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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블레이드 1권(25화)
Chapter10 영지 시찰(3)


쏴아아아아아.
새벽부터 시작된 비는 잠시도 쉬지 않고 퍼붓듯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다섯 시 경을 향해 가니 꽤나 오래도록 내리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보면 온통 시커먼 먹구름만이 가득했는데 가끔씩 떨어지는 천둥벼락은 음산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우르르르릉. 콰쾅!
그때 짧게 끝나 버린 벼락의 빛 속을 통해 일단의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드론 마을로 들어서는 넓은 길목.
그곳에 4명의 인영이 빗속을 헤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들 몸에는 방수처리가 된 긴 우비를 걸치고 있었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뱀부 햇(대나무 모자)을 눌러써 억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막아 내고 있었다.
“어휴, 무슨 놈의 비가 이리도 내리는 건지?”
제일 왼편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내가 짜증이 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바로 그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체형이 조금 작은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아침에는 그래도 약하게 내렸었는데 말이에요. 점심을 들고 길을 떠나니 그때부터 비가 폭우로 바뀌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일찍 나온 것 같네요.”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작은 체형의 인영은 리렌시아였다. 그리고 처음에 말을 꺼낸 사내는 라이언 기사단의 그월더 저윈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다 그 누군가 때문이겠죠?”
리렌시아는 자신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곰처럼 커다란 사내를 예쁘게 흘겨보며 말했다.
그녀는 피곤했다.
벌써 한 달째 영지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자그마한 소왕국의 크기를 지닌 영지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지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녀의 경우는 순수한 인간이 아닌 수인족이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들에 비해 체력이 월등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으니 이건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백작가에서 마법공부만을 해 온 터라 체력을 키울 만한 운동을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수인족이 제아무리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 조건과 체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걸 갈고닦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한 달간의 힘든 여행을 잘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 같으면 진즉에 나가떨어질 일이었으니 말이다.
“여기가 바로 드론 마을인가 보군요, 대장님?”
오른편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베로 페튜스가 앞에서 걷고 있던 베스렐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여기가 바로 드론 마을이다.”
“그럼 오늘 밤은 여기서 묵을 생각인 겁니까, 대장님?”
베로 폐튜스는 베스렐을 영주가 아닌 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베스렐은 그러한 호칭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고 있었다.
이들 네 사람이 백작가의 인물들이 아닌 거친 용병들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영지 시찰이란 것은 사실 넉 달 전에 베스렐을 독살하려고 계획했던 그 미지의 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계획한 일이지 않은가.
너무 속 보이게 돌아다닌다면 적들이 눈치를 챌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조심히 용병 복장을 한 채 영지를 돌고 있는 것이다. 영주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던 놈들이니 아무래도 정보 수집 능력은 뛰어날 것이 아닌가. 놈들이 베스렐을 다시 어찌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틀림없이 지금도 어디선가 정찰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쏴아아아아아아―
우르르르릉.
지겨운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오늘 밤은 이곳 마을에서 머물기로 한다. 비가 지랄같이 많이 오기도 하고, 저번처럼 비 오는 날 괜히 다른 곳에 가서 노숙하며 고생하기는 뭐하니까 말이야.”
“호호.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주인…… 아니, 대장님!”
리렌시아는 베스렐의 말에 기쁜 듯 웃음을 지었다.
사실 속으로는 조금 조마조마했던 그녀였다. 며칠 전에도 오늘처럼 억수같이 비가 오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는 산속의 어느 동굴에서 노숙을 했었던 것이다. 이런 날이 바로 적들이 공격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니 도시나 마을로 가지 말고 산속에서 밤을 보내자면서 말이다.
물론 그날 적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축축한 동굴 속에서 고생만 하다가 날을 보냈었다.
베스렐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근데 그 죽일 놈들은 언제쯤 나타나는 거야? 벌써 한 달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나타날 생각을 안 하니.’
고생하고 있는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열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달 동안의 노숙 생활.
물론 베스렐이나 다른 두 기사들은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유일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리렌시아에게는 큰 고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한 보름 정도만 더 돌아다녀 보고 그래도 쥐새끼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돌아가야겠어. 심법수련만 할 수 있고 다른 무공은 익힐 시간이 없으니 이건 정말…….’
그때 그월더가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호. 저기에 큰 여관이 하나 보이네요, 대장님!”
마을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3층의 큰 여관을 볼 수 있었다.
“하하하, 이거 하늘이 돕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배가 고픈 줄 어찌 알고 이렇게 적시에 여관을 다 보여 주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다들 그 여관을 보니 힘이 나는 듯했다.
점심때부터 줄곧 걷기만 했으니 많이 피곤했던 것이다.
“잘됐어요. 우리 얼른 가도록 해요. 가서 좀 씻고 또 저녁을 들기로 해요.”
리렌시아는 세 사람에게 얼른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빨리요, 빨리……!”
그녀는 걸음을 빨리해 앞에서 걷고 있던 베스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마치 매미가 고목나무에 매달린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대장님! 빨리요.”
“알았어. 알았으니 팔은 그만 잡아당겨라.”
베스렐은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리렌시아의 손길에, 할 수 없는지 걸음을 좀 빠르게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여관 입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쏴아아아아아―
우르르르릉.
베스렐 일행이 여관으로 들어간 뒤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퍼붓듯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듯했다.
작은 불빛을 내비치고 있는 여관.
여관의 이름은 라이란 쉼터였고 근처에 다른 여관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몇 개의 상가 건물들이 보였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대부분이 일찍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물론 날이 이렇다 보니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들어갔군.”
“예.”
여관 근처의 상가 건물들 중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던 한 잡화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불이 켜져 있는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그들은 바로 모니스 상단을 통해 잠입했던 어쌔신들이었다.
대륙에 단 2명뿐인 더블 S급의 어쌔신이자 회색의 암살자란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타산그론. 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으음. 5써클의 마법사가 검술 실력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니, 정말 대단해.”
“예, 저도 놀랐습니다. 하나를 높은 경지로 이루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검술 실력도 벌써 소드 익스퍼트의 중급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말이에요. 잘하면 나중에 크게 될 수도 있었을 녀석인데 안됐지만 오늘 이후로 더 이상 볼 수는 없겠군요.”
한 달이 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베스렐의 모든 걸 조사했다. 이곳 갈루안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서 필요한 자료들은 대부분 전해 받았고 또한 그들 스스로도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일이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쉽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영주란 자가 주변의 다른 영지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검술 실력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조사한 내용으로는 소드 오러를 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좀 더 신중히 일을 진행시킬 필요가 있었다.
기사 수준에 이른 자는 일반 사람들이나 마법사들에 비해 이목이 매우 영민하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목숨의 위기에 그들 기사들은 대처하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다. 당연히 어쌔신들은 검술 실력이 높은 기사들을 암습할 때에는 신중하면서도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게 되어 있었다.
“흐음…….”
타산그론은 시선을 돌려 베스렐 일행이 들어간 여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방금 전 들어간 베스렐을 생각해 보았다. 곰같이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던 열여덟 살의 어린 청년.
“베스렐 갈루안스…….”
그의 입에서 목표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왠지 그에게서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필살의 기세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뭔가가 빠져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침착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타산그론 님?”
S급 어쌔신이 타산크론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타산그론이 조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막상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마음이 조금 불안한데?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왜 이런 거지?”
방금 전 그는 목표물을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살기를 끌어올려 그 커다란 목표물을 죽이는 과정을 차분히 밟아 나갔다. 그러자 그때부터 웬일인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필살의 의지를 나타내자 마음이 거부를 하다니…….
“혹시 어딘가 몸이 좋지 않은 곳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니네. 몸은 언제나처럼 최상이야. 이건 으음…… 정말 모르겠군. 나도 이제는 다 된 건가? 마음속 살기가 갑자기 흔들리다니…….”
타산그론은 두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음이란 것은 그 자신이 어찌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않은가. 의지가 강하면 마음은 주변 환경과는 상관없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의지를 한번 강하게 일으켜 보았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흔들리는 마음이다. 다시 한 번 강하게 의지를 일으켜 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흔들리던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음, 됐군.”
타산그론이 안심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타산그론 님?”
“뭐 괜찮고 말고 할 것 없네. 잠시 전의 일은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니. 이번 살행이 너무 간만에 나서는 것이다 보니 잠시 내가 어떻게 됐던 모양이야.”
그는 스스로에게 납득의 말을 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베스렐 일행이 들어간 여관을 바라보았다.
칙칙하게 가라앉은 두 눈.
그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의 2년 만에 다시 나서는 살행이니 오늘 밤은 좀 더 확실히 끝낼 수 있도록 해야겠군.”
그는 지금 마음을 확실히 다잡은 상태였다.
상대가 누구든, 설령 검술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라 하더라도 지금 그의 절대필살의 의지 앞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

어두운 객실.
이미 날은 한밤중을 넘어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바깥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세상은 조용히 잠이 든 상태였다. 여관에 투숙 중인 사람들도 세상과 함께 마찬가지로 잠이 든 상태였다.
다만 이곳 어두운 객실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만은 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새벽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침상 옆의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베스렐.
녀석은 지금 2시간째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고루불사마공의 법문에 따라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살을 뺄 수 있고 또한 강해질 수 있으니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고루불사마공에 전심전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인지 고루불사마공에 심혈을 쏟던 녀석의 입가에 갑자기 미소가 어렸다.
씨익.
섬뜩한 느낌의 그 미소.
“흐흐흐흐, 드디어 나타났구나.”


<『헬 블레이드』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