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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2화)
제1장 아스라이 멀어지는 꿈이어라(2)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갔다. 집에서는 그렇게 인자하고 자상했던 인물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니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 제발 날 죽여다오!”
황보단천은 악을 쓰며 단무영에게 죽여 달라며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은 부인과 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슈가가가각.
“끄으으으윽!”
단무영은 황보단천이 아버지 단궁민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이야기하며 똑같이 나머지 왼팔을 잘라 버렸다.
황보단천은 다시 한 번 고통에 찬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아, 아버님……. 흑흑.”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황보단천의 양팔이 바닥에 떨어져 피를 뿌리고 있었다. 이미 바닥은 황보단천의 피로 흥건했다.
“나의 아버지는 끝까지 혈루검의 행방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혈루검의 행방을 말하는 순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지. 나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그 끔찍한 고통을 참으시며 아버지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셨다.”
단무영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당장에라도 황보단천을 찢어 죽일 것 같은 살기 사이에 묻어 나는 그리움과 애잔함. 자신을 살리고자 죽지도 못하고 그 엄청난 고통을 끝까지 이겨내야 했던 단궁민의 아픔과 사랑. 단무영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네 아비인 황보단천은 아버지의 입을 열게 할 다른 방법을 생각했지.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아버지가 의식을 잃지 않도록 출혈을 멈추게 하고 양 눈꺼풀을 잘라내 눈을 감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단무영은 계속해서 황보단천이 아버지 단궁민에게 저질렀던 그 잔인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단무영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의 얼굴은 점차 사색이 되어 갔다. 과연 인간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무영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차마 입에 담기 힐들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의 눈에서는 어느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후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나의 어머니를 겁탈한 후 잔인하게 죽였다. 또한 나의 누님을 황보세가의 무인들과 낭인들이 돌아가며 겁탈했지. 결국 누님은 혀를 깨무셨다.”
단무영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일들만 해도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건만 이어지는 단무영의 이야기는 더욱 그 잔인함을 더해 갔다.
단무영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무영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끔찍하게 죽어 간 어머니와 누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런…….”
“어, 어떻게…….”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는 할 말을 잃었다.
이는 단순한 원수지간을 넘어선 것이었다. 무인 간에는 죽고 죽이는 일이 흔한 일이다. 그러한 정도는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단무영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죽고 죽이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이는 한 인간을, 한 가문을 완전하게 풍비박산 내는 그런 짐승 같은 짓인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 왔던 황보단천의 너그럽던 모습은 황보단천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셔야만 했고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리셨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지. 할아버님의 유품을 발견했던 비밀 벽장에서.”
단무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그날의 일들이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무영을 괴롭히고 있었다. 장난삼아 들어갔던 할아버지의 벽장. 그곳은 단목경이 만들어 놓은 비밀 공간이었다.
단목경은 그곳에 혈루검을 보관했고 자신의 아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혈루검은 천하제일검으로 불릴 만큼 가공했지만 그만큼 강호에 적을 많이 둘 수밖에 없었다. 또한 너무도 잔인하여 심마에 들기라도 한다면 대살성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단목경은 자신을 끝으로 더 이상 혈루검이 세상에 남지 않도록 없애 버리려고 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한 채 비밀 공간에 보관해 둔 것이다.
그러던 것을 단무영이 숨바꼭질을 하며 장난을 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단궁민은 그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궁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고 강호는 혈루검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혈겁이 일어난 그날도 단무영은 단목경이 만들어 놓은 비밀 공간에 들어가 놀고 있었고 그때 황보단천이 들이닥쳐 아버지인 단궁민을 비롯해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단무영은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죽어 가는 가족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울고 또 울어야 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생긴일인지도 모른다고 자책하며 그렇게 이십 년의 세월을 홀로 보낸 것이다.
“아아아!”
황보단천의 부인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참상을 저지른 장본인이 자신의 남편이 아닌가.
“이래도 내게 짐승 같은 네 남편과 네 아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느냐?”
단무영은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에게 물었다.
단무영의 눈은 울고 있었다.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은 줄은 정말… 몰랐어요. 흐흐흑.”
“흐흑. 그런 끔찍한 일들이…….”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는 그저 고개를 떨구며 흐느꼈다.
이제는 황보단천을 살려 달라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살려 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무영의 아픔과 고통이 느껴지는데 그 깊고도 깊은 한이 느껴지는데 어찌 자신의 가족을 도륙한 사람을 살려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똑같이 해 줄 것이다. 이놈이 보는 앞에서 마누라와 딸년을 겁탈한 후 잔인하게 죽여 줄 것이다. 이 황보세가에 발을 디뎠던 자라면 그 누구라도 모두 죽일 것이다.”
단무영의 눈에는 다시금 진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단무영은 자신의 슬픔을 복수로 되풀이할 생각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만들어 준다면 자신의 가슴 깊이 응어리진 이 한과 억울함이 풀어질 것만 같았다. 황보단천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면 이십 년간 고통받았던 자신의 마음이 보상받을 것 같았다.
“남편을 대신해서… 사죄드리겠어요. 이제는 노여움에서 벗어나시길 바라요. 죄송해요. 이것밖에는…….”
푸우우욱.
황보단천의 부인은 단무영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이제는 단무영이 무섭지 않았다. 단무영이 아파하며 우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마음도 울고 있었다.
단무영의 한과 고통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황보단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한 가지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황보단천의 부인은 단검을 꺼내서 자신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미… 미안…….”
황보단천의 부인은 단무영에게 마지막 사죄의 말을 하려 했지만 마저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여… 여보!”
“어머니!”
황보단천과 딸 설지는 가슴이 메어 왔다.
설마 자결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누가 네년 맘대로 죽으라더냐? 누가!”
단무영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며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이렇게 쉽고 편하게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당했던 것처럼 황보단천의 눈앞에서 그렇게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 단무영은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황보단천의 부인을 향해 혈루검을 치켜올렸다.
스르르륵.
이때 설지가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하더니 이내 알몸이 되어 단무영 앞에 섰다.
“뭐, 뭐하는 짓이냐?”
단무영은 당황하며 설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뜬금없이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당신의 한을 풀 수만 있다면… 당신의 가족에게 사죄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저를 범하세요. 그리고… 죽이세요. 그걸로 당신에게 맺힌 한을 풀어 주세요.”
설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단무영을 바라보았다.
단무영에 대한 증오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단무영이 한없이 가엽게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받았던 그 깊고 깊은 상처와 한을 풀어 주고 싶었다.
단무영의 누님이 당했던 대로 자신이 당해 준다면 그래서 단무영의 깊은 원한이 풀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아버지의 죗값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었다.
“흥! 네년 잔머리에 넘어갈 것 같더냐? 네년이 그렇게 나오면 내가 용서할 줄 알았더냐? 오냐 좋다.”
덥썩.
단무영은 그런 설지의 모습에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설지의 가슴을 덥썩 쥐었다.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과연 언제까지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설지는 단무영이 가슴을 주무르는데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철퍼덕.
단무영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는 식으로 설지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그 위로 덮쳤다. 단무영이 무엇을 하든 설지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단무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단무영은 머리를 움켜쥐고는 악을 썼다.
황보단천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이 죽었고 이제는 설지를 겁탈할 차례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황보단천의 눈앞에서 하나뿐인 외동딸을 잔인하게 겁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조금도 마음이 뚫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은 더욱 답답하고 기분은 더러웠다.
“미… 미안하네. 내가 죽을 죄를 지었네. 잠시 눈이 멀어서 끔찍한 짓을……. 크흐흐흑.”
황보단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간의 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잔인했던 황보단천이 처음으로 울고 있었다.
“닥쳐라! 네놈은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단무영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보단천만큼은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악마를 처단할 뿐인 것이다.
퍽! 퍽! 퍽! 퍽!
단무영은 황보단천을 마구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무작정 휘둘렀다.
하지만 황보단천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부인과 딸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추악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끄흐흐흑! 으아아아아!”
단무영의 가슴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왔다. 단무영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순간 가장 괴롭고 고통을 받는 사람은 자신인 것이다. 황보단천보다 자신이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당신께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그 깊은 한은 결국 당신마저 망가뜨릴 거예요. 부디 제 목숨으로 그 노여움만이라도 풀어 주기를 간곡히 바라요.”
푸우우욱.
설지는 괴로워하는 단무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설지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을 마지막으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서, 설지야아아아! 끄아아아아!”
딸 설지마저 목숨을 끊자 황보단천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회환. 황보단천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썼다.
“아아! 이 더러운 기분은 뭐란 말이냐! 똑같이 갚아 주면 다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더러운 기분은 뭔가…….”
단무영은 혼란스러웠다.
복수를 했는데도 가슴속의 한은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찜찜하고 더욱 가슴을 조여 왔다. 단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지금의 이 마음을 부정하고 싶었다.
“나도 죽여라! 이제 네놈 뜻대로 되었으니 만족할 게 아니냐? 더 이상 내게서 가져갈 것도 없다! 마지막 남은 내 목숨을 취하거라!”
황보단천은 단무영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마지막 남은 설아마저 죽고 나니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무영에게 저질렀던 잘못이 어떠한 것이든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네놈만큼은… 어떠한 이유로도 살려 둘 수 없다. 생각 같아서는 네놈을 죽이지 않고 평생 괴로워하도록 하고 싶지만… 네놈의 처자식을 봐서 자비를 베풀어 주마.”
단무영은 황보단천을 노려보며 혈루검을 치켜올렸다.
부인과 딸을 잃고 이제는 세가마저 멸문 직전. 양팔마저 없는 황보단천이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 살려 둔다면 더욱 고통받으며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단무영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의 부인과 딸이 단무영의 생각을 바꿔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