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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2화)
Chapter 1.(2)
헐떡이며 달려 나간 카이의 뒤를 따라 천천히 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마을 입구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서 있었다.
“게덴.”
“정말 도련님이시군요.”
티르를 맞이한 것은 티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벤트 영지를 지키고 있던 기사 게덴이었다. 중년을 훌쩍 넘겼건만 그 체구며 자세는 여전히 당당했다.
“자네는 여전히 현역이군.”
티르가 씩 웃으며 말하자 게덴 역시 빙긋 웃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티르와 게덴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마을을 가로질렀다.
아벤트 영지에는 총 4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 티르가 있는 곳은 그중 가장 외곽에 있는 마을이었다.
영주의 관저가 있는 가장 큰 마을은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야 했다.
“아버님과 율리아는 잘 지내나? 율리아도 이제 시집 갈 나이가 다 됐겠군.”
게덴 이상으로 정정할 게 분명한 아버지와 오빠오빠 거리며 쫓아다니던 조막만 한 여동생을 떠올리니 티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율리아는 이제 숙녀가 다 되었겠지.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던 티르는 게덴에게서 한참이나 답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게덴?”
게덴은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어두운 표정으로 티르를 바라보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
“함께 가 보실 곳이 있습니다.”
아벤트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낯익은 묘비 하나와 낯선 묘비 하나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낯익은 묘비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낯선 묘비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티르는 낯선 묘비 앞에 섰다. 가만히 손을 뻗어 묘비를 쓰다듬었다.
“…유언이 뭐였지?”
“유언장… 말씀이십니까?”
등 뒤를 향한 물음에 게덴이 조심스레 되묻자 티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비를 바라보며 마저 말했다.
“아니, 말 그대로 유언. 최후에 남기신 말.”
“…이것으로 충분하다.”
“과연, 아버지다우시군.”
티르는 작게나마 웃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묘비에 목례했다. 그런 유언이라면 괜찮았다. 아버지는 허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으니까. 정말로 만족하셨던 것이겠지.
“언제… 돌아가신 거지?”
“이제 반년 되었습니다.”
“그런가…….”
게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어째서 반년만 일찍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책망 같은 것은 섞이지 않았다.
티르는 숨을 길게 토했다. 반년. 반년 전의 자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되새기는 것은 티르의 취향이 아니었다. 티르는 게덴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지금은 율리아가 영주 대행을 맡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여자가 영주가 못될 것은 없었지만 율리아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영주직을 정식으로 물려받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이거… 반겨 주려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티르는 장자였고, 아벤트 영지의 대를 이을 정통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율리아가 영주직을 뺏기기 싫다며 티르 자신을 박대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1번은 문전박대한다. 2번은 끌어안고 운다. 3번은 1번과 2번의 중간쯤. 게덴 생각엔 몇 번일 것 같아?”
조금은 가벼운 물음에 게덴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작게나마 웃었다.
“아마 4번일 것 같군요.”
“4번?”
짜악―!
통쾌하다면 통쾌할 소리가 시원스레 울려 퍼졌다.
“어딜 가서 뭘 하다 온 거야! 이 바보 멍청아!”
손은 매웠고 목소리는 고왔다. 티르는 맞은 뺨을 부여잡거나 마주 욕을 하는 대신 눈앞의 처녀를, 관저 대문 앞에 선 자신의 동생 율리아 아벤트를 바라보았다.
“건강하구나.”
“뭐, 뭐가 어째?!”
“그리고 미인이네.”
티르는 씩 웃었다. 이제 열일곱인 율리아는 티르의 상상 그대로 완연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 안에 담긴 어머니를 닮은 눈동자는 녹색으로 빛났고, 아버지를 닮은 백금발은 햇살 아래 반짝였다.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쉰 율리아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티르를 올려다보았다. 티르는 그런 여동생에게 가볍게 양팔을 벌리며 물었다.
“안아 봐도 되겠니?”
율리아는 굳이 답하는 대신 티르의 품에 안겼다. 작고 가냘픈 동생의 몸을 꼭 끌어안으며 티르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생 많았다.”
“…흥!”
티르를 슬쩍 밀쳐 낸 율리아는 얼른 손을 올려 저도 모르게 살짝 흘린 눈물을 닦았다. 조금은 발개진 얼굴을 감추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 준비시켰으니까 일단은 씻고 옷 갈아입어. 무슨 용병 나부랭이도 아니고 꼴이 그게 뭐야? 씻고 나선 밥 먹을 거고,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을 테니까 말할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
“그래.”
아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에 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율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율리아는 씩씩거렸지만 굳이 그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벤트 영지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았다.
땅이 워낙에 척박하다 보니 열심히 노력하는 것에 비해 남는 게 그다지 없을 뿐이지 그럭저럭 먹고살기에는 충분했다.
‘목욕탕도 이 정도면 나쁠 것 없지.’
목욕탕이라고 해 봐야 커다란 나무통에 뜨거운 물을 채운 정도였지만 그거야 어딜 가든 마찬가지였으니까.
돈 꽤나 번다는 영지의 영주라고 해도 기껏해야 나무통의 디자인이나 재질이 좀 고급스러워질 뿐이었다.
‘시중드는 사람이야 거추장스러울 뿐이고.’
그런 거 둘 여유가 있어도 둘 생각이 없는 티르였다. 목욕이란 자고로 조용한 곳에서 홀로 해야 하는 법.
티르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수증기가 찬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라져서 없는 옛 상처들이 간지러웠다. 알몸이 된 순간에조차 풀 수 없는 오른팔의 쇠사슬은 오늘 따라 티르의 오른팔을 더욱 옥죄어 왔다.
이런 때면 꼭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가?’
시작.
검은 쇠사슬이 오른팔에 감긴 이후부터 알게 된 무언가. 얻게 된 무언가.
목소리가 원하는 것. 목소리들이 말하는 것.
“시작하고 말고 할 거 없어.”
티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의 목소리에 길게 답하는 대신 잠을 청했다.
***
식사 자체도 소박하다면 소박했다. 커다란 석조 테이블에는 게덴과 율리아, 티르만이 자리했고 시중드는 하녀들도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엔 모두 물러갔다. 테이블 위에는 스프와 훈제 돼지고기와 빵과 구운 옥수수 등이 한 번에 올라왔다.
시골 영지의 영주가 먹는 식사인데 음식이 순서대로 나오면 그것도 이상하리라.
스프를 한두 숟가락 떠먹은 티르는 피식피식 웃으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흐음.”
“뭐가?”
훈훈하다면 훈훈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째 기분 나쁜 시선에 율리아가 따지고 들자 티르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다소 건달 같은 태도긴 해도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정말 예뻐져서. 예쁘다, 너.”
태연히 쏟아 낸 뻔뻔한 말에 율리아는 사레라도 든 마냥 켁켁거렸다. 나무 컵에 담긴 포도주를 한껏 삼킨 뒤에 흥하고 콧바람을 내쉬었다.
“아부한다고 달라질 거 없거든?”
티르는 그저 빙글빙글 웃더니 이내 입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조금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영주 대행을 맡고 있다며.”
“일단은.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여자작이 되었을 거야.”
레스베리아에 여자 영주는 흔하지는 않지만 귀하지도 않았다. 200여 년 전에 사자의 여왕 레오나 레지세이어가 탄생한 이래 여자가 작위를 물려받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많지는 않지만 요즘엔 여기사들도 꽤 있었으니까.
티르의 기억 속의 율리아는 영리한 아이였고, 지금 눈앞의 율리아는 거기에 당차기까지 했다.
“어울리는데? 그냥 물려받지 그래?”
“오빠!”
버럭 소리를 지른 율리아는 잠시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입술을 살짝 삐쭉이며 말했다.
“하긴, 난 오빠에 대해 모르니까. 영 아니다 싶으면 정말 그냥 내가 물려받을 거야.”
거기까지 말한 율리아는 다시 한 번 포도주를 들이켰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짐짓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어떻게 살았어?”
“어떻게 살았냐니?”
“집 나가고 7년 동안 뭐했냐고.”
“그냥… 용병 일도 하고 이것저것?”
“용…병?”
“뭐니, 그 벌레 보는 것 같은 눈은.”
용병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거야 익히 알고 있는 거지만 그래도 저렇게 쳐다볼 것은 뭐람.
율리아는 피식 웃더니 좀 더 이것저것을 물었고, 티르는 대충대충 둘러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두 시간이 흘렀을까.
“잠들었네.”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율리아를 바라보며 티르는 포도주 잔을 채웠다.
여태까지 조용히 남매의 대화를 경청하던 게덴은 마주 잔을 채우며 말했다.
“도련님을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그런 것 같네.”
티르는 포도주를 들이켰다. 영지에서 직접 담근 포도주는 고급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투박하고 솔직한 맛이 입에 맞았다.
티르는 게덴을 돌아보았다. 율리아도 잠들었으니 본론이라 할 수 있을 물음을 던졌다.
“레스베리아는 내전 상태라고 들었는데 영지에 별 영향은 없나?”
국왕과 왕세자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된 제2왕자와 제3왕자 간의 내전.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이미 작은 국지전이라면 몇 번이고 일어났다. 아무리 아벤트 영지가 레스베리아 구석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영향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외국에… 계셨습니까?”
“응, 여기저기 다녔지……. 이번엔 호른에서 넘어온 거고.”
군사강국 레스베리아의 내전은 세계 어디를 가든 화제가 될 정도로 커다란 일이었다. 더욱이 이번에 죽은 왕세자와 내전을 벌이고 있는 제2, 제3왕자는 그 어미가 달랐으니 소문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에서는 갖가지 음모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유력한 음모론은 제2왕자와 제3왕자가 작당하고 국왕과 왕세자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다. 호사가들은 왕세자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레오나 레지세이어 공주가 왕궁을 거의 탈출하다시피 도망쳐 은둔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떠들어댔다.
게덴은 말을 고르듯 한참을 지체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좀 더 여독을 푸신 후에 말씀드리려 했지만… 사실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문제지?”
“튀링겐 자작… 기억하십니까?”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지. 이 옆 영지잖아. 근데 튀링겐 자작이 왜?”
아벤트 영지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잘사는 튀링겐 영지. 아벤트 영지와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이웃.
게덴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자가 아벤트 영지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너무나 간단했다.
중앙의 내전으로 인해 변방의 통제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이에 딴 맘을 품은 지방의 영주들이 기회는 이때다 하고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라면 함부로 영지전을 벌이는 일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제2왕자와 제3왕자가 팽팽하게 세력전을 펼치고 있는 마당이니 지방에서 되는 대로 힘을 키운 뒤 어느 한쪽의 줄을 타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레스베리아 지방 곳곳에서는 영지전이 연이어졌고, 튀링겐 자작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게 우리 아벤트 영지라 이건가.”
튀링겐과 아벤트 영지는 이웃이었다. 아벤트 영지가 딱히 잘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못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먹는 게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테고 어째 넘보기도 만만해 보이고. 어린애들 싸움 같은 이야기였지만 결국엔 그게 그거였다.
튀링겐 자작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야 파울 튀링겐이었다. 수도에 있는 기사 양성소를 나왔다는데 듣자 하니 꽤나 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소문에 따르면 적당히 잘나고 잘생긴 튀링겐 자작의 아들 파울 튀링겐 경은 무턱대고 전투를 벌이는 대신 두 달 전에 아벤트 영지의 율리아 앞으로 서신을 한 장 띄웠다.
우리 결혼합시다.
영주는 죽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은 이제 겨우 열일곱 살 먹은 어린 여자애였다. 아무리 만만해도 전투가 벌어지면 일단 사람이 꽤나 죽을 것이고 돈도 만만찮게 들어갈 터니까. 거기다 율리아는 미인이었다.
파울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고, 율리아 입장에서도 어떻게 보면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튀링겐 영지에게 복속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파울이 이미 첩이 셋이나 딸린 놈이라거나 그 밖의 여러 문제들을 제한다면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한계다 싶은 시점에 티르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나절, 말짱한 얼굴을 하고 식탁을 나란히 한 율리아에게 티르가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넌 결혼 생각 있니? 그 파울이란 놈하고.”
“없어.”
“단호하구나.”
율리아는 거기서 뭐라 더 말하는 대신 누군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슈나이더!”
부름에 응하듯 청년 하나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전형적인 기사의 평상복 차림을 한 금발 머리 청년은 티르 앞에 가만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슈나이더 시엘리안이 영주님을 뵙습니다.”
티르는 뭐라 답하는 대신 슈나이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율리아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내 애인이야.”
티르는 다시 슈나이더를 돌아보았다. 조각상 같은 얼굴이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거야 원.”
킥하고 웃은 티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예를 표하고 있는 슈나이더를 내려다보았다.
“좋아. 기사 슈나이더.”
“예, 영주님.”
“내 동생 사랑하나?”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슈나이더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어지간한 율리아조차도 얼굴을 붉혔다. 슈나이더는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이내 단호한 얼굴로 티르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합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티르는 먹다 남긴 빵을 물어뜯었다. 영지를 지킬 생각은 있었지만 사랑의 수호자가 될 생각은 없었는데.
“기사 슈나이더, 지금 당장 영지의 기사와 가신들을 불러 모아라. 아마 나한테 인사하러 다들 모이고 있을 테니 식사 마치기 전까지는 되겠지?”
“예!”
기사답게 답한 슈나이더는 식당 밖으로 나섰다. 티르는 빵을 한 점 더 물어뜯은 뒤 조금은 멍한 얼굴로 앉은 율리아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영지 시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