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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5화)
Chapter 1.(5)


***

튀링겐 자작은 수하들과 함께 천천히 말을 몰았다. 이끌고 있는 병력은 기병 10기. 지금쯤이면 앞서 나간 아들이 아벤트 령의 항복 선언을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뒀단 말이야.”
“과연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들인 파울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괄괄한 것이 탈이었는데, 그걸 고쳐 보겠다고 수도에 보낸 것이 호재였다. 기사 학교에서 나름 인맥도 쌓고 이리도 늠름하게 자라 주었다니.
제2왕자와 제3왕자의 세력은 그야말로 호각지세이니 내전 상태는 앞으로도 꽤나 오래 지속될 터였다. 그리고 그로인해 발생한 권력의 공백기.
아벤트와 튀링겐이 자리한 일대는 예로부터 군소 영지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이번에 아벤트를 흡수한 것마냥 다른 소영지들을 하나하나 점령한다면 베스크 백작이 다스리는 홀멘이 부럽지 않은 대영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대영주라, 대영주라!”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아들놈과 용갑주가 있는 한 튀링겐 군은 무적이었다.
한참을 낄낄거린 튀링겐 자작은 양껏 어깨를 펼쳤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벤트 령이 나왔다. 튀링겐 자작령의 제1 복속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5분이나 지났을까.
“음?”
튀링겐 자작은 순간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만치 앞에서 기병 하나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복색을 보아하니 아군이었다. 아들놈이 승전보를 전하려고 전령을 보낸 것일까.
튀링겐 자작은 다시 편한 자세로 돌아가 기병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병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뭔가가 이상했다.
튀링겐 자작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 그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튀링겐 자작의 수하들이 자작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이제 겨우 목소리가 닿을 위치에까지 다가선 기병을 향해 무어라 소리를 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기병의 목이 날아갔다.
기병의 뒤를 쫓아온 무언가가 기병의 시체를 밀어내고 말 위에 올라탔다.
기수를 바꾼 채 달려오는 말.
“막아!”
누군가가 소리쳤고 순간 멍해 있었던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는 바로 앞이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였다. 그리고,
촤륵!
남자가 오른손을 흩뿌림과 동시에 쇳소리가 울렸다. 검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와 기사 하나의 목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기사들은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남자는 조금 더 다가섰고, 제2격을 흩뿌렸다.
검, 그 끝에 사슬이 부착된 검.
두 번째 기사의 목이 날아갔다. 동시에 남자가 타고 있던 말에서 도약해 기사들의 틈바구니에 그 몸을 밀어 넣었다.

03시의 봉인 해제. 달을 베는 대태도.

순백의 섬광이 번뜩였다. 2미터는 됨직한 태도가 남자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분쇄했다.
피보라가 일었다.
갑주며 말이며 무엇 하나 가릴 것 없이 찢기고 베여 허공을 난무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남자는, 티르는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로 모든 것을 살폈다.
조금 전의 참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기병이 넷. 몇 미터 앞에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튀링겐 자작.
티르는 다시 한 번 대태도를 휘두르는 대신 지면을 박찼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말 위에 탄 튀링겐 자작의 멱살을 움켜쥔 뒤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커헉!”
튀링겐 자작이 죽는 소리를 냈지만 티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피보라를 뒤집어쓴 채 우왕좌왕하는 네 기의 기병들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녹색의 눈동자로 바닥에 깔아뭉갠 튀링겐 자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시오, 튀링겐 자작. 나는 아벤트 영주 티르 아벤트요.”
티르의 말에 튀링겐 자작은 눈을 크게 떴다. 아픔도 잊고 버둥거렸다.
“네, 네놈이?”
티르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소. 그리고 잘 가시오.”
“뭐……?”
티르의 무지막지한 힘으로 바닥에 내리꽂았던 튀링겐 자작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 번 대태도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삼 일 뒤.
중앙의 서력으로 1012년, 가을.
아벤트 령은 튀링겐 령을 점령하였다.


Chapter 2.(1)


영웅의 시대.
인류의 존망이 걸린 열두 존자와의 대결전이 펼쳐진 그 시대에 동물신들은 인류를 버렸다.
기도 하나 기도를 들어줄 신들은 인간을 버렸고,
신이 없기에 기적은 없었으며,
인류는 희망을 잃었다.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

평원에서의 전투가 있고도 사 일이 지났다.
튀링겐 군의 사망자는 도합 76명이었다.
튀링겐 군의 사망자는 대다수가 기병이었다. 용갑주를 파괴한 티르가 제2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이 기사들과 기병들이기 때문이었다.
지휘자들을 잃은 보병들은 대부분 바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눈앞에서 용갑주가 종잇장처럼 날아가고 기병들의 목이 순식간에 썰려 나가는 마당에 영지민들로 조직된 군대가 전의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튀링겐 자작의 목을 벤 티르는 그대로 튀링겐 령으로 돌진, 무주공산이 된 튀링겐 령을 점령하였다.
튀링겐 군을 해산시키고 아벤트 군의 일부가 튀링겐 령에 주둔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모두 합쳐 삼 일.
상황이 워낙에 급박하게 돌아간 터라 승전을 축하할 겨를 같은 것은 없었기에 사 일째가 돼서야 아벤트 군은 작은 연회를 열어 승리를 축하했다.

“미안하다. 슈나이더를 튀링겐에 보내 놓아서.”
티르가 대뜸 건넨 말에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던 율리아는 피식 웃었다.
“됐어, 사과할 거면 아예 보내지나 말든가.”
“그 녀석이 생각보다 유능하더라고.”
“당연하지. 내 남자니까.”
“킥.”
뻔뻔한 대화에 킥킥거린 티르는 들고 있던 술잔을 한 잔 들이켰다. 율리아가 앉은 책상에 다가서며 물었다.
“뭘 읽고 있던 거야?”
“가계도.”
“…가계도?”
“응, 몇 번을 봐도 우리 집안에 천사Type Angel나 거인Type Giant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야기는 없네.”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은 율리아는 그대로 티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7년 만에 돌아온 오빠. 분명히 율리아 자신의 오빠.
율리아의 시선에 티르는 계면쩍은 얼굴로 웃었다. 하기야 용갑주를 그렇게 박살 내 놓았으니까. 어딜 어떻게 보아도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오빠.”
“응.”
율리아는 가만히 티르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닮은 녹색 눈동자. 티르가 자신의 오빠이고, 자신이 티르의 여동생이라는 증거.
“말해 줄 수 없어?”
그 힘은 대체 무엇인지. 7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안.”
티르의 대답에 율리아는 짐짓 미소를 짓더니 이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은 눈에 보이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가볍게 물었다.
“어쨌건 위험한 건 아니지? 힘을 쓸 때마다 오빠 수명이 숭컹숭컹 잘려 나간다거나?”
“어이어이, 그런 건 어디서 들었냐?”
“아니, 보통 소설책이나 전설 보면 그렇지 않나? 매사가 등가교환인 법이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티르의 대답에 율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지?”
“정말이야.”
“알았어, 일단은 믿어 볼게.”
율리아는 생긋 웃었고 티르 역시 빙긋 웃었다. 티르는 언제나처럼 손을 뻗어 율리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아주 조금이지만 율리아의 긴장과 떨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었다.
티르는 율리아를 이해했다. 그런 광경을 보았으니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고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척해 주어서. 여전히 자신을 보고 웃어 주어서.
남매는 나란히 연회장으로 향하였고, 그날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

영지를 점령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뇌부를 처단 혹은 추방하는 것은 고작해야 1단계에 불과했다.
티르는 로뎅과 노드, 뮬러와 더크를 아벤트 령에 남긴 뒤 게덴과 에이다, 슈나이더와 율리아를 튀링겐으로 데려왔다.
다행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튀링겐 자작에게는 자식이 파울 하나뿐이었다. 부인은 예전에 사별했고 첩이 몇 있는 정도였는데, 티르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 돈을 쥐어준 뒤 모두 관저 밖으로 내보냈다.
본래 영지전이 벌어지면 패한 쪽의 가족들은 심한 경우 죽거나 노예로 팔려가기 십상이니 그리 나쁜 처우는 아니었다.
관리들의 경우에는 티르를 모시겠다고 맹약한 이들을 제하고는 모두 추방하였다.
본래 이런 흡수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충성 서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기사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일전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급한 불을 끈 티르는 게덴과 에이다, 슈나이더를 관저로 불러 모았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튀링겐 령의 장악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게덴이 꺼낸 말에 티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모자라겠군.”
“…예.”
기사는 그저 단순한 전투 병력이 아니었다. 각 마을의 지배자인 동시에 영주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요 관리였다. 게덴이 지금 그러하듯이 말이다.
티르는 튀링겐 령의 기사 대부분을 죽였다. 때문에 지금의 튀링겐 령은 말 그대로 권력의 공백기에 처해 있었다.
일반적인 영지전이었다면 점령자 측의 기사들이 그대로 점령된 측의 것들을 나눠 가지면 되었지만, 아벤트 령의 경우에는 그것도 녹록지가 않았다. 애당초 아벤트 령은 기사가 너무 적었다.
“좋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오늘 내로 좀 더 검토해서 내일 말해 주도록 하지. 다음 건은?”
티르가 화제를 돌리자 이번엔 에이다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영지 시찰이 한 번 필요할 것 같습니다.”
“튀링겐 령은 마을이 모두 여섯 개지?”
“네.”
“좋아, 당장 내일부터 하나씩 돌도록 하지.”
어차피 영지의 장악이란 면에서 영지 시찰은 반드시 필요한 수순이었다. 티르는 이번엔 슈나이더를 돌아보았다.
“슈나이더, 확보해 두었나?”
“예, 영주님.”
슈나이더의 대답에 에이다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티르가 슈나이더만 한발 앞서 튀링겐 령에 보냈었는데 그때 무슨 임무를 맡겼던 모양이었다.
티르는 에이다의 그런 모습에 작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뭐, 좋아. 그럼 지금부터 다들 만나러 가 볼까.”
“누구… 말씀이신지?”
게덴조차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자 티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용갑주 담당자. 이왕 주은 거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