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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3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3)


문뜩 백화루에서 기생들에게 기예를 가르치는 장 선생님의 후덕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만 홀몸인 데다 이옥화를 친딸처럼 아끼고 있으니 이옥화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아 줄 것이다.
힘겹게 걸음을 옮겨 가던 조운비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옥화야, 이 오라비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구나. 어쩔 수 없었으니 나중에라도 용서해 주렴.’
속으로 옥화에게 해 주고픈 말을 되새긴 조운비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콰콰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거대한 나무들까지 쓰러뜨리며 폭군 같은 위세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물줄기가 보였다.
폭우의 힘을 보태 광란하는 계곡의 와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다가서는 조운비에게조차 본능적인 공포심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잠시 멍하니 계곡의 세찬 물살을 바라보던 조운비는 등 뒤의 꿈틀거림에 정신을 되돌렸다.
업고 있는 여자 아이가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것이다.
조운비는 빠르게 몸을 묶은 것을 풀어냈다.
내려놓은 여자 아이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힘겹게 눈을 뜨고 조운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운비가 다시 기절을 시킬 요량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조운비의 공력으로는 아직까지 점혈을 할 수가 없어 기절을 시켰던 것인데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자 아이가 깨어 있어서는 곤란했다.
혹시라도 당문에서 이옥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운비가 손을 내려치려 하는데 여자 아이가 몸을 비틀며 다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생각지도 못한 차분한 목소리에 조운비는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끼며 손을 멈췄다.
“유모는 죽었나요?”
여자 아이가 급하게 말을 이었으나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냉철한 말투였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던 조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아니지만 아무 잘못 없이 자신으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니 몇 마디 말 정도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네 옆에 있던 여인이라면 죽었다.”
여자 아이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의 이름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말투와 태도에 조운비의 눈빛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사라졌다.
어차피 곧 자신과 함께 죽게 될 아이였다.
“조운비.”
대답과 함께 조운비가 손을 내려쳤고, 여자 아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독이 서린 눈빛으로 조운비를 응시하다 정신을 잃었다.
다시 여자 아이를 등에 업는 조운비의 시선에 멀리서 달려오는 녹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 * *

좌세량이 조운비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사천에 있는 지부에 들렀던 길에 사천 당문이 살문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하 둘을 데리고 구경삼아 왔던 길이었다.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위세는 상당한걸.”
은연중 비웃음이 묻어나는 좌세량의 말에 뒤에 서 있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제깟 놈들이 위세가 있어 봤자 사천 땅에서나 행세하는 놈들 아닙니까. 천마대 스물이면 반 식경 안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중년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백의인이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혀끝을 찼다.
그런 백의인의 모습에 좌세량이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싶은데?”
백의인, 이지문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대주님 말대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찌 당문의 염라대 따위가 천마대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허나 저들과 천마대는 비교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비교를 한다면 당문의 장로들과 저희 천마신교의 장로님들을 비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네, 맞아. 신교와 당문을 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이지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천하에 단일 문파로 천마신교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마신교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포함한 천하의 정파 전부와 지금까지 싸워 왔습니다. 당문의 일개 대와 천마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닙니까.”
이지문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단호한 말에 험상궂은 중년인, 마무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젠장. 그, 그게, 난 비교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실수라도 한 듯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무강의 모습에 이지문의 입가에는 얄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좌세량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장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원에서 뛰쳐나온 두 무리는 필사적으로 당문의 포위망을 뚫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으나 하나 둘 녹의인들의 암기에 맞아 흙탕물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볼 것이 없다고 느끼던 좌세량의 눈이 이채를 떠올리며 반짝였다.
“호오!”
가벼운 탄성과 함께 좌세량의 신형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지문과 마무강은 의아한 기색을 띠며 곧 뒤를 따랐다.
좌세량이 몸을 세우고 시선을 주는 곳에는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어린것들이 용하게 빠져나왔네.”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지.”
마무강의 눈가에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두 아이 앞에 녹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아이가 겁먹은 듯 주춤거렸다.
“간이 작은 녀석이네. 그래도 어린애들인데 구해 줄까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놔둬 봐. 겁먹은 게 아니야,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거지. 자세히 봐. 공격할 자세잖아.”
좌세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아이가 몸을 날렸고, 순간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녹의인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무강의 눈이 놀람으로 가볍게 울렁였다.
“허, 그놈 참 야무지네.”
이지문의 눈빛도 가볍게 번뜩였다.
“기초도 상당히 잘 잡혀 있고 재지도 범상치 않군요.”
좌세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지는 별로인 것 같은데. 저놈 흔적을 그대로 남겨 놓고 가잖아.”
마무강의 말에 이지문이 다시 혀를 찼다.
“쯧쯧, 단순하기는. 흔적을 지울 시간에 다른 놈들이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것이지. 뭐, 그래 봐야 저 여자애를 데리고 추적을 피할 방법은 없겠지만.”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좌세량에게 옮겼다.
“대주님, 데려가죠. 싹수가 있는 놈 같은데.”
좌세량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어찌하는지 조금 더 보고.”
일행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아이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초라한 차림의 두 모녀에게 조운비가 하는 행동을 본 마무강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애새끼가 저리 독해?”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마무강의 말에 이지문이 고개를 흔들며 좌세량에게 시선을 옮겼다.
“잘 다듬으면 정말 쓸 만한 놈입니다. 저는 재지보다는 냉철함과 독심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곧 당가의 추적이 따라붙을 겁니다.”
좌세량의 결단을 재촉하는 의미가 담긴 이지문의 말이었다.
당가가 본격적으로 추적을 하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능력으로도 아이들을 빼돌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고, 빼돌린다 해도 추적하는 자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당문의 떨거지 몇을 죽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그리하면 흔적이 남을 것이니 데려가려면 지금이 적당했다.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보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여자 아이를 업고 내달리는 조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좌세량의 눈빛은 탐욕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좌세량이 다시 몸을 움직이자, 마무강이 입을 열었다.
“대주님, 저 계집애는 어쩝니까?”
“일단 놔둬. 우리라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야. 우선 저 녀석을 따라가 보자고. 그리고 당문하고 한판 할 수도 있으니까 생각하고 있어.”
좌세량의 말에 마무강은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고, 이지문은 조금 떨떠름한 기색이 되었다.
한동안 조운비의 뒤를 따르던 좌세량이 의아한 듯 턱을 괴었다.
“저리로 길이 있나?”
뒤따르던 이지문이 고개를 저었다.
“등천계곡이 있는 곳입니다. 통나무 다리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폭우면 떠내려갔을 겁니다. 바위가 많고 험해서 물이 적을 때에도 빠지면 십중팔구가 죽어서 등천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입니다. 빠지면 하늘에 오른다는 뜻이라더군요.”
어느새 조운비는 계곡 앞에 몸을 세우고 있었다.
“근데 저 녀석이 어쩌려고 이리로 왔지?”
좌세량의 의문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여 명 정도의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꼬맹이 둘 잡자고 많이도 왔군.”
비웃음 섞인 마무강의 말이었다.
“어찌할까요?”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만 더 보다가 꼬맹이가 위험할 듯 보이면 끼어들어.”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과 마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조운비의 앞에 십여 명의 녹의인이 다가섰다.
좌세량의 일행은 나설 준비를 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조운비의 분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이 도와 살아남는다면 결코 당문을 용서하지 않겠다.”
조운비를 둘러싸고 싸늘한 웃음을 짓고 있던 녹의인들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고,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조운비가 여자 아이를 업은 채 순식간에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
“저, 저런 미친 녀석!”
좌세량의 얼굴에 당혹감과 분기가 떠오름과 동시에 섬전처럼 계곡의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지문과 마무강도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저런 독한 녀석을 봤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순식간에 뛰어드는데…….”
이지문이 마무강을 말을 받았다.
“도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야. 아까 놔두고 온 그 계집아이만 살리면 된다는 생각이었어. 허, 정말 대단한 녀석이 아닌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이지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십여 명의 녹의인들도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휘몰아치는 계곡 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좌세량은 물이 범람하지 않는 계곡 옆으로 섬전처럼 몸을 날리고 있었다.
시선은 계곡의 물살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좌세량의 몸은 수많은 나무의 틈을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벌써 계곡을 따라 십 리 이상을 달려왔다.
꼬맹이의 몸이 쇳덩어리가 아닌 이상 산산조각이 났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좌세량의 마음은 다급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까 낌새가 조금 이상하다 느꼈을 때 움직였어야 했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조그마한 머리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좌세량의 시선에 잡혔다.
좌세량의 몸이 뒤로 휘어졌다가 활을 쏜 듯 튕겨 나갔다.
좌세량의 날아간 몸이 물살에 언뜻 보이던 바위 끝을 가볍게 박차고 계곡의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계곡의 반대편에 내려선 좌세량의 손에는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이 들려 있었다.
좌세량은 재빨리 조운비를 바닥에 눕히고 손목을 쥐었다.
희미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었다.
“휴우.”
좌세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조운비의 몸을 더듬어 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살았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가 아닌가?”
좌세량의 미간이 다시 일그러졌다.
팔다리가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뼈가 성한 곳이 거의 없었고 내장도 많이 상한 듯 보였다.
그나마 얼굴이 멀쩡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느 틈엔가 이지문과 마무강이 계곡을 건너 좌세량에게 다가서 있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마무강의 말에 좌세량은 대답을 하지 않고 굳은 안색으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곧 좌세량의 손에 조그마한 옥갑이 딸려 나왔고, 옥갑을 열자 청량한 향기가 번졌다.
좌세량의 눈에 잠시 갈등의 빛이 어렸고, 이지문과 마무강의 얼굴에는 경악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공자님, 안 됩니다. 기재이기는 하나 천마신단은 과합니다.”
이지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목소리만 다급한 것이 아니라 심정도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급한 나머지 천마대의 대주라는 직책으로 부르라는 좌세량의 신신당부조차 잊고 이공자라는 호칭이 튀어나온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신단.
천마신교의 무상지보라 할 수 있는 영약이었다.
흔히들 소림의 대환단, 무당의 태청신단, 화산의 자소단을 합쳐 삼대성약이라 칭한다.
숨만 붙어 있다면 목숨을 살려 낼 정도로 내상과 외상에 큰 효과가 있는 데다 무인이라면 보통 반 갑자의 세월을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공력까지 생기니 성약이라 할 수밖에 없었고,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무인들이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또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기물인 것이다.
외부에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천마신교에도 그러한 효과를 가진 성약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천마신단이었다.
천마신단은 외부로 알려진다면 삼대성약이라는 말이 사대성약으로 바뀌어도 억울하다 할 만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성약들과는 달리 다시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백여 년 전 우연에 가깝게 만년삼왕과 이무기의 내단이 동시에 천마신교에 입수되었고, 천마신단은 인세에 보기 힘든 그 두 가지의 기물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천마신단의 개수는 불과 이십여 개 정도였는데 이후 교주와 직계제자, 가끔 천마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에게 하사되었고 현재는 교주와 두 명의 직계제자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고작 다섯 개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러한 천마신단을 좌세량이 오늘 처음 본 아이에게 사용하려는 듯 보이니 이지문과 마무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