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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4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4)
“안 됩니다. 바위투성이의 물살에 십 리를 넘게 휩쓸려 내려왔습니다. 살아난다 해도 정상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게다가 기재임은 분명하나 명확한 성품이나 자질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아니, 설혹 제아무리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천마신단은 위급한 상황에서 대주님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기물입니다.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이지문의 정신없이 이어지는 말에 좌세량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어느덧 좌세량의 눈에는 잠시간 떠올랐던 갈등의 기색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맞아. 아마 자네의 말이 맞을 게야. 나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 분명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네 말을 따라야 할 게야. 헌데 그럴 수가 없어. 오늘 이 녀석을 보면서 심하다 할 정도로 욕심이 생기더군. 자네들도 내가 그리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그래, 맞아!”
좌세량이 갑자기 탄성 같은 소리를 내며 잠시 말을 끊고 허리춤을 툭툭 쳤다.
좌세량의 허리에 걸려 있는 은은한 묵빛의 검 자루가 그의 손길에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이 녀석, 혈영을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어. 내가 처음 혈영을 보고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 자네들도 알지? 혈영을 처음 보았을 때가 그랬어. 이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가지지 않으면 꼭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 그래서 처음으로 사부님께 억지를 부렸어. 사실 대사형도 이 녀석에게 욕심이 있었지만 사부님이 워낙에 마음에 들어 하셔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내가 미친놈처럼 억지를 부려서 사부님이 어이없어 하시면서 내게 주셨지.”
이지문과 마무강이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했었다.
좌세량은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 혈영을 얻기 위해 사부인 교주의 언짢음이 역력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검을 달라고 들러붙었고, 상당히 기분이 상한 대사형조차 무시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헉!”
“어엇!”
이지문과 마무강의 입에서 때늦은 경호성이 튀어나왔다.
어느 틈엔가 좌세량의 손에 쥐어져 있던 천마신단이 조운비의 입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좌세량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녀석은 검이야!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보검. 혈영 다음으로 내가 가질 보검이지. 어쩌면 천마신단이 내 목숨을 한 번 구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녀석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이라도 내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이상의 가치를 할는지도 모르지, 하하하핫!”
대소를 터뜨리는 좌세량의 모습에 이지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걸 어찌 아십니까? 그놈이 깨어난다고 해도 머리를 다쳐 바보라도 되었으면 어쩌시려고요? 저 녀석 머리가 깨져서 피 흐르는 것은 안 보이십니까?”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느낌이 그래. 내 느낌은 절대로 안 틀리는 거 자네도 알잖나.”
좌세량의 말에 이지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대주님의 그 대단한 느낌 덕에 며칠 전 도박장에서 잃은 은자가 천 냥이 넘습니다.”
좌세량이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맞아! 머리에 피 난다고 했지?”
몸을 돌린 좌세량은 조운비의 상세를 살핀 후 빠르게 손을 움직여 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좌세량의 머리 위로 허연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지문과 마무강은 어느새 좌세량의 좌우로 몸을 옮겨 주위를 살폈다.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좌세량의 손이 멈췄다.
좌세량은 몹시 지친 듯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좌정해 운기를 시작했다.
다시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좌세량은 천천히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정신을 잃고 있는 조운비를 옆구리에 끼고 몸을 날렸다.
“상세가 그다지 좋지 않아. 깨어나도 며칠은 지나야 할 것 같아. 우선 사천지부로 가야겠어. 참, 무강은 가서 그 계집아이를 데려오도록 해. 이 녀석이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챙겨야지.”
좌세량의 뒤를 따르던 마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좌세량이 이지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좌세량이 말도 꺼내기 전에 이지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저는 사천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의원 한 놈 챙겨서 가겠습니다.”
왠지 허탈함이 섞인 이지문의 말에 좌세량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 *
이옥화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 오는 몸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느껴지는 한기 탓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조운비가 자신의 옆에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붙이고 있는 중년 여인의 딱딱해진 몸에서도 솟아나는 냉기에 이옥화는 몸서리를 쳤다.
갑작스럽게 중년 여인이 시체라는 생각이 떠오르며 공포심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옥화는 조그마한 몸을 더욱 작게 움츠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오빠가 곧 올 거야. 아니, 조금 늦으면 동굴로 가면 돼. 오빠가 그리로 온다고 했으니까.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이옥화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머릿속으로 조운비와의 약속을 되새겼으나 불안감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조운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간 십여 명의 녹의인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옥화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오는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 내고 싶었다.
‘아니야. 오빠가 약속했어. 오빠는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아.’
생각을 돌려 보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안감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녹의인들은 정확하게 조운비가 간 방향을 뒤따르고 있었다.
조운비가 자신과 옷을 바꿔 입은 여자 아이를 업고 간 후 일다경도 흐르기 전이었다.
이옥화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뜩 이옥화는 공포심을 느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진한 그림자가 느껴졌던 것이다.
이옥화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쌍한 것. 옆에 있는 여인이 네 어머니냐?”
안타까움이 가득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옥화의 불안감을 조금은 덜어 주었다.
하얀 눈썹을 가진 부드러운 미소의 늙은 비구니가 눈동자에 안타까움을 가득 담고 이옥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옥화는 왠지 안도감이 드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비구니가 천천히 몸을 굽히며 조심스럽게 이옥화의 볼을 쓰다듬었다.
흠칫 고개를 돌리려던 이옥화가 노승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사로움에 얼굴을 맡겼다.
“많이 추운 게지?”
이옥화는 따스한 느낌에 눈을 내려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나와 같이 가자꾸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옥화가 놀란 듯 몸을 떨며 눈을 크게 떴다.
“안 돼요. 오빠를 기다려야 해요. 오빠가 금방 올 거예요.”
이옥화는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급한 이옥화의 말에 남해신니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불안한 게지. 세상이 험하니 어린아이도 쉬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 이 어린것이 제 어미가 죽은 것은 알기나 하는지. 불쌍한 것.’
남해신니의 입가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았다. 그럼 네 오라비가 오면 같이 가자꾸나.”
남해신니의 말에 이옥화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떠올랐고, 남해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자신의 짐작이 맞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시간은 흘러 지나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남해신니는 조금도 이옥화를 재촉하려 하지 않았다.
불안감에 있지도 않은 오라비 핑계를 대기는 했으나 곧 자신의 마음을 느끼리라 믿었고, 시간이 급할 이유도 없었다.
아미파에 들렀던 일도 무척 만족스러워 불문의 고승답지 않게 기분도 들떠 있던 참에 우연히 발견한 사고무친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재질을 보아 데려가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찬찬히 보니 상당히 빼어나 보이는 아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함을 보이던 이옥화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남해신니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문뜩 떠오른 듯 이옥화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냈다.
“스님은 빗속에 계신데도 어째서 옷이 젖지 않은 거죠?”
이옥화는 스스로 말을 꺼내고도 자신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말을 꺼내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조운비가 종종 들려주던 무림의 이야기는 이옥화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웠었다.
조운비에게 들었던 믿겨지지 않던 이야기들 중에 분명 그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인들 중에서도 진정 빼어난 몇몇의 고인들은 심후한 공력으로 인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옷이 젖지 않는다고 들었었다.
남해신니가 놀란 듯한 이옥화의 모습에 즐거운 듯 웃음을 지었다.
“부러운 게냐?”
이옥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나와 같이 가면 너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해신니가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스님은 어디 사시는데요?”
이옥화는 자신의 앞에 있는 늙은 여승이 대단한 고수라는 생각이 들자, 문뜩 얼마나 대단한 문파의 고인인지 궁금증이 들었다.
하나 자신을 무림에 대해 전혀 모르는 평범한 여자 아이로 생각하는 노승에게 어느 문파냐고 물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는 곳이 어디냐고 돌려 물었던 것이다.
남해신니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껏 해 봐야 열 살도 안 된 아이었다.
어디라 설명한다고 해서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 물으니 대답을 해 주긴 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에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신령스러운 산이 있단다. 그 산 위에 보타암이라는 곳이 이 늙은이가 사는 곳이지. 그곳에 가면 이 늙은이가 제일 높은 사람이란다. 네가 나를 따라가면 다들 너를 신주 모시듯 할 게야.”
장난스러운 노승의 말에 이옥화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으나 사실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놀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보타암, 노승의 말마따나 조그마한 비구니들의 암자이기는 했으나 그 이름은 간단치가 않았다.
불문답지 않게 보타암의 비구니들은 검을 주로 사용했고, 언제나 여중제일고수이자 제일검객은 보타암 출신이라 들었다.
조운비가 해 주었던 이야기들 중에서도 스스로가 여인이다 보니 이옥화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았던 곳이 보타암이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그저 그러하다는 것을 알 따름이었고 잠시 선망했을 뿐이었다.
이옥화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은 여중제일고수나 제일검객이 아니라 조운비라는 이름이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 아직 남녀의 정 같은 것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나 다른 오라비들은 언제나 할 일이 많았고,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곁에는 늘 조운비가 있었다.
조운비도 무공을 배우기 시작하며 무공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최우선은 이옥화였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자신이 찾으면 달려와 주는 것도 조운비였고, 너무 이옥화만을 챙겨 아버지와 다른 오라비들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조운비는 변함이 없었다.
조운비에게는 마치 이옥화가 전부인 듯했고, 이옥화에게는 당연하게도 조운비가 전부이자 모든 것이 되었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든 이옥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남해신니는 이옥화의 그러한 모습에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보타암이라 하면 어린아이라 해도 혹시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남해신니였다.
하나 아이는 호기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어린아이답게 금방 딴생각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정말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닌가.’
문뜩 느껴지는 인기척에 남해신니의 시선이 돌아갔다.
멀리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빠르게 다가서더니 곧 적지 않은 수의 녹의인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남해신니는 눈빛에 의아함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고, 이옥화도 녹의인들의 모습을 발견한 듯 눈빛에 불안감을 떠올리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당문의 문도들 같은데 이 빗속에 무슨 일이 있는 겐가?’
의아함이 들기는 했으나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닌지라 남해신니는 곧 생각을 접었다.
한데 그저 지나칠 듯 보이던 녹의인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남해신니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보내던 녹의인들 중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놀란 듯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신니께서 사천에 방문하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의 죄가 작지 않습니다.”
당태화는 혹시나 했다가 남해신니가 맞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 없이 지나던 중에 한 제자가 노승을 가리키며 빗속에 서 있는데도 옷이 말라 있다고 놀람 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무심코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남해신니는 가벼운 일로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 거물이었다.
게다가 대체로 남해신니 정도의 고인들이 움직이면 방문하는 지역에 통보 정도는 해 주고 하루 이틀이라도 들러 가는 것이 보통인데, 당가에서는 그러한 통보를 받은 적이 없으니 당태화로서는 의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죄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한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의 얼굴에 잠시 난감함이 어리는 듯했으나 곧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저 늙은 비구니일 뿐인데 과하십니다.”
부드러운 남해신니의 말에도 당태화의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은 바뀌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