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강철의 기사들 1권(4화)
Chapter 1.(4)
***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완연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던 티르는 고개를 돌려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율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왔어?”
율리아가 당차다곤 해도 전투와는 거리가 먼 아가씨였다. 지금 역시 드레스 대신 그저 승마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율리아는 그런 티르의 물음에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짧게 답했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항복하려고.”
파울이란 놈이 율리아에게 목을 맨 것도 아니고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율리아가 나서서 뭐라 한들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율리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나선 것이었다. 되든 안 되든 지금 같은 상황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티르는 잠시 그런 여동생을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흐음… 슈나이더랑 같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오빠!”
악을 쓰는 율리아에게 워워 하며 손을 내저은 티르는 이번에도 율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그런 일 따윈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흥……. 그런데 어째서 다리를 버리고 평원으로 나온 거야?”
율리아의 물음은 이미 게덴을 비롯한 모두가 한 번씩 던진 물음이었다. 다리를 버리고 평원으로 나온다는 것은 아벤트 군이 이번 전투에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티르는 별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답했다.
“거긴 수비하긴 좋지만 공격하기에 나쁘니까.”
“…에?”
수비하기도 벅찬 마당에 공격이라니?
“그냥 그 정도로만 알아 둬. 네 오빠는 바보나 정신병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항복할 때 항복하더라도 일단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율리아는 말을 몰고 전장을 이탈했다. 티르는 전장을 돌아보았다.
이번 전투에 티르가 동원한 총병력은 342명. 기병은 기사들을 포함해 봐야 겨우 16기에 불과했고, 궁병은 20명이 전부였다. 그에 반해 튀링겐 령은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봐도 수가 월등히 많았다. 아마도 오백가량. 기병의 수는 예상을 훌쩍 넘어 70기는 되어 보였다.
“거의 총동원을 했구만.”
저 정도면 튀링겐 령을 지키는 병력은 거의 없을 터였다. 최대한 압도적인 힘으로 재빠르게 승리를 얻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병사들에게 전장을 경험케 하려는 것일까.
“뭐가 되었든 얕보이고 있군.”
쓰게 웃은 티르는 최전열로 말을 몰아갔다.
에이다는 궁병을 맡았고, 슈나이더는 10기의 기병을 맡았다. 로뎅과 노드는 보병들을 담당하였고, 게덴은 티르의 곁에 자리했다.
“다들 불안해 보이는군.”
티르가 던지듯 건넨 말에 게덴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이… 있으신 거라 믿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격파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소수로 다수를 제압했다는 전투들도 그 실상을 파악하면 결코 소수 대 다수의 싸움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어느 공간에서만은 반드시 소수 쪽이 다수 쪽의 전투 병력을 압도했다.
전술이라는 것은 그러한 시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
이번 전투에 있어 최적의 장소는 아벤트 령의 입구에 해당하는 다리 위였다. 하지만 티르는 그 장소를 포기하고 아벤트 령의 전 병력을 평원으로 내몰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일 터였다.
더욱이 티르는 7년 만에 돌아온 자였다. 그 능력은 미지수였고, 어쩌면 지금도 어떤 복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 무식한 생각 끝에 앞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티르도 그런 게덴 이하 가신들의 생각을 알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들에게 고마워했다. 7년 만에 돌아온 탕아를 믿고 이렇게까지 나서 주었으니까.
“믿어 줘서 고맙군.”
“믿어야지요.”
티르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튀링겐 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파울이란 놈이 지휘하고 있겠지?”
“그럴 겁니다.”
갈색 머리에 키가 큰 거한이라고 했다. 서신 날려댄 걸 보니 전투 시작하기 전에 분명 앞으로 튀어나와 무어라 떠들어대겠지.
뻔한 수순을 예상하며 티르는 튀링겐 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튀링겐 군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보병들은 길을 벌리듯 양옆으로 쫙 갈라섰고 기병들은 퍼레이드를 하는 마냥 각기 두 줄씩 나뉘어 그 벌어진 틈 사이에 섰다.
괴이하기까지 한 배치에 게덴은 미간을 좁혔다. 뭣 모르는 아벤트 령의 병사들 역시 의아함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언가를 관람이라도 하듯 양옆으로 갈라진 병사들. 그리고 그 벌어진 틈 사이에 도열한 기사들.
아벤트 령의 군사들은 본능적으로 그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빈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본 게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요, 용갑주?!”
크기 7미터. 영웅의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최강의 전투 병기. 게덴의 목소리에 호응이라도 하듯 튀링겐 군 사이에 선 강철의 거신은 소리 높여 포효했다.
용갑주Dragon Amor.
그 시작이 대전란의 시대라 불리는 청동의 시대였는지, 인류 존망의 결전이 치러진 영웅의 시대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저 분명한 것은 용갑주가 최강의 개인 병기라는 사실뿐이었다.
인간을 본떠 만든 강철의 거신에 일반적인 병장기는 통하지 않았다. 유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1급의 용갑주는 물론이거니와 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2, 3급의 용갑주들 역시 인력으로 대항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튀링겐 군 사이에서 포효하는 용갑주는 3급 용갑주였다. 1, 2급의 용갑주와 달리 그저 달리고 양팔을 휘두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하지 못하는 물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7미터에 달하는 강철의 거인이 휘두르는 병장기를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용갑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용갑주뿐이었다.
게덴은 이를 악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튀링겐 자작이 아무리 영민들을 쥐어짜도 저런 것을 장만할 수는 없었다.
포효하기를 마친 강철의 거신이 다시금 그 둔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튀링겐 군의 최선두로까지 치고 나가 아벤트 군을 마주하였다.
둔탁한 회색 갑주.
성문과도 같은 라지 실드.
한 번 휘두르면 병사 수십을 갈기갈기 짓찢을 것만 같은 거대한 헬버드.
파울 튀링겐이 그토록 자신 있어 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파울 튀링겐이 어째서 병력 배치를 저리하였고, 저렇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는지 역시 이해가 갔다.
파울은 쇼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튀링겐 군과 아벤트 군 양측에 용갑주의 압도적인 힘과 위용을 보여 준다.
파울이 욕심내는 것은 아벤트 영지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용갑주까지 손에 넣은 이상 더 많은 것을 바랄 테니까.
‘이길 수 없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게덴은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벤트 령에 몸을 담기 전 게덴은 꽤나 많은 전투에 참여했었다. 개중에는 용갑주들이 여럿 참여한 대규모 교전 역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이길 수 없다.
단지 이길 수 없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래서는 그저 학살이 일어날 뿐이다.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당장에라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칠 것 같은 얼굴을 한 자들도 여럿 있었다.
이래서는 싸움이 되지 않았다.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던 율리아 역시 게덴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태어나서 용갑주를 처음 보았지만 저런 괴물에게 인간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율리아는 말을 달렸다. 파울에게 항복해야만 했다. 뒷일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저 미친 전투를 막아야 했다.
쾅! 쾅! 쾅!
굉음을 울리며 파울의 용갑주가 튀링겐 군과 아벤트 군의 사이에 섰다. 헬버드를 높이 들어 올려 아벤트 군을 겨누었다.
“티르 아벤트는 들어라!”
확성기라도 설치한 듯 파울의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대가 보다시피 나는 기사. 그렇기에 나는 약자에 대한 아량과 관대함을 갖추었다. 아직 검을 맞대지 않았으니 그대의 어리석은 만용을 용서할 의향이 있다. 항복하라!”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아벤트 군에게는 고마운 말이었다. 어차피 이길 수 없었으니까. 괜한 목숨이 스러지기 전에 항복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하하하하하!”
폐부 끝에서 끌어낸 마냥 통쾌한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 데 모였다.
“여, 영주님?”
티르가 웃고 있었다. 너무나 즐겁다는 듯 신나게 웃었다.
너무 큰 충격에 영주가 미쳐 버린 걸까.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참을 껄껄거리며 웃던 티르는 이내 숨을 골랐다. 게덴을 비롯한 모두가 자신을 미친놈 보듯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용갑주.
이런 시골의 영지전에서 저런 카드를 꺼내 들 줄이야.
“차라리 잘됐어.”
잘되었다. 너무나 잘되었다.
티르는 자세를 바로 했다.
등에 차고 있던 창을 꺼내 바닥에 꽂았다. 허리춤에 메고 있던 검들을 풀어 안장에 매단 뒤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완전히 빈손이 된 상태로 파울이 그런 것마냥 아벤트 군 과 튀링겐 군 사이에 용갑주를 마주하고 섰다.
말을 달리던 율리아는 그런 오빠를 보고 멈춰 섰다. 게덴 역시 티르가 빈손으로 파울 앞에 나서는 것을 보고 현실과 치욕 사이에서 이를 악물었다.
용갑주와의 거리는 약 50여 미터.
“네가 티르 아벤트인가?”
“그렇다. 내가 티르 아벤트이다.”
티르의 목소리는 파울의 것이 뒤지지 않을 만큼 전장 전체에 넓게 퍼졌다. 압도적일 정도로 거대한 성량에 파울은 깜짝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용갑주 안에서 피식 웃은 뒤 말을 이었다.
“빈손으로 내 앞에 나선 것은 항복의 의사표시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파울의 물음에 티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삐딱하니 서서 대꾸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네게 항복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 허나 거절한다.”
“그래, 거절… 뭐?!”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파울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티르는 웃었다.
“거절한다. 네놈이 죽고 우리가 이길 테니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잠시 멍해 있던 파울은 이내 소리 높여 웃었다.
서신을 불태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겁 없는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제 보니 이건 그냥 미친놈이었다. 살려 둘 가치가 없었다. 어차피 율리아도 부인이 아니라 첩으로 맞이할 예정이니까.
용갑주가 다시금 포효했다. 당장에라도 돌진할 듯 헬버드를 바짝 뒤로 당겼다.
굉음과 함께 용갑주가 지면을 박찼다.
“오빠!”
율리아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결사적으로 말을 달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앎에도 게덴 역시 말의 배를 찼다.
용갑주와 티르 사이의 거리는 50여 미터.
전장 7미터의 용갑주에게 있어서 결코 길지 않은 거리.
티르는 쇠사슬이 감긴 오른팔을 당겼다. 검고 긴 쇠사슬 끝에 매달려 있던 검은 회중시계가 티르의 오른손에 잡혔다.
티르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헬버드를 높이 들어 올린 용갑주.
티르는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율리아.
저마다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 기사들.
자신의 심장 고동에 맞추어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필요한 것은 거창.
필요한 것은 폭발적인 돌진력.
05시의 봉인해제, 전야의 거창.
째깍거리던 시계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재구성된 칠흑의 거창이 티르의 손에 쥐어졌다.
티르는 거창을 당겼다.
파울과의 거리는 이제 30여 미터.
티르는 웃었다. 거창의 창끝을 높이한 채 지면을 박찼다.
“레스트 인 피스Rest in Peace.”
콰앙―!
지축이 울림과 동시에 티르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한줄기 검은 섬광이 되어 용갑주를 향해 쏘아지듯 나아갔다.
랜스 차징은 일점격파.
뒤를 돌아보지 않는 최강의 일격.
창끝이 용갑주의 갑주에 가 닿았다.
파울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창끝이 용갑주를 꿰뚫고 파울의 가슴에 닿았다.
파울은 그제야 비명을 질렀지만 너무 늦었다.
파울의 심장이 파괴되는 순간 용갑주가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수 톤을 상회할 거체가 거짓말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펼쳐진 광경은,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용갑주는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등 뒤를 향해 십여 미터 이상을 날아갔다. 바닥에 등을 댄 채 다시 이십여 미터 이상을 땅을 파헤치고 날아가 튀링겐 군의 코앞에서야 멈춰 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초월적인 광경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막 울음을 터트리려던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게덴은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고 에이다와 슈나이더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넋을 놓기는 튀링겐 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물론이거니와 기사들 역시 멍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진 용갑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의 한가운데에서,
티르는 고개를 들었다. 용갑주의 가슴 위에 올라탄 채 파울과 용갑주를 한 번에 꿰찬 거창을 뽑아 들었다.
다시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
티르는 튀링겐 군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피와 짐승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