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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
혈루검비사
헤론의 영주 1권(1화)
제1장 아스라이 멀어지는 꿈이어라(1)
슈가가가각.
“끄으으윽.”
털썩.
사내의 검에 또 한 명의 무인이 쓰러졌다.
사내가 걸어온 길에는 말 그대로 시산혈해. 붉은 피가 고여 흐르고 검을 쥔 무인들의 차가운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단무영. 혈루검의 주인이자 이제는 멸문해 버린 단씨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한때 혈루검으로 강호에 그 이름을 떨쳤던 단씨 가문이었지만 단목경 이후 실전되어 버린 혈루검의 검보가 단무영의 아비인 단궁민에게 전해지면서 참극은 시작된다.
단궁민은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다 우연히 혈루검의 검보를 발견하고는 극비리에 부쳤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강호에서는 한때 천하제일검이라 불렸던 혈루검에 대한 욕심에 눈 먼 자들은 하나둘 단씨 가문으로 모여들게 된다.
그중에는 명문 정파를 자처하며 강호 도의를 논하는 자들까지 합세했으니 그 중심에는 황보세가가 있었다.
황보단천은 야심이 큰 인물로 황보세가를 오대세가뿐 아니라 구대문파마저 올라서는 가문으로 키우고자 혈루검에 눈독을 들였다. 욕심이 지나치면 눈이 머는 법.
황보단천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낭인들과 사파의 잡배들을 동원해 단씨 가문을 습격했고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그들에 섞여 단씨 가문에서 숨 쉬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도륙해 버렸다.
단씨 가문의 후예들은 물론 하인들과 인근에 사는 민초들마저 가차없이 숨통을 끊어 버렸다.
천운인지 단궁민의 일점혈육인 단무영만이 검보를 손에 쥔 채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참상 속에서 살아남았으니 황보단천은 아무런 소득없이 단씨 가문을 멸문시켜 버린 것이다.
한때 단씨 가문의 멸문을 놓고 강호에서는 큰 소동이 있었지만 세월과 함께 묻히며 단씨 가문에 대해서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둘 줄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보다 붉은 검을 휘두르며 황보세가에 난입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십 년 전 단씨 가문의 혈겁에서 살아남은 단무영이었다.
단무영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태양보다 붉게 빛나는 붉은 강기가 번쩍일 때마다 주위는 피와 살점이 흩뿌려졌다.
황보단천이 그렇게나 두려워했고 갖기를 열망했던 혈루검이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슈아아아앙!
푸화하하학!
피보다 붉은 검이 허공을 가르자 살갗이 벌어지며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커허허헉!”
“으아아악!”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하나둘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무너져 갔다.
검을 휘두른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두려움에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붉은 검과 붉은 피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쏟아내거라! 네놈들 몸속에 흐르는 붉은 피를 모두 쏟아내거라!”
단무영은 눈앞에서 피를 쏟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는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온통 피범벅이 된 자신의 옷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희열마저 엿보였다. 그는 잔인함을 즐기고 있었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무인들의 고통의 비명은 단무영에게는 천상의 가락이나 다름없었다.
“으으으. 아, 악마 같은 놈!”
단무영의 앞을 막아선 무인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이들의 눈에 단무영은 인간이 아니었다. 피에 굶주린 세상 그 누구보다 잔혹한 악마의 모습일 뿐이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한 발 두 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크크크큭. 악마라! 그것도 좋겠지. 아니, 악마가 되어 주지. 나 단무영은 악마가 되어 줄 것이다!”
단무영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며 들썩거렸다. 도저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잔인했던 이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악마 같은 자들이 자신을 보며 악마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단무영의 혈루검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쉬이이이익.
츄아아아악.
자신을 악마라고 부르며 겁에 질려 있던 황보세가의 무인들의 목이 잘려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갔다. 가슴이 벌어지며 피가 철철 넘쳐흘렀다. 주위는 온통 피범벅이었고 제대로 성한 시신도 없을 만큼 단무영의 검은 잔혹했다.
“끄허허헉!”
“크으으윽!”
마지막으로 앞을 막아선 황보세가의 무인들도 결국 단무영의 앞에서 피를 쏟으며 무너졌다. 이미 목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바닥에서 부들부들 떠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끔찍함을 더해 주었다.
하지만 단무영의 눈에는 이러한 참상도 다르게 보였다.
“하하하하! 벌레같이 죽어 가라! 네놈들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씹으리라!”
단무영은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서 떨고 있는 목 없는 시신을 발로 짓눌렀다. 한동안 들썩이던 시신이 이내 그 움직임을 멈추고는 차갑게 식어 갔다.
단무영의 입가에는 냉혹하리만치 잔혹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단무영은 황보단천의 방문을 걷어차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슈우우욱.
단무영이 들어서는 순간 황보단천의 검이 단무영의 미간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휘이익.
단무영이 머리를 살짝 틀자 황보단천의 검은 단무영의 머리칼을 자르며 지나쳤다.
쉬리릭.
단무영의 머리칼을 스친 황보단천의 검이 방향을 바꾸어 횡으로 쓸며 단무영을 향했다.
“훗! 마지막 발악인가?”
단무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가의 무인들이 죽어 가는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황보단천을 그냥 죽이는 것은 너무 싱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발악을 해 주니 죽이는 재미가 쏠쏠해지는 것이다.
단무영의 혈루검은 어느새 황보단천의 검을 쳐 내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까가가가가강!
쇳소리가 터지며 불꽃이 튀었다. 황보단천은 혈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에 밀리며 중심을 잃고는 벽으로 기울어졌다.
끼기기기긱!
단무영은 혈루검에 더욱 힘을 주며 황보단천을 밀어붙였다.
황보단천은 가까스로 버텼지만 점차 힘에 밀리며 자신의 검날이 자신의 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물론 내력에서마저 압도적인 차이가 나고 있었다. 황보단천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 주게!”
황보단천은 싸움을 포기하고는 단무영에게 애원했다.
황보단천이 손에 힘을 빼자 단무영 역시 밀어붙이던 검을 떼었다.
“살려 달라?”
단무영의 입가에는 조소가 걸렸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단무영의 눈에서는 살기가 풀풀 풍겨 나왔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자네가 평생 놀고먹을 만큼 재물을 주겠네. 무엇을 원하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게.”
황보단천은 무릎을 꿇고는 간절하게 빌었다. 살려만 준다면 뭐든 줄 수 있었고 뭐든 해 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황보세가를 등에 업고 권세를 자랑하던 황보단천은 이미 없었다. 지금은 살기 위해 절이라도 할 수 있는 나약하고 불쌍한 범인일 뿐이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냐고?”
슈아아악.
털썩.
단무영의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의 혈루검이 핏빛을 뿌렸다. 혈루검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무언가 둔탁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보단천의 오른팔이었다.
“끄아아아아!”
황보단천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웅크렸다. 바닥에서 펄떡거리는 자신의 팔을 본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황보단천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아, 아버님!”
방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는 황보단천의 팔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황보단천의 팔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며 방 안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후후. 고작 팔 하나로 그리 호들갑을 떨어서야 쓰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황보단천과 그의 처자식들이 기겁을 하는 모습에 단무영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이었다. 이제부터가 단무영이 공연할 본무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것으로 보아 본무대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제, 제발 부탁하네. 목숨만은… 제발…….”
황보단천은 남은 왼팔로 단무영의 다리를 부여잡고는 다시 한 번 목숨을 구걸했다. 황보단천의 눈가에는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푸우우욱.
“끄으으윽!”
단무영은 아래를 흘끗 보더니 자신의 다리를 잡고 애원하는 황보단천의 왼팔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황보단천의 입에서는 괴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찌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단무영의 검이 속살을 가르며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살점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황보단천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왼팔을 파고들며 서서히 갈라 가는 그의 검이 악마의 이빨처럼 느껴졌다. 황보단천은 너무도 극심한 고통에 마치 경련을 하듯 몸을 들썩였다.
“후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구나.”
황보단천이 괴로워하자 단무영의 웃음은 가시지 않았다. 황보단천이 괴로워할수록 단무영은 더욱 희열을 느꼈다.
“제발 부탁이에요! 남편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사죄드릴게요! 용서해 주세요!”
“저희 아버님을 용서해 주세요! 돌이킬 수는 없지만 평생을 단씨 가문에 속죄하며 살겠어요! 그러니 제발 아버님을 살려 주세요! 흑흑!”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은 울며불며 단무영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질만큼 황보단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정신이 몽롱한 것이 과연 이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인지조차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용서해 달라고? 내 아버지는 혈루검에 눈이 먼 이 잡배 같은 놈에게 애원하셨다. 아무런 잘못도 없음에도 제발 살려 달라고. 이 짐승 같은 인간이 어떻게 했는지도 알고 있느냐?”
부인과 딸이 애원하자 단무영의 얼굴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지난날 황보단천에게 죽은 아버지 단궁민이 떠오른 것이다. 아무런 원한이 없음에도 가문의 씨를 말려 버린 황보단천. 황보단천에게 애원하며 목숨을 구걸했던 아버지 단궁민의 처절하고도 끔찍했던 장면은 단무영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한이 되었다.
“제… 제발 그만. 차라리 날 죽이게.”
황보단천은 괴로움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단무영의 입에서 흘러나올 이야기만큼은 막고 싶었다. 지금까지 목숨을 구걸했다면 이제는 목숨을 끊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부인과 딸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만행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처자식 앞이라서? 네놈이 한 짓이 얼마나 파렴치한 짐승 같은 짓인지는 아는구나.”
황보단천의 애절한 눈빛에 단무영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도륙한 자가 자신의 가족들 앞에서는 성인군자로 남으려는 이기심이 더욱 가증스럽게 보인 것이다.
“인두겁을 쓴 이 짐승은 내 아버지에게 혈루검의 행방을 말하게 하기 위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짓거리들을 저질렀다.”
단무영은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을 바라보며 지난날 황보단천이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황보단천은 애절한 눈빛으로 단무영에게 애원했지만 들어줄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팔 하나, 그리고 나머지 팔 하나, 다음에는 양다리를 하나씩 잘라냈지.”
단무영은 황보단천이 아버지 단궁민에게 했던 일들을 차례차례 이야기했다.
“그, 그런…….”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