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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8화)
Chapter 2.(4)
***
연회는 하루 더 이어졌지만 역시나 별다른 일은 없었다. 몇몇 중소 영주들은 정말로 베스크 백작이 친목을 도모하는구나 하며 안심하고 돌아갔다.
에이다와 말을 나란히 한 채 홀멘의 성문을 나선 티르는 몇 걸음 가지 않아 고개를 돌려 홀멘을 바라보았다.
상업도시 홀멘. 막강한 부와 군사력을 갖춘 베스크 백작.
“조금 의외인데.”
“…또 뭐가요.”
이틀 내내 티르가 저 혼자 아는 말만 늘어놓자 불만이 쌓였는지 에이다가 볼은 잔뜩 부풀리며 물었다.
티르는 그런 에이다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더니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길을 따라 말을 몰며 생각했다.
첫째 날, 베스크 백작의 살의는 진심이었다.
휘장 뒤에 숨은 병사들은 단순한 안전 책이 아닌 공격을 위해 대비된 자들이었다.
친목을 도모한다며 영주들을 초청해 놓고 모두 죽인다.
이미 평판 같은 것은 무시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제아무리 내전 상태라 할지라도 쉬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만한 각오를 해 놓고, 그만한 일을 벌일 모든 준비를 갖춰 놓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티르는 베스크 백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던 노포크를 떠올렸다.
‘정말로 평화롭기는 그른 모양이군.’
앞으로 이어질 것은 결국 전투.
하지만 티르는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받아 줄 수밖에. 다시는 넘보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짓밟아 주는 수밖에.
“가자, 에이다.”
여전히 툴툴거리는 에이다에게 손짓한 티르는 튀링겐 령을 향해 말을 달렸다.
Chapter 3.(1)
영웅의 시대,
열두 존자의 압도적인 힘 앞에 인류는 절망했다.
인류는 기도했다. 동물신들이 그간 그러했듯 자신들을 지켜 주기를 소망하였다.
하지만 동물신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인류의 편에 서는 대신 인류를 버리고 자신들만의 이상향으로 떠나갔다.
기적조차 바랄 수 없는 최악의 시대.
허나 그러한 시대에도 인류를 저버리지 않은 신이 하나 있었다.
그 간절한 기도를 차마 저버리지 못해 다른 신들 모두를 떠나서라도 인간의 곁에 선 신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를 절망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은 신이 있었다.
인류의 편에 선 단 하나의 신.
인간을 지키는 강아지, 견신 미티어 블루.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홀멘에서 돌아오자마자 티르는 집무에 몰두했다. 홀멘까지 왕복 열흘 가까이 걸리는 시간 동안 율리아와 게덴 등이 잘해 준 덕에 튀링겐 령의 장악은 꽤나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산재해 있는 문제가 많았다.
그 첫 번째는 세금 문제였다.
튀링겐 자작이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높여 놓은 세율을 다시 낮춘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미 거둬 놓은 세금이 문제였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미 거둔 것이고, 그것도 결국 티르가 아닌 튀링겐 자작이 거둔 것이니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될 것 같았지만 영민들의 기대는 그와 달랐다.
일단 아벤트 령이 튀링겐 령보다 세금이 낮았다 보니 앞으로 세금이 더 낮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상당히 팽배했고 이미 낸 세금 역시 돌려받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티르 역시 튀링겐 자작이 과하게 세금을 거둬 영민들의 올해 겨울나기가 힘들 거라 여기고는 있었지만, 이런 요구들을 호락호락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란 결국 하나를 들어주면 두 번째를 요구하는 동물이었으니까. 튀링겐 자작처럼 영민들을 쥐어짤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상전 모시듯 모실 생각도 없었다.
티르는 일단 영지 점령 후 안정을 꾀한다는 명목하에 세금으로 거두었던 곡식들 가운데 일부를 영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율 문제는 율리아와 이리저리 의논을 해 봐야 했지만 최소한 아벤트 령보다는 높게 유지하는 쪽으로 일차적인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문제는 텅 비어 버린 중간 관리 층의 확보였다.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면 그 작위에 따라 일정 숫자 내로 기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당장에 급한 것이 기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티르는 급히 기사를 뽑는 대신 튀링겐 령과 아벤트 령의 상주 병력을 대상으로 일종의 대회를 열어 십부장과 기병을 새로 뽑았다.
그 뒤 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이 같은 대회를 열어 십부장과 기병을 선발하고, 그들 가운데서 기사를 뽑을 것이라 공표하였다.
외부 인사를 유입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니 내부에서 경쟁을 통해 병사 개개인의 의욕과 기능을 고취시키는 한편 노력 여하에 따라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한 정책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적어도 티르의 마음속에는 거의 기정사실화 된 앞으로의 영지전에 대한 대비였다.
그 일환 중 하나로 티르는 슈나이더의 훈련을 참관해 보았다.
“제법 소질이 있는 것 같네.”
장장 열흘에 걸쳐 이제야 겨우 수복을 맞춘 용갑주에 탑승한 슈나이더가 연병장을 돌며 이런저런 시운전을 해 보고 있었다.
마도공학의 산물인 용갑주의 조작은 단순한 기계장치의 조작과는 사뭇 달랐다. 검이나 창과 같은 병장기가 결국 그 사용자의 신체의 일부, 신체의 연장선으로 다뤄지듯 용갑주 역시 그러했다.
탑승한 기사가 낯설기 그지없는 강철의 거인을 얼마나 제 몸처럼 여길 수 있는지가 일차적인 자질을 가늠한다고 해야 할까.
율리아는 도시락까지 싸 들고 와서 뭐라뭐라 슈나이더를 응원하고 있었고, 슈나이더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하나하나 기본 동작을 완수해 가고 있었다.
정비를 맡은 루레인도 엄밀히 말해 일류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할 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율리아의 옆에 앉아 뭔가 알 수 없는 것들을 빠르게 필기하는 한편 슈나이더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잠시 그런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볼까 하던 티르는 이내 돌아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을 게덴과 에이다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흐른 밤이었다.
“안녕.”
시장 안에 있는 주점을 찾은 티르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대뜸 말했다.
남자는 조금 놀란 얼굴로 티르를 멀뚱멀뚱 쳐다보았고, 티르는 씩 웃더니 남자 앞의 의자를 빼고 앉았다.
주점 안은 가을의 경계를 지난 시절답게 왁자하게 시끄러웠고, 티르와 남자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제대로 손질을 안 했는지 조금은 떡진 밤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기른 남자는 티르의 허리춤에 찬 칼을 슬쩍 넘겨보더니 우물쭈물하다 약간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신지?”
아벤트 령을 처음 찾았을 때처럼 용병 차림을 하고 앉은 티르는 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랜 여행으로 다소 지친 듯한 어깨, 길이 잘 들었지만 그만큼 오래 입은 여행복, 의자 옆에 소중하게 모셔 둔 짐 보따리와 지팡이. 그러면서도 제법 단정하게 기른 수염 덕에 반듯해 보이는 이십대 후반 남자의 얼굴.
어딜 보나 흔하디흔한 행상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티르는 웃었다. 대뜸 사내의 식사 중 하나인 마른 빵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놈들 가운데 하나군.”
남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티르는 그저 혀를 끌끌 차더니 이번엔 남자가 마시고 있던 맥주까지 한잔 들이켰다.
“사 일 전에 튀링겐 령에 들어왔더군. 슈나이더가 용갑주 모는 걸 보니 어떻던가, 초심자 치고는 제법 잘 몰지 않나? 에이다는 내 예상보다 검이고 활이고 솜씨가 뛰어났어. 베스크 백작 령에도 그렇게 예쁘고 다재다능한 여기사는 없지?”
남자는 다시금 우물쭈물거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한숨을 쉬더니 허리를 폈다. 아무런 주저 없이,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티르의 얼굴을 향해 소맷자락에 숨겨 둔 단검을 날렸다.
딱.
철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아닌, 그렇다고 검이 살을 헤집는 소리도 아닌, 손가락 두 개가 무언가를 붙잡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티르는 왼쪽 엄지와 검지로 단검을 붙잡은 채 그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남자는 단검을 비틀어 티르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려 했다. 하지만 단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티르는 여전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를 악무는 것과 동시에 단검에서 손을 놓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고 뒤로 크게 뛰며 허리춤에서 새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테이블을 피하기 위해 일어선 티르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수초도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단검이 티르의 심장을 노리고 정확하게 날아갔다. 티르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단검의 날을 붙잡았다.
날아온 단검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오른팔을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돌렸다. 오른팔을 내림과 동시에 단검을 내쏘았다.
“크악!”
단검이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는 순간 남자가 비명을 토했다. 티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 역시 남자에게 던졌다. 왼쪽 어깨까지 꿰뚫린 순간 남자는 공성 병기에라도 맞은 듯 몇 미터 이상을 날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주점 2층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검을 뽑아 들더니 티르의 머리를 노리고 뛰어내렸다. 창가에 서서 담소를 나누던 두 사람이 어디선가 검을 뽑아 들고 티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섬과 동시에 단검을 뿌렸다. 머리 위, 등 뒤, 정면.
티르는 반발자국 몸을 옆으로 옮겼다. 머리 위에서 쏟아진 검격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스쳐 보냄과 동시에 오른 주먹을 왼쪽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몸을 회전시키며 어깨에 있는 부분 갑옷으로 날아온 단검을 받아 냈다.
이제는 등 뒤,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두 명과 단검을 뿌리자마자 새로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남자.
그리고,
03시의 봉인해제, 달을 베는 대태도.
티르의 손으로부터 일섬이 펼쳐진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티르를 중심으로 해 반경 2미터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이 산산이 분해되었다.
“으아아아아악!”
주점 안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짓말처럼 펼쳐진 피보라에 앞뒤 가리지 않고 주점 밖으로 뛰쳐나가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티르는 그 모든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제일 먼저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예리한지 핏물조차 베이지 않은 대태도를 길게 늘어트렸다.
“다시 한 번, 안녕.”
“안녕…하시오.”
남자는 끓는 목소리로 답했고, 티르는 자세를 낮추었다. 남자와 시선을 가까이 한 채 말했다.
“나는 티르 아벤트다.”
“…바이스… 발렌시아.”
베스크 백작의 제1기사.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티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발렌시아 경. 궂은일까지 직접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군. 변장 솜씨도 제법이고. 죽음을 각오한 그 마음가짐도 좋아. 남을 죽이려고 한 순간 자신 역시 죽음을 각오하는 그거, 전사에겐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지. 하지만 베스크 백작은?”
티르는 바이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이 와중에도 죽음의 공포 대신 강한 의지를 담은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의 주군에 대해 물었다.
“그 역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나? 그 역시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 각오를 하고 있나?”
바이스는 대답하지 못했고, 티르는 차갑게 웃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태도를 회수하였다.
“오늘은 놓아주겠다. 그만 돌아가라.”
2미터짜리 대태도가 마술처럼 사라지는 광경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던 바이스는 연이어진 티르의 말에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놓아줄 테니 돌아가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바이스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름을 밝힌 순간 이미 죽을 각오를 했을 테니까. 티르는 그대로 바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분명 강해. 그러니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떠들 필요도 없겠지. 베스크 백작에게 돌아가라. 그리고 전해라. 조만간 내가 찾아뵙겠다고.”
간단한 말.
너무나 간단한 말.
하지만 바이스는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
바이스 발렌시아는 양쪽 어깨의 통증도 잊은 채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바이스가 처음 검을 잡은 것은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살기 위해 검을 잡았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논리도 없이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바이스에겐 매일매일이 싸움이었다. 그 홀로 전쟁터에서 살기라도 하는 냥 매일같이 목숨을 건 싸움을 반복했다.
그래서 바이스는 많은 검들을 보았다.
시정잡배의 검부터 시작해서 정통으로 검술을 익힌 기사의 검까지.
그래서 바이스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약한지 강한지. 강하다면 얼마나 강한지.
바이스는 말을 달렸다. 시선은 새카만 밤이 내린 어두운 길 너머에 가닿았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티르 아벤트.
아벤트 령의 영주.
손가락 두 개로 바이스 자신의 전력을 받아 내는 괴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던진 단검을 되받아 던지는, 차라리 곡예에 가까운 기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남자가 휘둘렀던 대태도. 차라리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그때의 일섬.
티르 아벤트는 강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했다.
바이스 자신의 기량으론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치 강했다.
바이스는 그런 자를 하나 더 알고 있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다섯 명의 절대 강자 중 하나라는 용병왕 베이그란츠.
레스베리아로 넘어와 베스크 백작의 기사가 되기 전, 바이스는 호른에서 우연히 그의 싸움을 본 적이 있었다.
티르의 강함은 최소한 그와 호각이었다.
베이그란츠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을 경지였다.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저 티르 아벤트가 파울 튀링겐이 탑승한 용갑주를 일격에 격파했다는 허무맹랑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몰랐다.
“이럇!”
바이스는 두려움을 쫓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티르 아벤트와는 싸워선 안 된다.
아니, 싸워야 한다. 저 괴물이 홀멘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베스크 백작 령의 전력을 동원하여 죽여야만 한다.
바이스는 이틀 간 공포와 싸웠다.
거의 말을 죽일 듯이 달리고 달려 홀멘에 도착하자마자 베스크 백작을 찾았다.
참고 참았던 공포를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