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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4화)
제2장 다시 찾은 일상의 따사로움(2)


“어허! 보약 줬지 않느냐? 그리고 간식거리도 이렇게나 많이 챙겨 주는데 그런 말하면 못 쓴다.”
역시나 대답은 카라스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는 보약 하나로 모든 걸 퉁 치려고 하고 있었다.
“하아. 예, 예. 그럼 소자 국왕 폐하를 뵙고 남작이 되어 금의환향하겠사옵니다.”
카라스는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하고야말았다.
이제는 리아가 정성(?)스레 싸 준 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등에 지고 수도를 향한 머나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오냐, 우리 아들! 그럼 기대하마.”
“잘 다녀오렴.”
“도련님, 파이팅이에요!”
“하아.”
집을 나서는 카라스의 입에서는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카라스는 리아가 정성(?)스레 싸 준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짊어지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얼마나 많이 넣은지는 몰라도 족히 열 사람 이상은 먹을 수 있는 양이리라.
카라스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넘쳐 나는 부모님과 리아의 등쌀에 밀려 낑낑대며 머나먼 여정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데 별 수 있겠는가. 참고 이해할 수밖에.
“어이, 카라스!”
카라스가 뒤뚱뒤뚱 힘들게 걷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어릴적부터 단짝 친구인 하멜이었다.
“하멜! 잘 만났다. 너 배고프지?”
카라스는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는 하멜의 손을 덥썩 잡았다. 오늘따라 하멜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하멜은 멀뚱한 표정으로 카라스를 바라보았다.
“너 배고프잖아.”
“뭔 소리야? 지금 막 점심 먹고 오는 중인데.”
하멜은 얘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 그래도 금방 배고파지지 않을까?”
카라스는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물었다. 하멜이 아니면 이 고통을 누구와 분담한단 말인가.
“무슨 일인데 그래? 그 등에 있는 커다란 짐은 또 뭐고? 그러고 보니까 너 오늘 수도로 떠나는 날이라고 했나?”
뜬금없이 엉뚱한 소리만 하는 카라스의 모습에 하멜은 이상한 시선으로 카라스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발견했다. 하멜은 드디어 카라스가 이렇게 나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너도 알고 있구나.”
“야야,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이곳 헤론 영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걸? 너희 아버지가 한 달 전부터 자랑하지 않으신 곳이 없을 거다.”
“하아, 역시 그렇군.”
카라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미 헤론 영지에는 소문이 쫙 퍼진 것이다.
돈을 주고 작위를 산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카라스는 그동안 쉬쉬하며 하멜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었는데 이미 하멜을 비롯해 이곳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귀족이 되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던 아버지 하노스가 평생의 소원을 이뤘는데 입을 닫고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카라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뭘 그리 많이 싸 가냐? 수도가 가까운 곳도 아닌데 그걸 짊어지고 가려고? 그게 다 뭔데?”
하멜은 카라스가 등에 짊어진 여행 가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미 국왕 이하 귀족들에게 보낼 선물들은 상단을 통해 배달했을 텐데 카라스가 굳이 이 많은 짐을 지고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거? 휴우, 그러니까 이게 말이지. 수도까지 가는 동안 내가 배고플까 봐 우리 그 리아가 정성스레 싸 준 간식이라고나 할까?”
카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리아의 정성(?)스러운 만행에 대해 털어놓았다.
“풉. 리아 그 애는 여전하구나. 어릴 때부터 너라면 그저 못 챙겨줘서 안달이더니. 근데 이건 좀 심하다.”
리아라는 말에 하멜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리아가 비록 하녀였지만 카라스의 집안에서는 리아를 격이 없게 대해 주었다. 어릴적에는 카라스와 하멜, 그리고 리아는 소꿉친구나 다름없이 어울리며 온갖 말썽은 다 부리고 다녔었다.
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얼굴도 귀여웠고 성격도 명랑해서 사실 헤론 영지에서는 제법 인기있는 유명인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카라스에 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집착한다는 것 정도? 물론 카라스 입장에서는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이. 뭐 친구 간에 나눠 먹는 거야 괜찮겠지. 그러니까 니가 좀 가져가라.”
“야, 내가 가져갔다가 나중에 리아가 알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난 리아가 무섭다.”
하멜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릴적 카라스에게 챙겨 준 음식을 뺏어 먹었다가 리아에게 호되게 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 하멜이었다.
“천하의 경비대원 하멜이 리아를 무서워한다는 거야? 이거 실망인걸?”
카라스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하멜의 자존심을 긁어 보았다.
“천하의 경비대원 하멜이라도 리아는 무서워.”
하지만 하멜은 넘어가지 않았다. 하멜은 오싹하는 제스추어까지 취해 가며 엄살을 떨었다.
“그래서 지금 안 가져가겠다는 거냐?”
카라스는 이번에는 인상을 잔뜩 쓰며 방법을 바꿨다.
“친구로서 짐을 덜어 주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안 되겠다. 애꾸 파 놈들이 또 말썽을 피운다고 해서 다들 출동 명령이 떨어졌거든.”
하멜은 끝까지 거절했지만 조금은 미안했는지 사정 설명을 해 주었다.
하멜은 헤론 영지의 유일한 치안 기구인 경비대의 대원이었다.
헤론 영지는 수많은 나라와 상단들이 공존하는 곳이었기에 요하네스 왕국의 법 하나로만 다스리기에는 불협화음이 너무도 많았다.
더욱이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는 각국의 상단들을 지나치게 억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하네스 왕국의 재정의 상당량을 이곳 헤론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요하네스 왕국에서는 헤론 영지에 자리잡고 있는 상단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들간의 다툼에도 함부로 관여할 수가 없었다.
경비대라는 형식적인 기구를 만들어 최소한의 역할은 하고 있었지만 이미 상단들에게 경비대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곳 헤론 영지를 지배하는 것은 상단과 수많은 폭력 조직들이었고 이들이 곧 헤론 영지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애꾸 파 놈들? 그놈들 위험한데……. 조심해, 너무 나서지 말고.”
카라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헤론 영지에 기생하는 많은 조직들 중에서도 상당히 지저분한 조직이 바로 애꾸 파였다. 그들은 한마디로 기생충인 것이다.
“걱정 붙들어 매라. 우리야 그냥 형식적으로 가는 것뿐인데 뭘. 우리가 힘이 있냐? 빽이 있냐? 그놈들이 우릴 무서워하지도 않고.”
하멜은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주변 상인들의 신고가 들어와서 출동은 하지만 출동한다고 해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왠만하면 경비대의 체면을 봐서 양보해 주는 편이지만 대놓고 난장판을 친다면 경비대로서는 역부족인 것이다.
경비대원들도 그것을 알기에 왠만해서는 무력 충돌까지는 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는 편이었다.
“그러게 경비대는 왜 들어가서 고생이냐? 그냥 상단에서 일하면 좋잖아.”
카라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르노와르 상단주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가. 진작부터 상단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해도 하멜은 헤론 영지는 자신이 지켜야 한다면서 끝까지 경비대에 자원했던 것이다.
“나는 상단은 체질에 안 맞는 것 같다. 네 덕에 편하긴 하겠지만 영 적성에 안 맞는단 말이지. 나는 이렇게 힘 좀 쓰고 땀 좀 흘리는 게 좋다.”
하멜은 어깨를 붕붕 돌리며 힘깨나 쓰는 척을 했다.
“말이 경비대지 아무런 힘도 못 쓰는데 무슨 적성에 맞냐? 괜히 밉보이면 보복이나 당하지.”
“야, 이제 이곳의 영주가 될 네가 그런 말하면 되겠냐? 네가 영주가 되면 그래도 네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우리 경비대인데.”
하멜은 정색을 하며 카라스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경비대가 비록 힘을 쓰지는 못하지만 엄연히 요하네스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기관이었다.
지금이야 영주 자리가 공석이었지만 카라스가 영주가 되어서 돌아온다면 경비대는 카라스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수많은 나라와 상단들이 밀집해 있는 거대 상업 도시인 헤론 영지의 영주가 가지는 병력치고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지만.
사실 헤론 영지는 요하네스 왕국으로서는 양날의 검이나 마친가지인 곳이었다. 헤론 영지의 규모나 거래 내역으로 본다면 너도나도 이곳의 영주로 오기를 자청할 것 같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고위 귀족들은 헤론 영지에 서로 오지 않으려고 난리였고 힘에 밀려 이곳으로 오게 된 귀족들도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더욱이 몇몇 영주가 살해당한 후에는 헤론 영지는 한마디로 귀족들의 무덤이라 불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영주라고 해 봐야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알량한 경비대가 전부였고 이런 경비대로는 대규모 상단은커녕 폭력 조직조차 상대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쯤되니 이곳의 상단이나 폭력 조직들도 영주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었고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은 것이다.
가끔 폭급한 영주들은 분에 못 이겨 맞서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된 후에는 아예 헤론 영지의 영주로 오려고 하는 귀족 자체가 없는 것이다.
지난 십 년 동안 헤론 영지의 영주자리는 이러한 이유로 공석이 되어 왔고 이제 그 자리를 맡을 새로운 인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로 남작 카라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카라스도 헤론 영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다소 걱정은 되었지만 어차피 이곳은 자신의 고향. 남작의 작위를 받아 영주가 된다 해도 카라스는 헤론 영지를 다스린다거나 하는 일은 할 생각이 없었다. 작위를 받으러 가는 것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평생의 숙원이었기에 이렇게 눈 딱 감고 가게 된 것 뿐이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소원대로 귀족이 되었으니 자신은 그것으로 충분히 한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생활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 난 가 볼 테니까 얼른 영주되서 돌아와라.”
“알았다. 너도 아버지같이 말하냐? 괜히 나서지 말고 몸조심해. 그놈들 뒤끝 안 좋기로 유명한 놈들이니까.”
카라스는 다시 한 번 하멜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애꾸 파에 대해서는 카라스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비겁한 수단이라면 어떤 조직보다 선호했고 뒤통수를 노리는 것이 특기인 기생충 중의 최악의 기생충들이 바로 애꾸 파였다.
정의감에 불타는 하멜이 괜한 일에 휘말려 애꾸 파의 표적이 될까 카라스는 왠지 걱정스러웠다.
“걱정 말게 친구! 그럼 리아가 싸 준 간식 많이 먹게나. 하하하!”
하멜은 환하게 웃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카라스를 한 번 놀려 주고는 제 갈 길을 갔다.
“뭐야? 으이구. 내가 저런 놈을 친구라고 걱정해 주다니.”
마지막까지 한 방 먹이고 가는 하멜의 뒷모습에 카라스는 약오른 듯 투덜대고는 수도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제3장 남작을 향한 기나긴 여정에 발을 딛다(1)


헤론 영지를 떠난 카라스는 낑낑대며 땀을 흘렸다. 당장에라도 짐을 털어 버리고 싶었지만 싸 준 정성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카라스는 일단 짐을 줄이기로 했다.
어차피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은 보약으로 때웠으니 뱃속은 비어 있을 터, 들고 가는 것보다야 뱃속에 넣어 가는 것이 한결 편하리라.
카라스는 여행 가방을 내려 놓고는 이것저것 꺼내 놓기 시작했다. 여행 가방이 무슨 마술보따리인지 하나 가득 꺼냈음에도 가방 안에는 아직도 먹을 것으로 꽉 차 있었다.
“하아. 이 많은 걸 만든 것도 신기하지만 이 안에 다 넣은 게 더 대단하네.”
카라스는 리아의 능력에 새삼 경의를 표하며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허리춤을 풀었다. 기왕 먹는 것 최대한 많이 먹어 볼 심산이었다.
“젊은 녀석이 인정머리가 없구먼. 에잉.”
이때 등 뒤에서 왠 노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카라스는 뭔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 많은 걸 혼자 처먹으려고? 요즘 것들은 노인을 공경할 줄 몰라서 탈이야. 그저 제 뱃속만 뱃속이지. 저런 싹퉁머리 없는 놈은 그저 열두 날은 매달아 굶겨야 하는데.”
노인은 다짜고짜 카라스에게 욕질을 해댔다. 노인은 카라스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앞 뒤 없이 쌍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노인장도 드시려우?”
카라스는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카라스의 말투도 평소의 그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보았다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카라스의 말투는 거칠었다.
사실 카라스는 전생을 살 동안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는 거의 없이 지내 왔다. 어려서부터 가족이 참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이후는 혈루검을 수련하며 이십 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성격이나 말투 역시 누구보다 거칠고 살벌했던 것이다. 그런 카라스가 이번만큼은 전생에서 누려 보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자제하며 바꾸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대의 저돌적인 공격을 받게 되면 카라스의 본성이 절로 발동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