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강철의 기사들 1권
강철의 기사들 1권(1화)
Dum spiro spero
내가 숨 쉬는 한, 나는 꿈을 꾼다.
Prologue.
홀 안은 난장판이었다. 곳곳에 오크와 놀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반쯤 썩은 시체의 내음과 혈향이 코끝을 찔렀다.
입구에 선 여인은 숨이 막힌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스런 얼굴로 홀 중앙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모습은 꽤나 특이했다. 짙은 갈색 중절모 아래로는 검은 머리칼이 길게 흘러내려 어깨를 스쳤고, 역시 세트인 양 갖춰 입은 조끼와 가죽 바지에는 여기저기 해서 작은 주머니가 열 개도 넘게 매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 뒤쪽에는 채찍이 하나, 양 허리춤에는 각각 하나씩 단검이 둘, 왼쪽 엉덩이 쪽에는 표창을 연상케 하는 짧은 투척용 나이프들을 줄줄이 매달아 두었다.
남자는 엘프 특유의 긴 귀를 쫑긋거리며 돌아섰다.
“재미있군.”
영리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꺼낸 남자의 말에 여자는 퍽이나 그렇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남자에게 다가섰다.
남자 못지않게 여자의 겉모습도 특이했다.
머리끝까지 눌러쓴 베이지색 로브 사이로 살짝 흘러내린 머리칼은 새하얀 순백이었고, 남자를 바라보는 양 눈동자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각기 색을 달리하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물었다.
“어떤 게 느껴지지?”
“네?”
“이 현장을 보고 알게 된 걸 다 말해 봐.”
꽤나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여자는 또 한 번 되묻는 대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가 이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에… 음… 일단… 못해도 청동의 시대… 아니, 영웅의 시대의 유물 같네요.”
반경 30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홀 안에는 기둥 하나 없었다. 거기다 벽과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현대, 소위 말하는 철의 시대에는 재현 불가능한 과거의 유물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음, 대규모 난전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숫자는 엇비슷?”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삼십 구 이상이었다. 거기다 홀 곳곳에 고루고루 나자빠져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비슷한 숫자의 적과 난전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대답에 남자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자는 맞았지만 후자는 완전히 틀렸어.”
“틀렸다니요?”
“이건 난전이 아니야.”
남자는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다시금 시신들을 돌아보았다.
“시안Xian, 너도 무도를 수련하는 몸이라면 좀 더 동선에 대해 주의 깊게 보도록 해. 이건 난전이 아냐. 다수 대 소수, 아니, 극단적으로 다 대 일의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처음에는 포위전이었지만 이내 상황이 바뀌어서 다수인 쪽이 한 명의 적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모조리 죽어 나자빠진 상황이지. 거기다 더욱 재미있는 건…….”
남자는 발치에 나자빠진 오크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놈은 가슴이 베여 죽었다. 상처로 보아 무기는 대검. 그리고 저쪽에 나자빠진 놀은 태도류의 병기에 등이 베였고, 저기 있는 고블린 친구는 아무래도 사슬낫에 당한 것 같군.”
“사슬…낫이요?”
“그래, 낫 뒤에 사슬을 달아서 쓰는 병기인데 쓰는 사람이 드문 만큼 상대하기도 더러운 무기지.”
남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저놈은 워해머에 머리가 터져 죽었고, 저놈은 장창에 배가 뚫려 죽었어.”
남자는 머릿속으로 홀 안에서 벌어졌을 살육극을 연상해 보았다. 삼십이 넘는 놀들과 오크들. 놈들에게 포위된 1인.
전투 시간은 극히 짧다. 놀들과 오크들이 절대적인 무력의 차이를 깨닫고 도주를 결심하는데 걸린 시간도 짧다.
단 한 명이 동시에 수많은 병장기를 사용해서 수십에 달하는 놀과 오크 무리를 쓰러트렸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를,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홀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것.”
홀의 끝에는 거대한 오우거가 배가 뚫린 채 죽어 있었다. 못 잡아도 5미터 이상.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일 자이언트 오우거.
배에 뚫린 상처는 컸다. 뭔가에 찔렸다기 보다는 터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일반적인 병기가 아니었다. 장창이나 대검, 사슬낫 그런 것들로 인한 상처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발리스타.
성문을 부수기 위한 공성 병기.
“아니야.”
발리스타가 아니었다. 투사 병기가 아닌 무언가. 훨씬 더 강렬한 공격. 5미터에 달하는 자이언트 오우거를 수 미터 이상 밀어내 벽에 처박을 정도의 공격.
“랜스 차징.”
“…네?”
남자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시안이 되물었지만 남자는 시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오우거의 시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홀 안이 넓긴 했지만 말을 달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설사 말을 타고 있었다고 해도 랜스 차징만으로 자이언트 오우거를 저런 식으로 밀쳐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스 차징이었다. 발리스타를 능가하는 위력을 가진 어마어마한 랜스 차징.
남자는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배와 가슴 사이에 무저갱마냥 뻥 뚫린 상처를 바라보았다.
단신으로 오크와 놀 수십을 제압한 자.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도 된 마냥 온갖 종류의 무기를 동시에 구사한 자.
그리고 파멸적이라 해도 좋을 랜스 차징.
“누굴까?”
중앙은 아니다. 그놈들은 일을 이렇게 처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
그저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1인.
남자는, 로드 발터는 웃었다.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누구냐, 넌?”
Chapter 1.(1)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다섯 가지가 존재했다.
북의 레스베리아, 남의 트롬본, 동의 호른, 서의 튜바, 중앙의 아발론.
레스베리아는 다섯 가운데 가장 거대했고 사방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군사력을 가졌다.
트롬본은 사방의 국가들 가운데 가장 풍족한 수확을 거두는 나라였으며, 영토가 넓다하나 그 대부분이 쓸모없는 땅인 레스베리아와 달리 모든 영토에 사람이 가득하여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였다.
서의 튜바는 숲과 초원이 연이어진 녹색의 대지였으며, 그 주인 된 자는 인간이 아닌 청동의 시대의 산물인 오크들이었다. 레스베리아와 트롬본은 수세기에 걸쳐 튜바의 초원을 노렸으나, 그린 드래곤 에일렌이 수호하는 튜바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의 호른은 일찍이 바다를 제압한 강력한 해상 국가였다.
중앙의 아발론은 영웅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국가이니 가히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중앙의 서력으로 1012년.
북의 레스베리아는 국왕 아이단 레지세이어와 왕세자 레온 레지세이어의 연이은 사망을 기점으로 제2왕자 칼 레지세이어와 제3왕자 존 레지세이어 간의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
“비가 오려나.”
레스베리아 남서쪽에 위치한 아벤트 영지의 경비병 한스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국왕이 죽었네, 왕세자가 죽었네, 내전이 벌어졌네라며 난리라지만 그건 수도를 비롯한 주요 영지들의 이야기였지 레스베리아 구석에 자리한 아벤트 영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네 곳의 마을로 이루어진 척박한 시골 영지는 그런 일들에 연관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었다.
‘교대하기 전까지는 비가 안 왔으면 좋겠는데.’
한 달에 한번 오는 행상 외에는 딱히 찾는 이도 없는 아벤트 영지였지만 그렇다고 영지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을 그냥 열어 둘 수도 없었다.
2인 1조로 아침에서 저녁까지 하루에 3교대로 다리 앞에 지어 둔 관문을 지킨다. 같이 온 놈이 프랭키나 버밀이었다면 이래저래 이야기라도 하며 시간을 죽일 터였지만 오늘같이 나온 녀석은 말 없기로 소문난 카이였다.
오늘도 나눈 대화라고는 밥 먹었냐를 포함해서 다섯 마디 정도이려나. 그러니 그저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스.”
“응?”
돌연 들려온 부름에 한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관문 반대편에 서 있던 카이가 길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온다.”
“응?”
“누가 오고 있다.”
그제야 한스는 카이가 말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이의 말마따나 저만치 멀리서 말 탄 남자 하나가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한스는 창을 고쳐 쥐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말 탄 남자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말 자체는 평범했다. 가장 흔하다면 흔할 갈색 털을 가진 준마라고 하기엔 다소 모자란 듯한, 마시장에서 적당히 살 수 있는 평범한 말이랄까. 하지만 타고 있는 자는 달랐다.
흉부와 왼팔에는 부분 갑주를 걸쳤고 등 뒤에는 장창을 찼다. 뿐만 아니라 양 허리춤에는 각기 길이가 다른 장검을 찼고, 그것도 모자라서 말안장에도 여벌 검과 단검 십여 개를 매달고 있었다. 망토에 달린 거무튀튀한 후드를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고, 오른팔에는 웬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는 폼이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용병… 인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한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예로부터 용병이란 거칠고 난폭하며 흉악한 존재들의 대명사라 할 수 있었다.
죽고 죽이는 걸 생업으로 삼는 자들이니 오죽하겠는가. 워낙 전란과는 거리가 먼 아벤트 영지에 사느라 용병은 몇 보지 못했지만 지금껏 한스가 보아 온 용병들은 죄다 강간마, 살인범, 무장 강도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자들이었다.
‘근방에서 넘어온 건가…….’
내전이 한창이니 근래에 용병에 대한 수요는 꽤나 높았다. 큰 시장이 있다는 홀멘 쪽에서 건너온 놈일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출입을 막아야지. 그냥 들이기엔 무장이 너무 많아.”
당장에 보이는 것만 해도 저 정도인데 숨기고 있는 무기는 얼마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그럼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한스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카이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일단 문부터 닫자.”
관문은 석조 다리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었다. 비록 나무로 만든 관문이었지만 용병 하나가 부수고 자시고 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한스와 카이가 서둘러 관문을 폐쇄하고 나니 말 탄 남자는 어느새 석조 다리 근방에 다다랐다.
가까이서 보니 흉악함이 더 했다. 방금 전쟁터에서 뛰쳐나온 듯한 느낌이랄까? 어림짐작으로 남자라 추정했던 것인데 덩치를 보아하니 남자가 분명했다.
“무슨 용무요?”
바짝 긴장한 한스를 대신해 카이가 물었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여유롭게 말을 멈춰 세운 뒤 관문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이군.”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목소리가 의외로 젊었다. 남자는 왠지 흥겨운 듯한 동작으로 관문 위에 선 카이와 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근처에 기사는 있나? 아니, 일단 날 알아볼 만한 기사인지 확인부터 해야 하니… 현재 아벤트에 상주하고 있는 기사들 이름을 좀 알려 줘.”
거침없는 하대에 생뚱맞은 이야기였던 터라 한스와 카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의외로 신분이 높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그저 공갈을 치고 있는 사기꾼일까.
한스는 안절부절하다가 카이를 쳐다보았고 카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중무장이란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과한 무장. 관문. 기사들의 이름을 알려 줄 것을 요구하는 남자.
그런데 그때였을까.
“…카이?”
남자가 돌연 카이의 이름을 불렀다.
한스는 깜짝 놀라 남자를 돌아보았고, 카이 역시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하핫, 놀라는 얼굴을 보니 카이가 맞군.”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은 남자는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귀밑까지 기른 머리칼은 검정이었고 웃고 있는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방금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상처 하나 없는 하얗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제 이십대 초반이나 됨직했다.
“자, 알아보겠나?”
남자는 씩 웃었고 카이는 잠시 멀뚱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억 소리를 토하며 말했다.
“도, 도련님?!”
아벤트 영지의 소영주, 7년 전 집을 나선 탕아.
“오랜만이야.”
남자, 티르 아벤트는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