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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7화)
Chapter 2.(3)
***
아벤트 령과 튀링겐 령이 속한 바로크 지방은 레스베리아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남하하면 서의 튜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얼스터 지방이 나왔다.
그린 드래곤 에일렌이 등장한 이후로 튜바와의 전투가 극감하긴 했어도 얼스터 지방은 여전히 최전선이었다. 때문에 2왕자와 3왕자 간의 내전이 한창인 지금 이 시점에도 얼스터 지방의 호국경 가울링 후작은 그저 몸을 웅크린 채 튜바만을 경계하고 있었다.
호사가들은 왕국 최정예를 거느린 가울링 후작이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아 내전이 길어지게 만들고 있다며 후작을 비난했지만, 소문이야 뭐라건 가울링 후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로크 지방의 북쪽으로는 실론 강을 경계로 고만고만한 영지들이 연이어졌다.
홀멘은 바로 이 실론 강가에 자리 잡은 도시로써, 얼스터 지방과 바로크 지방, 그리고 북부에 위치한 지방들 사이의 중개무역을 담당하는 일종의 무역도시였다.
“해자까지 있고 본격적이군.”
실론 강의 물줄기 일부를 끌어당긴 해자는 넓고 깊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역시 거의 10미터에 육박했다.
용갑주도 무리 없이 지나갈 만한 커다란 성문을 지나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그야말로 복잡하고 거대한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3층을 넘어 4층에 달할 건물들,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보아도 차고 넘치는 사람들.
지난 7년 동안 안 돌아다녀 본 곳이 없는 티르야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에이다는 달랐다.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맑고 파란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귀엽다면 귀여울 여기사의 모습에 잠시 키득거린 티르는 에이다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력이 넘치는데.’
도시 홀멘은 살아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엔 저마다 활기가 흘렀고, 근심과 걱정 대신 앞으로의 일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묻어났다.
모르긴 몰라도 베스크 백작이 홀멘의 관리를 꽤나 잘한 모양이었다. 단순히 돈이 오가는 것만으로는 이런 활력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좋지 않아.’
평화롭게 끝난다면야 좋지만 여차하면 적이 될 수 있는 상대였으니까. 활기 넘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좋았지만 뒷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에이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일단 관저로 가자.”
“…에? 아, 네!”
에이다는 구경하느라 정신 줄을 놓은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티르는 저도 모르게 그런 에이다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은 뒤 도시의 중심 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본래라면 성문에서부터 안내를 받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도시에 들어올 때 저쪽에서 별반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냥 제 발로 찾아가야 할 듯했다.
관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시 밖에서부터 보이는 높고 커다란 성이 도시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에이다는 이번엔 성의 위용에 입을 헤 벌렸고 티르는 다시금 킥킥거렸다. 그런데 그 즈음이었을까.
“티르! 티르 맞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왼편 골목에서 수행원들을 잔뜩 이끈 갈색 머리 청년 하나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돈 꽤나 들인 것 같은 청년의 화려한 복장과 4명이나 되는 수행원들을 슥 돌아본 티르는 다시금 청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영리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가 담긴 얼굴이 썩 잘생겼지만 티르의 머릿속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
티르가 깔끔하게 되묻자 청년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팍팍 내쉬며 말했다.
“이 자식… 나 노포크다.”
청년, 노포크의 말에 티르는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아, 노포크! 아버지 대신 온 거냐?”
“그래.”
보르네아 자작은 얼스터 지방과 가장 근접해 있는, 한마디로 말해 바로크 지방 가장 귀퉁이에 자리한 록튼 령의 영주였다. 노포크는 그런 보르네아 자작의 장남, 소위 말하는 소영주였다.
아벤트 령과는 멀다고 까진 못해도 꽤나 거리가 있는 록튼 령이었지만 아버지들 간의 친분 관계 덕분에 노포크와는 어린 시절 몇 번인가 함께 놀곤 했었다.
“그때도 부자더니 여전히 부자 같구나.”
“말을 해도 꼭.”
노포크는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 볼 일 없는 튀링겐 령이나 아벤트 령과 달리 록튼 령에는 은맥이 있었다. 보르네아 자작이 상재에 밝은 편이 아닌지라 막대한 부를 쌓거나 하진 못했지만, 낭비 역시 별로 없었기에 내실 있는 부가 차곡차곡 쌓인 그런 경우였다.
오랜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가 반갑기도 했지만 티르는 덕담을 나누거나 하는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너까지 온 걸 보니 가당찮은 억진데도 꽤나 모인 것 같네.”
노포크가 왔으니 다른 군소 영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보다 소식은 들었다.”
“무슨 소식?”
“네가 튀링겐 령을 접수했다는 소식.”
노포크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티르는 그저 담담히 답했다.
“그렇게 됐다.”
“그래.”
노포크는 더 이상 말을 길게 늘이는 대신 슬쩍 한발 물러섰다.
“난 별관 쪽에 머물고 있으니까. 나중에 생각 있으면 한 번 찾아와.”
“그러도록 하지. 어차피 나도 비슷한데 묵을 거 같으니까.”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노포크는 그대로 수행원들과 함께 티르가 지나온 큰길 쪽으로 향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티르는 에이다와 함께 베스크 백작의 관저로 향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건만 왠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
성 내부는 의외로 꽤나 단순했다. 수행원이 에이다 하나라는 사실에 안내를 맡은 관리는 다소 놀란 모양이었지만 무어라 딱히 묻거나 하는 대신 그저 얌전히 티르가 묵을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예정대로 베스크 백작이 주관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하오.”
베스크 백작의 관저에서 열린 연회에 모인 영주는 베스크 백작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다.
호른의 샴셋 지방에서 난다는 값비싼 휘장들로 잔뜩 치장된 방 안은 연회를 열기에 그리 좁지도 넓지도 않았다.
네모진 테이블 상석에 베스크 백작이 자리했고 나머지 영주들이 각자 한 자리씩을, 에이다를 비롯한 수행원들은 저마다의 영주 등 뒤에 시립했다.
테이블 위엔 음식도 가득했고, 분명 연회라고 하면 연회라 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꽉 눌린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왼쪽 가장 끝자리에 앉은 티르는 별다른 표정 없이 베스크 백작을 바라보았다.
베스크 백작은 젊었다. 이제 서른 중반이나 되었을까. 검은 비단으로 감싸인 몸은 당당했고 무척이나 색이 진한 검정 머리칼은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다소 네모진 얼굴에 날카로워 보이는 코, 흡사 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까지 참으로 강렬한 인상이었다.
베스크 백작은 앞으로의 친목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조금은 식상하고 뻔한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술잔이 돌기를 몇 차례, 별다른 실속도 없이 연회는 일찍 파장했다.
“의외로 평화롭게 끝났네요?”
연회 시간 내내 티르의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에이다는 얼굴 구석구석에 고단함이 묻어났지만, 그래도 연회가 별문제 없이 끝난 것이 꽤나 기쁜 모양이었다.
숙소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그런 에이다의 예쁜 얼굴을 바라본 티르는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네?”
에이다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칼부림이 일어난다거나, 음식물에 독이 들어 있었다거나 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사태도 없었고, 격한 언쟁이 오가거나 협박에 가까운 말이 오가는 살벌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티르는 에이다의 그런 의문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티르 자신이 연회장에서 본 것들을 떠벌떠벌 이야기해 줄 생각까지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여기는 적지였으니까.
주변에 대화를 엿듣는 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여기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당분간은 평화롭긴 그른 모양이야.”
튀링겐 령과의 전투도 사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거늘. 그저 이왕지사 싸우게 된 거 가장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노포크 놈도 그렇고 여기 영주라는 베스크 백작도 그렇고 눈들을 보아하니 앞으로 싸울 생각들이 가득한 것 같았다.
“…영주님?”
에이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다시 한 번 물었지만, 티르는 답하는 대신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잠이나 자자, 에이다. 내일 봐.”
“영주님?!”
“잘 자, 나 자는데 덮치지 말고.”
“영주님!”
이번엔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지만, 티르는 그저 킥킥거리며 웃은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티르와 에이다가 그렇게 실랑이를 벌일 즈음,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베스크 백작은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 노호성을 터트렸다.
“바이스! 어째서 손을 쓰지 않은 거냐?!”
티르를 비롯한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했듯이 이번 연회는 눈에 보이는 함정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의 예상보다 베스크 백작이 노리는 바가 조금 더 컸달까. 백작은 오늘 연회 자리에 모인 영주들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
어찌 되었건 영지의 중심은 영주였다. 영주 없는 영지는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명예를 모르는 비열한 행위라고 주변 모두에게 모욕을 당할 터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전이 제아무리 길어져 봐야 앞으로 2년 남짓이 한계였다. 최대한 빨리 바로크 지방을, 특히나 은광이 있는 록튼 령을 제압하고 2왕자의 편에 서서 내전에 뛰어들어야 했다.
베스크 백작의 호통에 붉은 머리의 청년은, 베스크 백작의 제1기사 바이스 발렌시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쓰지 않은 것도 아니고 쓰지 못했다.
“회장 좌측에서 세 번째에 앉아 있던 자… 아벤트 령 영주가 저와 제 수하들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연회장 안에 미리 숨겨 둔 병력은 모두 합쳐 스무 명이었다. 휘황찬란한 휘장들은 인기척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잠시 그런 바이스의 말을 곱씹던 베스크 백작은 이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설사 놈이 눈치채든 말든…….”
거기까지 말을 이었을까. 베스크 백작은 돌연 말꼬리를 흐렸다. 무어라 말을 늘어놓는 대신 바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놈이라고 생각하나?”
“예.”
“네가 있었는데도?”
“…그렇습니다.”
베스크 백작은 가만히 팔짱을 꼈다. 바이스 발렌시아는 베스크 백작 자신이 보아온 기사들 가운데 최고였다. 그 재능만을 놓고 본다면 드넓은 레스베리아 내에서도 반드시 한 손에 꼽힐 천재였다. 그런데 그런 바이스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베스크 백작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파울 튀링겐은 아주 뛰어나다고는 못해도 제법 기량 있는 놈이었다. 그랬기에 베스크 백작 자신이 용갑주를 맡기고 꼭두각시 역할을 시킨 것이었다.
바로크 지방의 제압은 파울에게 맡기고, 베스크 백작 자신은 내전에 개입한다. 파울 놈이야 나중에 토사구팽 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파울 튀링겐을 티르 아벤트가 쓰러트렸다.
단신으로 용갑주를 격파했다는 믿지 못할 헛소문이 사실일 리는 없었지만 놈이 만만히 볼 재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알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만 물러가도록.”
바이스는 목례한 뒤 서재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베스크 백작은 책상 위에 펼쳐진 바로크 지방 일대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벤트 령… 티르 아벤트라…….’
베스크 백작의 눈빛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