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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3화)
제1장 아스라이 멀어지는 꿈이어라(3)
“자비? 크하하하! 우습구나! 네놈이 지금 자비라고 했느냐? 네놈이 한 짓거리를 돌아보거라! 네놈이 나와 다른 게 무엇이냐? 네놈도 나와 같느니라! 피에 굶주린 악귀일 뿐이니라!”
자비라는 말에 황보단천은 가소롭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지금까지 저지른 이 잔인하고도 끔찍한 일들을 해 놓고도 자비를 운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자신을 욕하며 증오하지만 황보단천이 보기에는 단무영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가의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저항할 힘도 없는 부인과 딸까지 죽게 만든 살인귀일 뿐이었다.
그러한 살인귀가 자비 타령을 한다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인 것이다. 황보단천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단무영을 향해 욕설을 해댔다.
“닥쳐라! 이 모든 것이 네놈이 저지른 죄의 대가일 뿐이다.”
단무영은 그런 황보단천의 말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은 황보단천과는 분명 다르다. 자신이 행한 일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일 뿐. 아무런 죄없는 단씨 가문을 멸문시킨 황보단천의 행위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 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 용서받을 수 없겠지. 하나 네놈 역시 마찬가지. 네놈도 평생을 끔찍한 기억 속에서 살게 되리라. 내 저승에 가서도 네놈을 저주하리라!”
황보단천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단무영을 몰아붙였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이나 단무영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황보단천은 마지막까지 단무영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슈아아아악.
털썩.
혈루검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황보단천의 목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놈만큼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단무영은 떨어진 황보단천의 목을 향해 나직하게 읊조렸다.
제2장 다시 찾은 일상의 따사로움(1)
“으으으으.”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잠을 뒤척이는 사내. 그는 탐스러운 금발을 베개에 파묻고는 괴로워했다.
그의 이름은 카라스. 르노와르 상단주 하노스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단무영의 환생이었다.
단무영은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또 다른 세상에 태어났지만 매번 끔찍했던 기억은 악몽이 되어 카라스를 괴롭혔다.
“으아아악! 헉헉헉!”
카라스는 오늘도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었다.
“또 같은 꿈이군. 휴우, 언제나 이 악몽에서 벗어날까. 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건만.”
카라스는 이제는 전생의 일들을 잊고 싶었지만 잊을만 하면 종종 꿈에서 이렇게 괴롭히곤 했다. 보통은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꾸는 악몽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그 주기가 잦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이 처참히 살해당하는 순간들, 그리고 황보단천에게 복수하는 그 순간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카라스를 괴롭히고 있었다.
“도련님! 또 늦잠 주무시는거예요? 주인님께서 성화세요. 빨리 나오세요.”
카라스가 잠이 덜 깨 부비적거리자 어느새 들어왔는지 하녀 리아는 이불을 걷어 버리고는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리아! 아침부터 너무하잖아. 좀 봐주라고.”
카라스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앓는 소리를 했다.
매번 아침마다 벌어지는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장면이기도 했다. 전생의 아픈 기억에 몸을 떨며 괴로워하다가도 이렇듯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는 모습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전생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카라스가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도련님! 아침이라니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세욧!”
리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카라스를 깨울 때마다 한 번도 좋게 끝난 일이 없었다.
리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잡아먹을 듯이 카라스를 노려보았다.
“오늘? 무슨 날인데?”
평소보다 과한 리아의 반응에 카라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아휴 정말, 도련님 때문에 못 살아! 오늘 수도로 떠나시는 날이잖아욧! 국왕 폐하를 뵙고 드디어 주인님께서 학수고대하시던 남작이 되시러 가셔야지욧!”
리아는 가슴을 탕탕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헤론 영지의 상단 중 하나인 르노와르 상단의 경사스러운 날이 아닌가. 바로 카라스가 남작의 작위를 받으러 국왕을 알현하러 가는 날인 것이다. 이런 위대하고도 성스러운 날을 정작 당사자인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다니 이는 크나큰 르노와르 상단의 집안에서는 커다란 죄악이었다.
“아, 그렇지. 에휴, 아버님도 참. 아무리 돈이 넘쳐도 그렇지 때가 어느 땐데 돈으로 작위를 사시는지 원.”
그제서야 카라스도 리아가 왜 이리도 극성인지 알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숨도 새어 나왔다. 평민 출신인 카라스의 부친은 대대로 상인이었고 하노스의 대에 이르러 르노와르 상단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늘상 신분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하노스는 어떻게 해서든 자식인 카라스 만큼은 귀족으로 만들고 싶어 고위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갖은 로비를 한 것이다.
그 덕에 이렇게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되었으니 하노스로서는 평생의 꿈을 이룬 것이다. 카라스는 아버지인 하노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돈으로 작위를 받으러 간다는 것이 멋쩍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말 마세요, 주인님의 평생 소원이신데. 어서 나오세요. 주인님께서 아침부터 기다리는 중이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리아의 재촉에 카라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차비를 해야 했다.
카라스는 대충 씻고는 여행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왔다. 늦잠을 자서인지 뱃속에서는 먹을 걸 넣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오, 아들! 잠은 잘 잤고?”
거실에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
상단주 하노스는 카라스를 보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아침부터 카라스가 나오기를 종일 기다린 것이다.
“아버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카라스는 아직도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사실 겉으로는 이렇게 귀찮아 하는 듯 보이지만 카라스의 마음속은 달랐다. 언제나 살갑게 따뜻하게 대해 주는 하노스 부부. 이제는 자신의 부모님인 이들의 정겨운 모습은 카라스에게는 너무도 큰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새로운 부모를 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끔찍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카라스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사랑을 베푸는 하노스 부부의 모습은 카라스의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었고 이제는 카라스도 이들을 전생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부인! 아직 멀었소?”
“다 됐어요. 지금 가져가요.”
아버지의 재촉에 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아버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얼른 좀 가져오라니까!”
다시 한 번 버럭 소리를 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였다.
“지금 가잖아요. 당신도 참. 얘야, 이거 마시고 가렴.”
어머니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들고 있는 그릇을 카라스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카라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엇에 쓰는 것인지는 몰라도 안에 담긴 내용물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아, 글쎄 너희 아버지가 너 준다고 아침부터 이 난리지 뭐냐? 수도까지 먼 길인데 어서 마시거라. 보약이란다.”
어머니는 카라스에게 어서 마시도록 재촉했다.
먼 길 떠나는 아들을 위해 보약을 손수 만드신 것이다.
“보약이요? 보약이면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드셔야지 건강한 제가 무슨 보약을…….”
카라스는 손을 저으며 그릇을 다시 내밀었다.
창창한 나이에 왠 보약이란 말인가. 몸에 좋은 것이라면 당연히 연로하신 부모님 먼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효자 카라스였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역시나 풍겨 나오는 냄새가 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 것이다.
“어허, 네가 보통 아들이냐? 이제 남작 나리가 될 아들이지. 어서 먹으라는데도!”
아버지는 짐짓 큰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카라스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 어서 먹으렴. 네 아버지 속 타서 쓰러지시겠다.”
“에휴, 알았어요.”
어머니까지 거들자 카라스도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그릇을 받아들고는 그대로 한입에 마셔 버렸다. 냄새조차 맡지 않고 털어 넣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으리라.
꿀꺽꿀꺽.
“크으으! 뭔데 이렇게 써요?”
그릇을 다 비운 카라스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써도써도 이렇게 쓰랴. 게다가 뒷맛은 비리기까지 했으니 카라스는 과연 내용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른다. 시장에서 몸에 좋다는 건 전부 다 사서 끓였으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몸에 좋다고 하는 건 전부 사서 잡탕을 끓여 버렸던 것이다. 그중에는 생전 처음 본 것들도 섞여 있었으니 알 리가 없었다.
“아, 아버지? 그럼 뭔지도 모르시고 그냥 다 끓이신 거예요?”
카라스는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보약이란 말인가. 카라스는 과연 수도로 가는 길에 어떻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부터 들었다.
“여기가 어디냐? 없는 것 없다는 헤론 영지가 아니냐? 대륙의 모든 상단과 희귀한 물건들이 죄다 모여드는 곳인데 우리 아들 몸보신 시키지도 못할까 봐?”
아버지는 버럭 성을 내는 척 언성을 높였다.
사실 이곳 헤론 영지는 요하네스 왕국에서 가장 상업이 번성한 중심 도시였고 아젤란 대륙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무역도시였다.
요하네스 왕국의 영지였지만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고 덕분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각 상단들은 스스로 위험을 지켜야 했지만 그만큼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헤론 영지에서 만큼은 적과 아군이 따로 없었고 국적이 따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대륙의 모든 물품은 헤론 영지를 통해 이동했고 헤론 영지에는 없는 물건이라면 대륙 그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게 아니라…….”
“이제 가 보거라.”
카라스가 밍기적대며 뭔가 말할거리를 찾고 있을 때 아버지인 하노스는 카라스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빨리 남작이 되서 돌아올 카라스에 대한 기대감에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네? 저 아직 아침도 못 먹었는데요?”
카라스는 등을 떠밀려 나가면서도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루 세 끼만큼 좋은 보약이 어디 있으랴. 보약만 주고 식사를 안 주는 게 어디 있느냔 말이다.
“어허!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지. 보약 마셨으니까 한 끼 굶어도 될 게야. 어서 국왕 폐하 뵙고 남작이 되어 돌아오너라. 이제 헤론 영지의 주인은 바로 너다. 푸하하하!”
아버지 하노스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큰소리로 웃어 젖히며 카라스를 계속해서 밀어냈다.
“하아, 아버지…….”
카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식사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도련님, 여기요.”
“이, 이건 또 뭐야?”
카라스가 집을 나서려는 찰나 하녀 리아가 어느샌가 나타나 커다란 여행 가방을 안겨 주었다. 말이 여행 가방이지 피난갈 때나 필요함직한 커다란 짐 꾸러미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수도까지 가실 여비하고 갈아입을 옷가지들, 그리고 간식거리 좀 준비했어요.”
하녀 리아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공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결론인즉슨 이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것은 카라스가 먹을 간식이라는 소리였다.
“무슨 간식을 얼마나 준비했기에 짐이 이렇게 많아? 이걸 나보고 다 들고 가라고?”
카라스는 기가 찬 표정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이걸 들고 가면 수도까지 가는데 배는 걸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도중에 지쳐서 쓰러질지도.
“그럼 어떡해요? 도련님 출출하실까 봐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든 건데 너무하세요. 흑.”
리아는 서운한 표정으로 홱 고개를 돌리고는 훌쩍였다. 잠도 안 자며 정성스레 만든 음식이건만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도 서러운 모양이었다.
“리아! 그게 아니라…….”
카라스는 난감했다.
리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한 번이라도 이겨 본 일도 없었다. 괜히 자극해 봐야 득이 될 것이 없는 것이다.
“길 떠나면 고생이니 리아 말 듣거라. 인적도 없는 곳에서 허기라도 지면 어쩌려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배는 곯면 안 되지. 아암.”
아버지인 하노스는 리아의 편을 들어주며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면 그리도 생각이 깊은지 리아를 바라보는 하노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대견해 보였다.
“그런 분께서 아들 아침 식사도 안 주고 내쫓으세요?”
카라스는 다시 한 번 억울함을 표현해 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