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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5화)
제1장 이별, 그리고 만남 (5)
“사천에 오신 줄 알았으면 저희가 영접을 했을 것인데, 소식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여전히 죄송스럽다는 태도였으나 당태화의 말속에는 남해신니가 사천에 방문한 목적에 대한 의문 또한 섞여 있었다.
“아미파에서 서장을 통해 들어온 불경을 구했다는 전갈을 하여 한 부 얻어 가는 길입니다.”
남해신니의 말에 당태화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가시는 길이시면 당가에 잠시 들르시지요. 그냥 가시면 가주께서 섭섭해 하실 겁니다.”
의아함이 가셔서인지 표정이 조금 밝아진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가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파에 붙들려 있다 오늘에서야 걸음을 옮긴 참입니다. 더 늦어지면 보타암의 아이들이 이 늙은이가 객사라도 했을까 하여 찾아 나설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아미파야 불경을 이유로 갔지만 당문에 들른다면 청성파 또한 들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자면 일정이 너무 늦어질 듯하군요. 가주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완곡한 남해신니의 거절에 당태화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서렸으나 곧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오실 때는 신니께서 꼭 당가의 체면도 생각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은연중에 당가의 체면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질책이 섞인 말이었으나 남해신니의 온화한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헌데 우중에 무슨 일들이십니까?”
남해신니의 물음에 당태화는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가 곧 가볍게 분기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살문이라는 금수만도 못한 살수 집단의 잔당들을 잡고 오는 길입니다.”
“아미타불!”
당태화의 말에 남해신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불호를 외웠다.
남해신니의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불호에 당태화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해충이나 다름없는 살수들을 처리하다 여섯이나 되는 세가의 가족들이 목숨을 잃어 속이 끓는 와중인데, 이 늙은 중은 살수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분기가 치밀자 당태화가 싸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어찌나 독한지 더 어린 계집아이를 하나 업고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그 험한 등천계곡의 물살에 주저 없이 뛰어들더군요. 아마 지금쯤은 장강까지는 떠내려갔을 겁니다. 그 험한 물살에 휩쓸렸으니 지금쯤은 장강의 물고기들이 먹기 좋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지 않았을까 생각되는군요.”
당태화는 분기가 오른 탓인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심한 말을 내뱉었고, 그의 잔인한 말에 남해신니의 안색은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찌 그 어린것들이……. 허허.”
애잔하기 그지없는 데다 고통스러움까지 묻어나는 남해신니의 목소리에 당태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구나. 신니가 당문을 어찌 생각하겠는가?’
실수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방법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당태화는 남해신니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총총히 몸을 돌렸다.
한참 동안 속으로 불호를 되뇌며 얼굴도 모르는 두 아이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던 남해신니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옥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통과 분노는 이미 다 타서 재가 되기라도 한 듯 이옥화는 백치와 다름없는 표정이 되어 굵은 눈물만을 하염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러한 이옥화의 모습이 어찌나 슬퍼 보이는지 어언 백 살이 넘은 지도 벌써 수년은 지난 남해신니조차 주책없이 코끝이 시큰거렸다.
‘선재로다, 선재로다. 험한 삶을 살았을 터인데 저러한 측은지심이라니.’
남해신니는 마음이 아픈 와중에도 왠지 모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우연히 모친의 죽음도 모른 채 한기에 떨고 있는 아이가 안타까워 데려가려 했던 것인데, 그 아이의 재질이 범상치 않았고 험난한 세파 속에서도 천진함과 함께 깊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이 어찌 부처님께서 이끌어 주신 인연이 아니겠는가.’
남해신니의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이옥화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조금 정신이 들자 가슴속에 오로지 원한만 가득 차올랐다.
‘오빠, 나는 못 믿어. 아무리 생각해도 오빠가 죽었다는 것은 상상이 안 돼. 분명히 오빠는 어디엔가 꼭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나를 찾아오겠지.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며칠 안에 돌아온다던 오빠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오빠가 옥화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용서해 줄게. 어쩔 수 없었다는 것도 아니까. 그리고 다시는 내게 거짓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마냥 오빠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오빠를 죽이려 하고 아버지와 다른 오빠들을 죽인 그자들에게 복수할 거야. 내가 오빠보다 더 늦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줘. 아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빠는 날 기다려 줄 것이라는 걸 알아. 기다려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옥화의 이성은 조운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감정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고, 곧 이성조차 감정의 힘에 밀려났다.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옥화의 귓가에 따사롭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야, 이름을 알려 주지 않으련?”
“이옥화.”
“옥화야, 이 늙은이와 함께 가자꾸나.”
이옥화는 백치처럼 텅 빈 눈빛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승의 따스한 손길이 이옥화를 이끌고 있었다.
제2장 심결과 심공 (1)
창천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구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괴리되어 있는 것 같은 둥 뜬 느낌만이 조운비의 감각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불분명한 그러한 감각조차 없을 때가 더욱 많았다.
‘살아 있는 것인가?’
문뜩 조운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드는 끔찍한 고통.
온몸을 쇳덩어리로 쉬지 않고 후려치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괴리되어 있던 감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크으, 으윽…….”
폐부에서부터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으로 조운비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복잡하게 헝클어져 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막상 이성이 회복되자 육신의 고통은 견뎌 낼 만했다.
가장 처음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였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물살은 조운비에게 티끌만큼의 살아날 여지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불가능하다 여겨졌지만 쉽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조운비는 격류 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 했다.
네 번에 걸친 온몸이 터져 나가는 것 같은 충격 속에서야 정신을 잃었고, 마지막 충격으로 조운비는 죽음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깊은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하나 그러한 의문은 조운비의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곧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옥화는?’
처음은 걱정이었다.
이옥화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걱정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차근차근 채워 나갔다.
‘내가 성공했으니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인지 모르나 지금쯤은 장씨 아주머니와 같이 있을 테지.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나 살아났으니 곧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조운비는 이옥화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이옥화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자 조운비의 사고는 자신에게 향했다.
생각이 현실로 돌아오자 문뜩 코끝으로 진한 약 냄새가 느껴졌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자신의 몸이 정상일 턱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여 치료하고 있는 것이리라.
우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팔다리 하나 정도는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위험했다.
조운비는 온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조금씩 손끝과 발끝으로 힘을 전달해 보았다.
쉽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움직여 보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조금씩 신체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에 표시가 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팔다리는 멀쩡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몸의 상태를 확인해 보며 만근 같은 눈꺼풀을 조금씩 밀어 올리던 중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다더니 손가락, 발가락만 꿈지럭거리고 있잖아. 저 꼬맹이 왜 저러는 거야?”
마무강의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에 침상에 누워 있는 조운비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지문이 묘한 탄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참, 이걸 똑똑한 놈이라고 해야 할지 괴상한 녀석이라고 해야 할지…….”
이지문의 뜻 모를 말에 마무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뭔 소리야? 말할 때 알아듣게 좀 하라고 했잖아.”
“보고도 몰라? 혹시라도 갑자기 움직이면 다친 몸에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근차근 확인해 보고 있잖아.”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럼 똑똑한 거지, 괴상하다는 건 또 뭐야?”
이지문이 마무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인상을 썼다.
“네 녀석의 머리는 도대체 뭐 하라고 붙어 있는 건지를 모르겠다. 최소한 생각이라도 한 번쯤 해 보고 나서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이지문의 말에 마무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네 녀석이 괴상하다며. 네 녀석 머릿속에 있는 걸 왜 내가 생각해야 되는데?”
“휴우, 됐다. 말을 말자. 그냥 설명을 하마.”
이지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긴 해도 저 꼬맹이, 지금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데다 죽다 살아나서 머릿속도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복잡할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성적인 생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말이지. 보통 다른 사람이 저 꼬맹이 같은 상태라면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거나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비틀어 대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저 꼬맹이는 신음 소리조차 내뱉지 않고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저놈은 이제 겨우 열서넛이나 될까 말까 한 꼬맹이 아니냐.”
이지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마무강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뭐가 괴상하다는 거야? 똑똑한 거 맞잖아.”
마무강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이지문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느 틈에 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조운비의 모습이 이지문의 눈에 들어왔다.
이지문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조운비가 누워 있는 침상에 다가섰다.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이냐?”
“쿨럭! 크윽.”
대답을 하려던 조운비의 입에서 마른 기침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지문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힘들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괜찮으면 눈을 한 번 감았다 떠라.”
“괘, 괜찮습니다.”
굳이 힘겹게 입을 여는 조운비의 모습에 이지문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으나 곧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머리를 다친 것이 상당히 걱정스러웠는데 멀쩡해 보이니 천마신단을 공으로 날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요.”
곧 이어지는 조운비의 차분한 말에 이지문은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들을 말이 아니다.”
이지문이 고개를 돌렸다.
“무강, 대주님께 꼬맹이가 깨어났다고 전해 드리게.”
“지는 발이 없나?”
마무강이 투덜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잠시 후, 다시 방문이 열리며 좌세량과 마무강이 들어섰다.
좌세량은 잘생긴 얼굴에 기꺼운 미소를 지으며 침상으로 다가왔다.
“하하핫! 드디어 깨어났구나. 몸은 어떠냐? 꽤 아프지?”
살갑게 들리는 좌세량의 쾌활한 목소리에 조운비는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괜찮습니다. 저를 구해 주신 분이십니까?”
좌세량이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구했지. 내가 아니고서야 그 격류에 휩쓸려 가는 사람을 누가 구할 수 있었겠느냐. 하하하핫!”
어찌 보면 뻔뻔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조운비는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아직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 이렇게 누워서 인사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조운비의 예의바른 말에 좌세량은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자. 우선 네 몸 상태를 알려 주도록 하마. 대충 겉으로 보이는 상처와 부러진 뼈들은 어느 정도 치료가 된 상황이다. 허나 처음 네 녀석의 상세가 워낙 위중했던 터라 완전한 치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운비는 조금은 굳은 안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하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치료는 상당히 잘되어서 그냥 놔두어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이 될 것이다. 다만 무공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조운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그다지 충격을 받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조운비의 그러한 반응에 좌세량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어째서 놀라지 않는 것이냐? 무공을 사용할 수 없어도 괜찮은 게냐?”
조운비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은공의 말씀 중에 무엇인가 방법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설혹 방법이 없다 해도 무공이 모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쉬움이야 없지 않겠지만 죽을 것을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무도 차분한 조운비의 말에 좌세량은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정도는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던 탓이었다.
“거참, 재미없는 녀석일세.”
좌세량은 고개를 휘휘 내젓더니 곧 말을 이어 갔다.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복수는 포기하려고 하느냐?”
좌세량의 물음에 조운비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고, 다시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의아해 할 것 없다. 네가 당문에 쫓기는 것도 보았고 계곡으로 뛰어들기 전에 복수하겠다고 소리 지르는 것도 보았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던 조운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혹 제가 빼어난 무공을 갖춘다고 해서 그 무공만으로 당문에 복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무공을 잃는다면 더욱 힘든 길이 되겠지요. 허나 결코 복수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