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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5화)
제3장 남작을 향한 기나긴 여정에 발을 딛다(2)
“주면 안 먹을까? 물을 걸 물어야지. 쯧쯧.”
노인장은 당황하지도 주눅들지도 않은 채 자신과 같은 말투로 받아치는 카라스의 모습에 잠시 주춤했지만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드시구랴. 누가 말리나?”
카라스는 그런 노인의 말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무척이나 태연했다.
“그래도 인정머리는 있구먼. 복 받을게야.”
노인장의 욕질을 하거나 덤벼들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비록 말투는 싸가지가 없었지만 선뜻 음식을 베푸는 모습에 노인의 한풀 꺾였다.
“헤론 영지에서 오는 게냐?”
노인은 슬그머니 카라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말할 시간 있으면 빨리 드슈. 이걸 언제 다 먹으려고.”
카라스는 귀찮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는 먹는 데에 열중했다.
“고놈 참, 말하는 본새가 참신하구먼.”
노인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카라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선뜻 호의를 베푸는 걸로 봐서는 착해 보이기도 하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막장 같기도 한 것이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노인장은 어디서 오슈?”
카라스는 노인의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고놈 참. 그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는 게냐? 인근에 헤론 영지 말고 다른 영지도 있더냐?”
노인은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카라스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빈정댔다.
“노인장이 먼저 물었잖수?”
하지만 카라스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놈 빠닥빠닥 말대꾸하는 것 좀 보소.”
노인은 살살 말꼬리를 잡으며 할 말은 다하면서도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카라스가 그렇게 얄미워 보였다. 결국 노인이 먼저 언성을 높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쳇! 그런데 노인장은 첨 보는 것 같은데 어느 상단이오?”
“네놈이 헤론 영지 사람들은 다 아느냐? 이놈 이제 보니 머리만 나쁜 게 아니라 신기까지 있는 게냐?”
노인은 카라스의 말꼬리 하나하나를 붙들고 늘어지며 카라스에게 욕질을 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아마도 작정하고 카라스를 흥분시키려는 듯했다.
“거참, 노인장하고는. 내가 상단 사람들은 대부분 아니 하는 말 아니오? 노인네가 죽을 때가 다 됐나, 말귀가 어두워?”
카라스는 조금도 찌푸리지 않은 채 오히려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나 말투는 노인과 막상막하였다.
“뭬, 뭬야? 이런 기름에 튀겨 먹을 놈을 봤나? 네놈부터 말해 보거라. 이 많은 걸 잔뜩 짊어지고 혼자 소풍이라도 가는 게냐?”
결국 또다시 흥분하는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또다시 언성이 높아졌다.
“나야 뭐 알 것 없수다. 노인장은 실컷 먹기나 하슈.”
노인이 흥분해서 방방뛰자 카라스는 관심없다는 듯 다시 먹는 데에 집중했다.
“네놈 이름은 어떻게 되누?”
결국 노인은 다시금 꼬리를 내리며 슬그머니 카라스의 눈치를 살폈다.
“노인장이 참 궁금한 것도 많수. 그리 궁금한 게 많아서야 어디 이 세상에 남아 있겠수? 저승 궁금해서 얼른 가 봐야지.”
카라스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노인의 속을 박박 긁으며 말꼬리를 잡았다.
“예끼 놈. 어른이 물어 보면 냉큼 대답할 것이지 어디서 싹퉁머리 없이 빠닥빠닥 대드누?”
노인장은 또다시 방방 뛰며 카라스에게 삿대질을 했다. 카라스와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노인의 혈압은 무한대로 상승하고 있었다.
“카라스요. 됐수?”
“이름 한 번 까칠한 게 네놈 면상이랑 꼭 닮았구나.”
역시나 이름 가지고도 한 번 걸고 넘어가는 노인이었다.
“노인장 나한테 무슨 원한 있수? 거 보자마자 시비요? 난 이렇게 먹을 것까지 나눠 주는구만.”
카라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주었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 같아 대답해 주었으면 그건 분명 고마워할 일이었다. 노인처럼 이렇게 욕질을 해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헤론 영지의 코흘리개도 아는 일인 것이다.
“그나마 그것 때문에 네놈 목숨이 붙어 있는 줄 알고 고마워해야 할 게야. 예끼 놈.”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오히려 카라스가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뭐요?”
카라스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잘 먹고 간다. 나머지는 네놈 혼자 실컷 처먹거라. 클클클.”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으로 욕질 한 번을 하고는 유유히 돌아섰다.
“이, 이 노인네가 정말!”
마지막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던 카라스도 이번에는 욱했는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카라스는 노인을 향해 제대로 된 욕질을 해 볼 심산으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미 노인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힐끔 돌아보며 카라스의 속을 한 번 더 긁는 노인이었다.
“카라스라… 내 그 참신한 면상 기억해 둠세. 클클클.”
카라스에게는 완전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격이었다.
그렇게 괴상한 노인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카라스는 남은 음식들을 다시 가방에 넣고는 길을 떠났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등장했다.
“멈춰라!”
“이건 또 뭐지?”
카라스는 시키는 대로 멈춘 후 돌아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기가 철철 넘치는 사내들이 칼이며 온갖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는 섬세함까지.
“네 이놈! 가진 것을 다 내놓는다면 목숨만을 살려 주겠다!”
그중 한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카라스를 위협했다.
“설마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자존심은 있다 이것이냐?”
또 다른 하나는 카라스를 경계하며 싸울 태세였다.
하지만 카라스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져가라!”
카라스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마음속으로는 후련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너무도 순순히 말을 듣자 복면사내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당황했다.
“가진 것 다 내놓으라며? 가져가라고.”
“허우대는 멀쩡한 놈이 반항하는 시늉도 해 보지 않고 꼬리를 내리겠다는 것이냐?”
카라스가 너무도 말을 잘 듣자 복면사내는 오히려 카라스를 나무라고 있었다. 이건 예상한 각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라고 해서 주겠다는데 왜 그러지?”
카라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멀뚱하게 복면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이 될 놈이 그렇게…….”
복면사내는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라? 내가 귀족이 되려고 가는 걸 어떻게 알았지?”
카라스는 복면사내 앞으로 다가가 불쑥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처음 만난 강도가 자신이 귀족이 된다는 걸 어찌 알았을까.
“그게… 말이 많다! 척하면 척 아니냐? 정말 덤비지 않을 것이냐?”
복면 사내는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다시 한 번 카라스에게 물었다. 이대로 항복할 것인지를.
“응. 싸우기 싫다.”
카라스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의 의사를 표명했다.
“정말이냐? 이제 남작이 되면 돌아와 영주가 될 텐데 자존심 상하지도 않느냐? 돌아와서 확 뒤집을 생각 같은 건 혹시…….”
복면사내는 카라스의 너무도 순종적인 모습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무척이나 갈등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순종적이지만 영주가 되고서 어떻게 변할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다 귀찮아. 그냥 아버님 소원이라서 가는 거지 난 관심없다. 확뒤집고 말 것도 없고.”
카라스는 정말 귀찮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사실 이것은 카라스의 진심이었다. 자신은 영주가 되서 영지를 휘어잡을 생각도 없었고 지금처럼 가족과 친구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무엇보다 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구나. 무척이나 다행이구나. 커험.”
복면사내는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데 강도놈들이 왜 그런 게 궁금한데?”
딸꾹.
“그건 네가 알 것 없다. 그보다 왜 자꾸 반말을 하느냐? 꼬리를 내리려면 확실히 내려야지. 죽고 싶으냐?”
강도는 카라스의 물음에 크게 당황했는지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마치 모든 게 들통난 것처럼.
그러면서도 묘하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달라는 대로 다 주는 평화주의자 카라스가 지금껏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체면이 있는데 물건 다 뺏기는 마당에 존대말까지 써야 쓰겠냐? 너희들이 이해해라.”
카라스는 손을 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형님, 단단히 혼찌검을 내줍시다.”
이때 강도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 돌아서기에는 강도의 체면이 영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다. 돌아가자.”
하지만 가장 우두머리로 보이는 강도는 고개를 저으며 이쯤에서 일단락하기로 했다.
“형님.”
따악!
“크윽!”
다시 한 번 재촉하자 뒤통수를 냅다 내지르며 돌아섰다. 자신들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다.
“돌아가자니까.”
“예, 형님. 운 좋은 줄 알아라.”
마지막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강도는 카라스에게 한마디 내뱉고는 동료들과 함께 멀어져갔다. 그렇게 카라스의 시야에서 멀어진 강도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형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그냥.”
스으으윽.
카라스를 끝장내자고 했던 강도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다시 한 번 두목에게 제안했다.
“아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다. 저런 놈은 영주가 돼봐야 아무런 힘도 못 쓸 것이다. 보지 않았느냐? 내놓으란다고 다 내놓는 거. 저런 놈은 귀족이라는 자존심도 명예도 없으니 우리와 부딪칠 일도 없을 것이다.”
두목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군가 영주로 온다면 차라리 카라스 같은 인간이 오는 것이 나았다. 괜히 귀족이랍시고 무게 잡으며 이리저리 쑤시고 다닌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은 없는 것이다.
헤론 영지에서는 영주가 살해당한 일이 몇 차례 있었지만 그것은 이들에게도 큰 모험이었다. 왕국에서 그냥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헤론 영지의 존폐가 걸린 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하긴 돈 주고 사는 작위가 아니요? 그게 무슨 귀족이요? 우리나 저놈이나 거기서 거기지.”
두목의 말에 다른 강도들도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카라스는 뼛속부터 귀족도 아니었고 작위도 물건처럼 산 것이니 무슨 명예가 있으랴. 태생부터 귀족보다는 평민 출신 귀족이 아무래도 자신들과는 통하는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나저나 갑부 자식은 뭘 잔뜩 짊어지고 다니는지 보자꾸나.”
강도 두목은 카라스에게서 빼앗은 커다란 여행 가방 안으로 관심이 쏠렸다. 작위까지 살 정도로 돈 많은 집안이라면 가방 안에도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있으리라.
“허억! 이, 이게 다 뭐요? 먹을 것 아니요? 저놈 저거 이 많은 걸 혼자 처먹으려고 낑낑대며 갔던 거요?”
강도 하나가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는 기겁을 했다.
카라스가 뒤뚱대며 들고가길래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가방 안에는 옷가지 한두 벌과 온통 먹을 것 천지였던 것이다. 절로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살려 두길 잘한 것 같다. 저런 놈이 영주로 와야 앞으로 우리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역시 형님은 선견지명이 있수.”
강도들은 카라스를 온전히 보낸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칭찬했다. 카라스야말로 헤론 영지에 어울리는 하늘에서 보낸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괴팍한 노인네에 이어 어리버리한 강도라… 다음에는 또 어떤 이상한 자들이 나타날지. 수도까지 지루하진 않겠군. 훗!”
카라스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거웠던 짐에서 해방되었고 혼자 떠나는 지루한 여정에 말동무까지 생겼으니 그 얼마나 유쾌한 여정인가.
헤론 영지의 생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카라스였다. 수도에 이르기까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무수히 많다는 것은 카라스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