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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3화)
Chapter 1.(3)


***

아벤트 영지는 작았고 그래서 기사와 가신들의 숫자 역시 적었다.
기사는 모두 다섯, 가신의 수는 둘.
기사 중에 티르가 예전부터 알던 얼굴은 셋이었다. 게덴과 게덴의 후배격인 기사 로뎅, 기사 로뎅의 아들 기사 노드.
기사 슈나이더는 방금 보았고, 남은 하나를 돌아본 티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에이다?”
티르의 물음에 빨간 머리의 여기사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영주님. 기사 게덴의 딸 기사 에이다입니다.”
게덴이 서른이 다 넘어서야 겨우 낳은 외동딸은 율리아보다 딱 한 살이 많아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율리아와 함께 오빠, 오빠하고 쫓아다니던 꼬맹이를 떠올린 티르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게덴, 우격다짐으로 기사 서임을 받게 한 것은 아니겠지?”
조금은 넉넉한 평상복을 입어 확연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에이다의 몸은 전형적인 여자의 몸매였다.
여기사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장형 근육이라고 가진 것이 아니라면 저런 가느다란 몸으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티르의 물음에 게덴이 답할 것도 없이 에이다가 어깨를 활짝 피며 답했다.
“한 사람 몫은 충분합니다.”
“그래, 아버지가 정 때문에 휙휙 기사 작위를 내리지는 않으셨겠지.”
티르는 남은 가신 둘을 돌아보았다. 하나는 게덴과 마찬가지로 티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벤트 영지의 살림을 맡아온 뮬러였다.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 중늙은이가 다 된 뮬러가 티르의 시선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뮬러의 후임으로 내정된 뮬러의 아들 더크였다.
“뮬러와 더크는 회계장부를 정리해서 준비하고 있도록. 영지를 시찰하고 난 뒤에 살펴보겠다.”
“예, 영주님.”
뮬러와 더크는 공손히 답했고 티르는 이내 게덴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병력부터 살펴보도록 하지. 다 모아두었나?”
“예, 연병장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좋아, 가 보도록 하지.”

내전이 시작된 것도 벌써 1년이 다 되었다. 이래저래 시기가 어지럽다 보니 아벤트 같은 군소 영지들도 군사 훈련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연병장은 마을 밖 공터에 차려져 있었다. 도열해 있는 병사의 수는 모두 오십여 명. 아벤트 영지의 총 인구수가 육천 명 정도니 전문적인 전투 병력이 이 정도면 준수한 숫자였다.
“초소에 나가 있는 인원 8명을 제외한 52명 전원입니다.”
“편제는 어떻게 되지?”
“10명씩 1개 분대로 보병이 3개 분대입니다. 나머지 20명은 궁병이고 기병이 10명입니다.”
일반 보병과 달리 궁병은 꽤나 오랜 훈련 기간이 필요한 전문 병종이었다.
영지민들을 급히 징발해 만들 수 있는 병력은 보병뿐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꽤나 오래전부터 영지전을 대비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게덴을 비롯한 기사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을 시켰는지 병사들의 상태는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애당초 이런 변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병사를 길러 낼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그건 튀링겐 쪽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제까지의 훈련 내용을 하나하나 전해들은 티르는 기사들을 동반한 채 마을 네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티르의 아버지는 동화 속에나 나옴직한 소박한 영주였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병력을 기르기 위해 세금이 다소 오르긴 했으나, 세계를 돌아다니며 별의별 곳을 다 둘러본 티르가 보기에 아벤트 영지의 세율은 충분히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민들의 영양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고, 티르나 기사들을 대하는 얼굴 역시 밝은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티르가 찾은 곳은 아벤트 령의 입구라 할 수 있을 석조 다리 앞이었다.
“성 같은 게 없으니 수비만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여기가 최선이겠군.”
돌로 만든 다리는 대여섯 명이 한 번에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긴 했지만 전투를 상정해 놓고 보자면 그렇게까지 넓은 것은 아니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은 말을 타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깊이긴 했지만 수비하는 측을 무시하고 넘기에는 무리라 할 정도로 충분히 깊었다.
티르는 한참 동안 다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관저로 돌아갔다.

티르에게 회계장부를 들고 온 것은 안경을 쓴 율리아였다. 티르가 조금 놀란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자 율리아는 새삼스레 뭘 그러냐는 듯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말했다.
“수놓고 남는 시간에 재무 쪽 공부를 좀 한 것뿐이야. 난 오빠가 복식 부기를 할 줄 안다는 게 더 놀라운데?”
“뭐, 나야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티르는 율리아와 함께 장부를 점검하였다.
“역시나 부자는 아니구나.”
부자는커녕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손익분기점 위를 살짝 스치는 듯한 느낌이랄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갑자기 지하자원이 발견되었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여기저기 파 보고 조사해 봤는데 그런 거 없어.”
“잔인한 현실이구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비축된 식량도 제법 있었고, 이제 막 추수가 끝난지라 적어도 지금 당장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튀링겐 쪽의 전력은 어떻게 되지?”
물음에 슈나이더가 그 단정한 얼굴에 어울리는 멋진 목소리로 답했다.
“명확하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보병이 오백에 기병이 오십 정도로 여겨집니다.”
“우리보다 별로 크지도 않으면서 바리바리 긁어모았구만. 우리도 총동원하면 어쩌려나?”
애당초 전문적인 전투 병력을 수백 수천씩 유지하는 영지는 드물었다. 전투에 있어 대부분을 차지하는 병력은 급하게 징발된 영민들이었다.
“보병만이라면 저희도 어떻게든 삼백까지는 꾸릴 수 있습니다.”
“기병이나 궁병은 당연히 무리겠군.”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네 잘못인가. 어쩔 수 없는 거지 그거야.”
티르는 가볍게 답했지만 문제가 그렇게 녹록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성도 없으니 아무리 다리를 끼고 싸운다 해도 전면전이 벌어지면 이래저래 밀릴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 역시 잘은 몰라도 그 점이 걱정되는지 조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이걸로… 괜찮겠어?”
사실 싸울 것도 없이 율리아가 파울이란 놈한테 시집가면 문제가 간단해질 수도 있었다. 예전과 달리 티르가 있으니 튀링겐 쪽도 완전 복속보다는 어느 정도의 지배권에 만족할 수도 있었다.
결혼을 통해 흡수되는 거니 일단은 남 보기에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형태이기도 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못해도 수십 명씩 죽어 나갈 터이니 율리아가 저리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율리아, 한 가지 명확하게 해 둘 것이 있는데.”
티르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이 묻으며 말했다.
“이 전투는 비단 너 하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벤트 영지를 지키는 거지.”
튀링겐 자작이 일단 일을 벌인 이상 아벤트 영지 하나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튀링겐 영지의 세금은 아벤트보다 훨씬 무거웠고 그랬기에 영지민들 역시 튀링겐에 복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지배자가 누가 되든 부림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똑같아!’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편차가 있는 법이었다.
“어찌 되었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7년 동안 여기저기 안 굴러 본 데가 없는 내가 보장하건데 객관적으로 봐도 충분히 할 만한 싸움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꼬리를 살짝 흐린 티르는 이내 피식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쇠사슬을 감지 않은 왼팔을 들어 율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습관처럼 볼을 살짝 꼬집었다.
율리아, 아벤트 영지.
튀링겐 자작이 병력을 백이고 천이고 끌고 와도 상관없었다.
티르는 자세를 낮추었다. 여동생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엄청나게 강하니까.”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고 티르는 빙긋 미소 지었다.

***

티르가 아벤트 영지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날 튀링겐 령으로부터 새로운 서신이 도착했다. 아예 티르 앞으로 보내온 것으로 보아 그래도 꽤나 이쪽 사정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신은 이해하기 쉬웠다. 이리저리 말을 포장하긴 했지만 각종 수식 어구를 빼고 액면만 읽으면 결론은 간단했다.
일주일을 줄 테니 결정해라. 파울과 결혼하고 지참금으로 아벤트 영지를 넘길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짓밟힌 후 아벤트 영지를 넘길 것인지.
후자의 경우 티르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하겠다는 추신도 짤막하게 붙어 있었다.
“하긴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애송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티르는 긴말 할 것 없이 서신을 화로에 던져 넣어 태워 버렸다. 당황한 전령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얌전히 튀링겐 영지에 처박혀 있으면 목숨만은 보장해 주겠지만, 만약에라도 쳐들어오면 튀링겐 자작과 그 아들 파울 튀링겐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똑똑히 전해 주도록.”
전령은 씩씩거리며 돌아갔고 티르는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많이들 걱정되나 보군.”
어차피 싸우기로 결정되었지만 티르가 전령을 대하는 태도가 강렬하기는 했다. 더욱이 객관적인 전력은 훨씬 열세였으니까. 기사가 다섯이긴 해도 여기서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해 본 것은 게덴과 로뎅이 전부였다.
티르는 볼을 살짝 긁적이며 게덴에게 물었다.
“우리가 추정하고 있는 놈들의 병력은 보병 오백에 기병 오십이지?”
“예, 그렇습니다만……?”
명확한 수치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오차 범위가 그다지 크지는 않을 터였다. 이웃하고서 수십 년을 넘게 살아온 영지이다 보니 서로의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야 할까.
“그런 것 치고는 저쪽도 너무 강경하군.”
“무슨… 말씀이신지?”
“전령이 전해 온 서신. 굉장한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어. 패배 따윈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듯한… 아니, 아예 자기들이 피해를 보는 일조차 없다는 느낌? 거기다 묘하게 결혼을 통한 화친보다는 전투를 더 원하는 듯한 냄새도 났고.”
뭔가가 있었다. 단순한 병력차를 넘어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할 만한 무언가가.
“설마…….”
“예?”
“아니, 그건 말도 안 되지. 튀링겐 령에 갑자기 금맥이라도 하나 생기지 않는 한.”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한 티르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간단한 전달 사항을 전한 뒤 회의를 파하였다.

사 일 뒤에 새로운 서신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미사여구 없이 간결한 문장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튀링겐 군 출진.

짤막한 문장을 읽은 티르는 피식 웃었다. 파울이라는 작자는 수도에서 공부했다더니 겉멋이 잔뜩 든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전령 앞에서 서신을 불태운 티르는 서둘러 전투 준비를 했다. 튀링겐 령과 아벤트 령이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니 모레면 전투가 시작될 터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틀 뒤, 아벤트 령과 튀링겐 령 양편의 군사들은 평원에서 서로를 마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