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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9화)
Chapter 3.(2)


***

티르 아벤트는 홀로 서재에 앉아 가만히 수를 헤아렸다.
주점에서의 일로부터 삼 일. 지금쯤이면 바이스 발렌시아가 홀멘에 도달했을 터였다.
그날 티르가 바이스에게 심은 것은 공포. 그리고 그것으로 노리는 바는 둘.
티르는 고개를 들었다. 책상 맞은편에 온통 하얀 청년이 앉아 티르의 시선을 받았다.
“약은 수를 썼구나.”
티르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시선을 슬쩍 돌렸다. 창가에는 예의 덩치 큰 노인이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네 녀석이 바라는 대로 놈들이 전투를 포기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네놈이 공포를 심은 것은 그 바이스라는 기사지 베스크 백작이 아니니까. 뭐, 애당초 그 바이스라는 애송이 놈도 전력을 다해 네놈을 죽이면 죽였지 포기할 놈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야.”
전투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두 번째 노림수.
티르의 등 뒤로 하늘색 머리를 길게 기른 미인이 나타났다. 티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베스크 백작과의 전력 차는 너무나 크니까. 저번처럼 너 혼자 칼부림하고 나선다고 끝날 일이 아니니까.”
튀링겐 자작과의 전투와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다. 베스크 백작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못해도 이천 이상. 자릿수가 그렇게까지 달라지면 개인의 힘으로 전세를 뒤집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티르가 노리는 것은 주전력의 격파였다.
놈들이 티르를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 동원할 병력을, 베스크 백작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을 용갑주들을 한곳으로 유도한 뒤 모두 다 박살 내는 것.
“하지만 티르, 우리들의 마지막 기사여, 상황이 정녕 네 뜻대로 잘 돌아갈까?”
하얀 청년의 지적에 티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늘색 미녀는 그런 티르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티르, 용갑주는 강해. 청동의 시대나 영웅의 시대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이 시대, 철의 시대에 만들어진 용갑주들 역시 인력으론 당해 낼 수 없는 것들이야.”
일대일이라면, 지난번처럼 3급의 용갑주 하나라면 티르가 필승한다. 하지만 베스크 백작의 전력이 고작해야 그 정도일까?
“하지만 이것 외엔 방법이 없으니까 넌 싸울 수밖에 없지. 놈들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간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뿐이니까. 크크,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그’의 힘이 필요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 어찌 되었건 신나는 싸움이 될 거야.”
마지막 노인의 말에 티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깊고도 길게 숨을 고른 뒤 눈을 떴다.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진 세 사람의 환영을 쫓는 대신 소리 높여 외쳤다.
“게덴! 에이다! 슈나이더!”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사람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티르는 빠르게 명령했다.
“슈나이더는 용갑주와 함께 튀링겐 령을 지킨다. 에이다와 게덴은 각기 십부장 열씩을 거느리고 나와 함께 출진한다.”
홀멘으로의 출진. 동원하는 병력은 고작해야 기병 40기와 보병 160명.
거기다 저번 전투에서 기껏 얻은 용갑주는 참전하지도 않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보다도 더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지만 세 사람은 티르의 명령에 따랐다.
이미 율리아를 필두로 만류란 만류는 모두 다 해 보았으니까. 더욱이 애당초 말이 안 되기는 지난번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으로선 자신들의 영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지난 7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티르가 가진, 인간을 초월한 정체불명의 힘은 무엇일까.
게덴은 어린 시절의 티르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바로 며칠 전에도 율리아와 에이다 앞에서 미소 짓던 티르의 모습을 기억했다.
“알겠습니다.”
게덴의 대답이 있고도 두 시간 뒤, 아벤트 군은 상업도시 홀멘을 목표로 출진했다.

***

아벤트 군의 출진 소식을 들었을 때 베스크 백작이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바이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자신에게 싸움을 걸다니. 정찰병을 통해 그 병력의 규모를 들었을 땐 아예 분노까지 느꼈다.
인간이 강해져 봐야 한계는 명확했다.
대륙의 절대강자라는 다섯 명이라고 해 봐야 대마법사인 회색의 마녀 카샤 벤 벨리오넵트를 제하고는 3급 용갑주 하나 당해 내지 못할 것이란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대륙의 오대 강자가 그럴진대 지방 영지의 영주가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이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친단 말인가.
아벤트 영지에만 처박혀 있던 것도 아니고, 7년 동안 유랑했다더니 모르긴 몰라도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강함에 지나치게 도취된 미친놈인 것이 분명했다.
‘바이스 발렌시아… 내 안목이 잘못된 것이냐, 아니면 네가 잠시 실수를 한 것뿐이냐.’
베스크 백작은 바이스 발렌시아를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단순히 검에 대한 재능을 떠나서 자신의 심복으로 삼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했기에, 떠돌이 용병이었던 그에게 직접 성까지 내리며 제1기사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바이스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거의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하며 베스크 백작 령의 전력을 쏟아부으려 했다.
삼 일 전 베스크 백작은 고민 끝에 바이스의 청을 들어주었다. 제2왕자의 전력이 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수까지 내주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바이스.’
마지막으로 잇소리를 크게 낸 베스크 백작은 티르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바이스가 이끌고 간 병력이면 모든 것을 종결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그저 며칠 뒤에 승전 보고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베스크 백작은 작금에 있어 훨씬 더 중요한 사안인 제2왕자에 대한 보고서를 펼쳐 들었다.

***

바이스 발렌시아는 홀멘으로부터 반나절 거리에 진지를 구축했다. 동원한 병력은 모두 합쳐 칠백여 명. 그중에 기병만 해도 150기에 가까웠다.
주군인 베스크 백작은 진다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바이스의 명에 따르는 다른 기사들 역시 동원한 병력과 용갑주들을 보곤 이번 전투를 일종의 훈련 정도로 여기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들이 옳고 바이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티르 아벤트에게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자신은 그날 놈의 눈을 보았으니까.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을 보았으니까.
바이스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내일 벌어질 아벤트 군과의 전투를 생각했다.
아벤트 군의 기병은 60기, 보병은 140여 명.
기병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아벤트 군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 비해 보병의 수가 지나치게 적다.
튀링겐 자작에게 빼앗은 용갑주는 동원조차 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티르 아벤트.
설마하니 정말 인간의 힘으로 용갑주들을 격파할 속셈인 것이냐.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리던 바이스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바이스 자신이 베스크 백작에게 간청해 동원한 것들을 믿기로 했다.
티르 아벤트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설사 그자가 대륙 최강자라는 검성 베르무트보다 강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었다.
바이스는 점차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즈음이었다.
“발렌시아 경!”
용갑주를 운용하는 기사 가운데 하나인 데비드 멀톤 경이 바이스의 막사를 찾았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놈들이 회군했소!”
갑작스런 소리에 바이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회군…했다니?”
“아벤트 군이 꽁지를 말고 되돌아갔다는 말이오.”
껄껄거리며 소리 내어 웃은 멀톤 경은 정찰병이 전해 온 정보를 바이스에게 전했다. 얘기인즉, 아벤트 군이 진지까지 하루거리를 앞두고 돌연 병력을 물렸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놈들도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 이건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 분명하오.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니까.”
멀톤 경의 말은 타당했다.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옳은 말이었다.
역시나 바이스 자신이 지나치게 겁을 먹었던 것에 불과했던 것일까.
티르 아벤트가 강하다 해 봐야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멀톤 경은 그런 바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서 주군께 이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이왕 병력을 냈으니 내친김에 아벤트 령을 쓸어버리는 것도 좋겠구려. 발렌시아 경의 부하들의 복수도 해야 하지 않겠소!”
“복수?”
“그래, 복수 말이오!”
그날 주점 안에서 죽은 바이스 자신의 부하들.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어긋난 기분이었지만 멀톤 경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이―스― 발―렌―시―아―!”
커다랗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진지 전체를 뒤흔들었다. 멀톤 경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바이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이다.
놈이 왔다.
바이스는 거의 쏘아지듯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먼 곳이었다.
베스크 백작군의 진지를 마주하고 선 남자가 하나 있었다.
병사는 없었다.
아벤트 령을 함께 출발했다는 60기의 기병과 140명의 보병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선 티르 아벤트.
“…미친놈.”
뒤늦게 막사에서 나온 멀톤 경이 짧게 평했다. 하긴 병력도 없이 단신으로 칠백 군사가 지키는 진지에 쳐들어온 자를 미친놈이 아니면 무어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바이스는 동의하지 않았다. 티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멀톤 경, 용갑주에 탑승하시오.”
“…발렌시아 경?”
“어서!”
바이스의 노호성에 멀톤 경은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이 군세의 사령관은 바이스였으니까. 멀톤 경 외에도 기사 베인과 기사 아율른이 바이스의 명에 따라 저마다의 용갑주에 탑승했다.
3급 용갑주가 세 대. 베스크 백작이 보유하고 있는 용갑주들을 모두 내보낸 전투. 이런 보잘것없는 시골 지방 따위는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전력.
티르 아벤트가 무슨 생각으로 병력을 회군시켰는지 따위는 몰랐다.
하지만 거기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든 여기서 티르 아벤트를 제압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 바이스의 속내를 짐작이라도 하듯 티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진지를 나서는 세 대의 용갑주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쇠사슬에 연결된 검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남은 것은 오직 싸우는 것뿐.
티르는 차갑게 웃었다. 용갑주들을 향해 진각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