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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6화)
Chapter 2.(2)
***
용갑주를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당연히 용갑주.
둘째는 용갑주를 운용할 기사.
셋째는 용갑주를 관리할 메카닉이다.
청동의 시대나 영웅의 시대에 만들어진, 소위 1급의 용갑주와는 달리 2, 3급의 용갑주들은 매 전투가 있을 때마다 전문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용갑주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마도공학의 정수였다. 때문에 메카닉은 기계공학뿐만 아니라 마법, 거기다 대장장이의 영역에도 능통해야 했다.
기름에 쩌든 작업복과 거대한 스패너, 철야 작업에 지친 얼굴과 시커멓게 내려앉은 다크서클. 메카닉 하면 떠오르는 인상이 이렇다 보니 여자들은 메카닉을 멀리했고, 자연스럽게 메카닉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런데,
“…여자네?”
저도 모르게 꺼낸 말에 상대는 미간을 좁혔고 티르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미안. 여자 메카닉은 처음 봐서. 이름이 뭐지?”
“루레인…입니다.”
관저 구석에 위치한 공방 한가운데 선 여자가 조금은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메카닉답게 주머니가 잔뜩 달린 멜빵바지를 입은 그녀는 이제 이십대 초반이나 되어 보였다. 약간 짧은 갈색 머리칼은 뒤로 질끈 묶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겁이라도 먹은 듯 조금 움츠러든 표정이었다.
티르는 슈나이더를 돌아보았고, 슈나이더는 우물쭈물하였다. 하기야 영지의 주인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아무리 용갑주 메카닉이 계약직이라고 해도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짐짓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반갑다, 루레인. 나는 티르 아벤트다. 우리 측과 계약할 의사는 있나?”
“…해야지요.”
여전히 자신 없는 말투였지만 딱히 억지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시원해서 좋군. 자세한 계약은 며칠 뒤에 하도록 하고, 일단은 부서진 용갑주를 좀 봐줬으면 하는데.”
티르의 말에 루레인은 눈을 약간이나마 크게 떴다.
“많이… 망가졌나요?”
“아니, 그게… 외양상으로는 가슴팍의 갑주만 부서진 정도지만……. 나야 문외한이니 잘 모르지.”
“한 번 봐볼게요.”
“좋아, 슈나이더. 루레인 양을 모시고 가라.”
티르의 명에 슈나이더가 루레인을 데리고 공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가고 나니 이내 텅 빈 공방 안.
“음, 뭔가 허무하군.”
애당초 별일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짧게 웅얼거린 티르는 매한가지로 조금은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덴을 돌아보았다.
“게덴, 일단 튀링겐 령의 재정 검토는 율리아에게 맡겼으니 게덴은 병력 점검을 부탁할게.”
“예.”
튀링겐 자작이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을 해산했지만, 그래도 아직 100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영지 점령에 있어 무력의 흡수는 필수 요소였다.
“그리고 에이다는…….”
잠시 말끝을 흐린 티르는 새삼 에이다를 꼼꼼히 쳐다보았다.
율리아보다 1살 많아서 이제 18살.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예쁜 아가씨.
슬쩍 게덴을 돌아본 티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랑 데이트나 하자.”
“…네?”
“어, 설마 진짜로 기대했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튀링겐 령의 식당 안. 나란히 테이블을 마주한 채 티르는 웃었고 에이다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데이트라고 끌고 나와서 결국 데려온 것이 앞으로 만날 밥 먹을 식당이었으니까.
한참이나 키득거린 티르는 웃음기를 지우고 에이다를 바라보았다.
“7년 만에 보니 훌쩍 컸네. 너나 율리아나.”
“오… 아니, 영주님이도요.”
어린 시절엔 곧잘 함께 놀곤 했으니까. 조금은 그리운 얼굴로 티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여동생의 소꿉친구에게 역시나 어릴 적 소꿉친구인 오빠가 좀 물을게.”
“뭘요?”
“율리아랑 슈나이더랑 사귄지 얼마나 된 거야?”
에이다와의 대화를 마친 티르는 튀링겐 관저의 영주 방 안에 몸을 눕혔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튀링겐 자작이 머물던 방이라는 게 조금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신경 써서 방을 옮기거나 하기에는 티르의 신경 줄이 너무 굵었다.
“넓기도 하구만.”
드넓은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거리던 티르는 천장을 쳐다보았고 뭔지 모를 격자무늬를 보며 한숨을 토했다.
걱정과 달리 게덴이나 슈나이더, 에이다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셋 다 기사라서 그런지 아니면 일단 영주니 믿고 보자는 단순한 심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튼 일을 너무 벌이긴 했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아예 영지를 점령해 버렸으니.’
본래 예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티르는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어깨부터 시작해서 손끝까지 이어진 얇고 긴 검은 쇠사슬을 보았다.
“아가씨들이랑 알콩달콩 재미가 좋군.”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티르는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침대 끝에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하얀 모자에 하얀 양복에 하얀 구두였다. 머리칼까지 하얀 청년은 유일하게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차갑게 웃었고, 티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기, 역시 5시까지 푼 건 오버였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모습까지 보이다니.
“나쁠 것 없잖아?”
이번에는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티르의 머리맡, 엘프들에게나 있다는 하늘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미인이 하나.
“아아, 그래. 나쁠 것 없지.”
이번에는 문가, 팔짱을 끼고 선 머리가 하얗게 센 덩치 큰 노인이 하나.
티르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어째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일 많이 사용한 건 거창인데 왜 나오는 건 니들이냐.”
하얀 청년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은 둘이 한 쌍인 순백의 쌍검.
노인의 양팔에 감겨 있는 것은 그 끝이 거대한 낫과 연결된 쇠사슬 더미.
“그래서 싫어?”
그리고 티르의 머리맡,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등에 비스듬히 자리한 것은 기다란 태도.
티르는 결국 피식하고 웃었다. 옆으로 뒹굴 굴러서 여인의 곁에서 살짝 벗어난 뒤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그런 티르를 보며 껄껄 웃었다.
“고향에 오자마자 옆 영지를 빼앗다니 두근두근거리는군. 한 달 정도 지나면 이 나라의 왕이 되어 있는 거냐?”
“그런 일 없어.”
“정말로? 과연 그럴까?”
“그래, 정말로 그래.”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친 티르는 이번엔 하얀 청년을 돌아보았다. 하얀 청년은 무어라 길게 말하는 대신 그저 한번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잊지 마.”
레스베리아에 놀러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티르 네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 잊지 않아.”
티르의 대답에 하얀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날 때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
아침나절, 퀭한 얼굴로 일어난 티르는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와 한자리에 모였다.
“역시나 금광 같은 게 갑자기 발견되었을 리가 없지.”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역시나였다.
장부를 보니 튀링겐 령의 수입 자체는 작년에 비해 크게 뛰긴 했는데, 이건 단순히 세율을 높게 잡아서 생긴 일이었다. 추가적인 수입원의 증가 같은 것은 없었다.
“용갑주는 구입한 것이 아니라 제공 받은 건가…….”
티르는 짧게 혀를 찬 뒤 정리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파울 튀링겐은 수도에 있는 기사 학교에서 어느 유력인사의 조카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조카와의 친분을 다리로 그 유력인사를 만났고, 각종 협약 끝에 3급 용갑주 한 대를 대여하게 되었다.
문제의 유력 인사는 베스크 백작.
상업도시 홀멘을 보유한 사실상 아벤트와 튀링겐이 속한 일대의 제일가는 실력자였다.
베스크 백작 역시 레스베리아의 내전 상황을 이용해 근방 다섯 개 영지를 병합한 상태였다.
“느낌이 좋지 않군.”
베스크 백작이 노리는 바가 어디까지인지도 알 수 없었고, 튀링겐 자작령과의 친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까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모인 모두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에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침묵이 이어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튀링겐 령의 관리 하나가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게덴이 묻자 관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티르를 보며 말했다.
“베스크 백작의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베스크 백작의 전령이 전한 사안은 간단했다.
일주일 뒤 홀멘에서 영주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연회를 열 테니 각 영주들은 필히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전령은 튀링겐 자작령이라든가, 빌려 준 용갑주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일절 없이 이 일대의 영주들 모두를 초청하는 자리이니 꼭 참가해 주셨으면 한다는 말만 하고 물러갔다.
전령이 나가고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티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상 선택권이 없겠군, 다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번 모임에 어떤 꿍꿍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터였다. 각지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에 영주들보고 직접 출두하라니. 완전히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밀라는 격이었다.
하지만 소집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베스크 백작이 이를 빌미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강자기에 할 수 있는 만행이랄까.
“어떻게… 할 거야?”
율리아 역시 그러한 상황을 아는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티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가야지.”
이제 막 영지전을 하나 끝낸 마당에 책잡힐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위험하지 않아.”
티르는 가볍게 답했고 율리아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단신으로 용갑주를 격파한 티르였다. 티르와 같은 장소에서 대면할 것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위험한 건 티르가 아니라 베스크 백작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홀멘까지 갈 걸 생각하면 그다지 여유 있는 시간도 아니군. 영지 시찰도 급한데 골치야.”
베스크 백작이 일부러 생각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일정을 이리 아슬아슬하게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손가락으로 몇 번인가 책상을 두드린 티르는 슈나이더 쪽을 돌아보았다.
“슈나이더, 루레인이 용갑주에 대해 뭐라고 하던?”
“고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장갑을 교체해야겠다고 하더군요.”
“예산은?”
“오늘내로 계산해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슈나이더의 대답에 티르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용갑주는 무식하게 크니까. 티르 자신이 박살 낸 흉부 장갑만 교체한다고 할지라도 돈이 꽤나 깨질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마법회로나 기계류가 들어간다면 대체 돈이 얼마나 들지.
“…좋아, 얼마가 들든 일단은 고쳐. 아무래도 새로 사는 것 보단 고치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히는 장사니까. 네가 탈 물건이니까 이왕지사 신경도 좀 더 쓰고.”
“예, 예?!”
자연스레 답하던 슈나이더는 마지막 말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티르는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용갑주에는 슈나이더가 탑승한다. 게덴에겐 미안한 소리지만 아무래도 장래성 있는 슈나이더가 적임이야. 에이다는… 에이다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용갑주에 타기엔 몸이 좀 부실해.”
탑승자의 정신력까지 요구한다는 1급 용갑주 정도는 아닐지라도 3급 용갑주 역시 탑승자에게 요구하는 바가 많았다.
조금 둘러쳐서 말하긴 했지만 사실 게덴은 나이가 너무 많았고, 에이다는 체력이 너무 약했다. 비록 티르 자신에게 순식간에 박살이 나긴 했지만, 용갑주를 그 정도로 운용한 파울도 꽤나 기량 있는 기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럼 영주님은…….”
“난 그런 거 안 타는 편이 더 세.”
티르의 말에 슈나이더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슈나이더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티르는 게덴을 돌아보았다.
“게덴, 이해해 줄 수 있지?”
“예, 제가 보아도 슈나이더가 적임인 것 같습니다.”
게덴이 부드럽게 답하자 티르는 에이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 에이다.”
“아니요, 괜찮아요.”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에 욕심을 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적임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율리아는 나대신 영지 시찰을 부탁할게. 슈나이더나 게덴을 데리고 함께 돌아 줘. 영주 대행직도 해 봤으니 뭘 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율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횡령 건이 있으면 어느 정도로 처벌해?”
세율을 이리 높게 잡았으니 보나마나 횡령이나 부정이 있을 터였다. 티르는 생각을 정리하듯 다시 몇 번인가 책상을 두드리다가 답했다.
“일단은 초장이니까. 일벌백계한다는 의미에서 제일 먼저 걸린 녀석은 재산 몰수한 다음에 추방해 버려.”
“…알았어.”
조금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 정도 엄격함은 필요했다.
“그리고 에이다.”
“예.”
티르의 부름에 에이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달라는 듯한 모습에 티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데이트다.”
“실망했나?”
티르의 물음에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에이다는 짐짓 과장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어차피 이럴 줄 알았거든요?”
두 사람은 지금 각자 말을 타고 홀멘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번 식당에서 대화한 이후 부쩍 티르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한 에이다는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데 수행원은 저 하나로 충분한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영주님이 직접 행차하는 건데.”
“더 많아 봐야 불편하기만 해. 여차하면 몸을 빼내야 하기도 하니까.”
평화롭게 잘 끝나면 좋지만 함정일 공산도 충분히 컸으니까. 어쩌면 그냥 티르 혼자서 가는 편이 제일 나을지도 몰랐다.
“흐음, 그래도 슈나이더나 아버지 쪽이 더 낫지 않나요?”
에이다가 되묻자 티르는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실력에 자신이 없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이 여러모로 보아 에이다 자신보다는 나았으니까. 조금이지만 의기소침해진 듯한 목소리였다.
티르는 그런 에이다에게 말머리를 가까이 한 뒤, 율리아에게 그러듯 에이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게덴은 튀링겐에 남아야 해. 율리아가 똑똑하긴 해도 아직 너무 어리니까. 슈나이더는 용갑주 조정부터 시작해서 이래저래 할 일이 많고.”
갑작스런 티르의 손길에 뺨을 살짝 붉힌 에이다는 슬쩍 몸을 돌려 티르의 손길에서 빠져나갔다.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째 제가 잉여라서 따라가는 기분도 드네요.”
영주에게 하는 말 치고는 무례했지만 단순히 영주와 기사라고 하기에는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티르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고 에이다 역시 이내 작게나마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 일 뒤,
티르는 상업도시 홀멘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