인의 가슴에는 단검의 검날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바닥 한쪽에는 단검의 손잡이만 나뒹굴고 있었다.
“큭! 이, 이깟 기관 따위에…….”
고통과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녹의인의 몸뚱이가 서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털썩!
쓰러지는 녹의인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입술을 깨물며 늘어진 한쪽 팔을 잡고 벽 쪽으로 다가섰다.
기관이 장치된 단검의 검날을 발사하고 최대한 힘을 뺀 덕에 팔이 부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어깨가 빠졌던 것이다.
조운비는 이를 악물며 벽에 어깨를 부딪쳐 갔다.
빠각!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조운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다가선 이옥화가 불안한 듯 몸을 떨며 조운비의 소매를 잡았다.
“오빠…….”
고개를 돌린 조운비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이옥화의 손을 쥐었다.
“괜찮아. 이제 가자.”
조운비는 고개를 돌려 잠시 녹의인의 시신에 눈길을 주었다.
자신이 녹의인을 죽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녹의인에게 조금이라도 긴장감이 있었다면 비도를 사용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고, 혹여 사용할 틈이 있었다 해도 당황하지 않았다면 검날이 발사되는 기관 정도에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녹의인은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조운비의 안색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당장 살아나기는 했으나 자신과 옥화의 종적이 드러났다.
녹의인의 시체를 숨기고 흔적을 지운다 해도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당문의 제자가 죽었으니 총력을 기울여 추적을 할 것은 당연했다.
‘흔적을 지울 시간도 없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
조운비는 시선을 돌리고는 이옥화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옥화라도 살려야 할 텐데…….’
조운비는 힘주어 걸음을 옮기며 눈을 빛냈다.
골목을 벗어난 조운비는 거미줄 같은 시장 길을 헤치며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평소 같으면 어느 정도 사람들이 오갈 시간이었으나 쏟아지는 폭우에 길은 스산하기까지 했다.
이옥화의 손을 잡고 한동안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조운비는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향하더니 곧 몸을 세웠다.
조운비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초라한 행색의 두 사람이 처마 밑 담벼락에 기대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중년의 여인과 십여 세 정도의 여자 아이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모녀간인 듯 보였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던 조운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싸늘한 빛을 뿜었다.
조운비는 씹듯이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원래 가던 방향이 아니라 모녀가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중년의 여인은 뛰어오다시피 다가온 두 아이의 모습을 의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옆에 기대앉은 여자 아이의 눈에도 의아함이 서렸다.
“무슨……?”
중년 여인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조운비의 오른손이 섬전처럼 여인을 덮쳐 갔다.
중년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했고, 눈빛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여인의 옆에 있던 여자 아이의 눈에 당혹감과 함께 공포심이 떠올랐다.
막 비명을 터뜨리려던 여자 아이의 입은 조운비의 손에 의해 덮어졌고, 곧 내려쳐진 조운비의 손에 아이는 정신을 잃었다.
중년 여인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씁쓸한 눈빛을 떠올리던 조운비가 빠르게 다가서며 여인의 몸을 담벼락에 기대어 놓았다.
독침에 의해 죽었지만 얼핏 보기에는 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옥화야, 저 아이와 옷 바꿔 입어.”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던 이옥화는 이어지는 조운비의 말에 눈동자를 불안감으로 물들였다.
장원을 탈출해 이곳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운비의 말을 순순히 따르던 이옥화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싫어. 난 오빠랑 같이 갈 거야.”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이옥화가 정신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조운비가 딱히 어찌하겠다고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옥화의 느낌이 말해 주고 있었다.
조운비는 여기에서 자신과 헤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옥화도 대강의 상황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지금 어찌 되었을지, 다른 오라비들과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그럼에도 이옥화가 그나마 안정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조운비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사랑해 주고 지켜 주었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조운비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옥화는 불안감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운비는 자신을 떼어 놓으려 하는 것이다.
불안감과 공포심이 갑작스럽게 이옥화를 감싸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난 오빠하고 같이 갈 거야!”
조운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으나 곧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이옥화의 양손을 꼭 쥐었다.
“옥화야, 오빠가 옥화한테 한 번이라도 거짓말한 적 있어?”
잠시 생각해 보던 이옥화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조운비는 말을 이어 갔다.
“오빠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오빠랑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어. 오빠 말 믿지?”
이옥화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면 돼. 옥화는 저 아이와 옷을 바꿔 입고 이곳에 반나절만 있다가 우리 가끔 놀러 갔던 비밀 동굴에 가 있어. 동굴 끝에 땅 파면 나오는 상자에 돈이랑 패물들 있지?”
“응.”
“오빠가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다 배고프면 거기서 돈 꺼내서 옥화 좋아하는 유과랑 과자 사 먹고 하루 정도 지나면 백화루의 장 선생님한테 가 있어. 오빠가 그리로 옥화 데리러 갈게.”
이옥화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다.
“정말? 정말 며칠만 있으면 나 데리러 오는 거지?”
조운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이옥화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오빠가 한 번이라도 옥화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니.”
“오빠 말 믿고 어서 옷 갈아입어.”
조운비가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이옥화를 끌었다.
이옥화가 옷을 바꿔 입는 동안 조운비는 불안한 기색으로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니 죽은 당문 제자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었다.
“다 입었어.”
시선을 돌린 조운비가 잰걸음으로 이옥화에게 다가섰다.
초라해 보이는 차림의 이옥화를 바라보던 조운비가 바닥의 진흙을 집어 얼굴에 문질렀다.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얼굴을 돌리려던 이옥화는 곧 조운비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고개를 숙이고 아까 이 아이처럼 앉아 있어. 반나절 정도 꼼짝하지 말고. 알았지?”
이옥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운비는 몸을 일으켜 이옥화의 옷을 입고 쓰러져 있는 여자 아이를 들쳐 업었다.

* * *

당태화의 얼굴은 분기로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당태화의 발밑에는 심장에 검날을 꽂은 한 녹의인의 시신이 차가운 비를 맞고 있었고, 주변에는 몇몇 녹의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선 당화기가 굳은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 둘입니다. 살문 문도들의 시신들 중에 보이지 않던 살문 문주의 딸과 막내 제자인 듯합니다.”
시선을 돌린 당태화의 표정은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우습게 생각하던 살수들에게 염라대의 정예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지는 상황에 어린애에게 목숨을 잃은 이까지 있으니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살이나 되었다고 하였는가?”
쥐어짜는 듯 나직한 당태화의 목소리에 당화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살문 문주의 딸이 아홉 살, 막내 제자가 열세 살이라 합니다.”
짝!
당화기의 얼굴이 옆으로 획 돌아갔다.
당태화가 분기를 못 이기고 뺨을 후려친 것이다.
“이, 이 병신 같은 놈. 아이들 교육을 어찌 시킨 것이냐! 살문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해 몇 놈이 목숨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리다고 무시하다 암수에 당해? 당문의 염라대원이 열세 살짜리 어린애한테 죽었다고 하면 무슨 소리를 듣겠느냐?”
중년의 나이에 수하들의 앞에서 뺨을 맞고 욕을 먹는데도 당화기의 눈빛에서는 조금의 반발심도 찾을 수 없었다.
분기로 뒤덮인 당태화의 목소리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수하이기도 했으나 따지고 들면 가족이 아닌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방계의 다른 성씨를 쓰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는 추혼대와 달리 염라대는 전원이 당씨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당태화의 분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이자, 당화기가 분기가 깔려 있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폭우 때문에 흔적을 찾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어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당태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리다고 손속에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

조운비는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혼자 몸이라 해도 쉽지 않은 험한 길을 한 사람을 업고 가려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하나 업고 있는 아이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옥화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문뜩 자신의 등에 대충 옷을 찢어서 만든 끈으로 묶여 있는 여자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 죄 없이 죽은 중년 여인이나 등에 업혀 있는 아이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똑같이 그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타인이었고 이옥화는 자신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고아로 자라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던 조운비에게 사부가 손을 내밀어 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자그마한 온정조차 베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타인에 불과하기 때문이었고, 조운비에게 다른 사람은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천 명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이옥화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단 하나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옥화의 생명을 어찌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조운비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뒤따르는 자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계곡이 있는 곳까지는 가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계곡은 폭우에 힘을 얻어 미친 듯이 범람하고 있을 것이고, 자신이 향하는 곳에 있는 어설픈 통나무 다리는 분명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사천 땅에서 당문의 추적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급한 심정에 계곡을 건너 도주하려다 폭우의 힘을 받아 광란 어린 질주를 하고 있을 계곡의 물에 자신과 이옥화가 휩쓸려 내려갔다고 당문이 보아 주기만 하면 충분하리라.
이곳저곳 칼날 같은 바위들이 흉측하게 솟아 있는 험한 계곡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자신과 등에 업혀 있는 여자 아이가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여 살아날 수 있다 생각한다고 해도 더 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옥화는 당문의 추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살문의 비동에 숨겨져 있는 자금이 그리 적지는 않을 것이고, 그 정도 돈이면 이옥화는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