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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6화)
제3장 남작을 향한 기나긴 여정에 발을 딛다(3)


카라스는 수도까지 오는 내내 온갖 이상한 무리들을 만나며 재미난 여행을 했다. 처음 만났던 괴팍한 노인장과 어리버리 강도들은 새발의 피였다.
그보다 더욱 괴상하고 속 보이는 자들이 줄줄이 나타나 카라스를 위협(?)했지만 결국에는 모두 카라스와 인사까지 해 가며 헤어졌다. 그들은 한마디로 카라스를 만만하게 보고는 돌아간 것이다.
카라스는 속으로는 무척이나 우스웠지만 그들에게 맞춰 주며 큰 말썽 없이 수도로 올 수 있었다.
카라스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전생을 고스란히 기억하기 때문에 한때는 이곳에 적응하지 못했었다. 새로운 인연들과 과거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가족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또한 황보단천의 부인과 딸 설지에 대한 죄책감은 카라스를 지금껏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가족들과 친구들로 인해 점차 마음을 열어 가면서 이곳에서 만큼은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다시는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평범한 이웃처럼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이 카라스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이 아무런 힘도 없이 가족들이 처참하게 도륙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전생의 기억은 카라스로 하여금 혈루검을 버릴 수는 없게 만들었다.
남몰래 혈루검을 수련해 오고는 있었지만 다시는 혈루검이 피를 뿌리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라스가 혈루검을 봉인하지 않은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혹시라도 모를 전생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시는 사랑하는 이들이 끔찍한 일을 당하도록 구경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카라스는 근래에 끔찍했던 악몽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왠지 불길했지만 그저 과거와 같은 살인귀가 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에 도착한 카라스는 물어물어 왕궁 앞에 이르렀다. 정문에는 보기에도 우람해 보이는 병사들이 창을 곧게 세운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스가 옆으로 가도 돌아보는 일 없이 마치 저 하늘 어딘가에 보물이라도 찾는지 석상처럼 꼼짝도 안 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저… 이보게.”
카라스는 병사 앞으로 가서 병사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병사는 여전히 먼 하늘만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보게. 나 좀 보세.”
카라스는 다시 한 번 병사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병사는 여전히 카라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이때 문 안쪽에서 간부급으로 보이는 관리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자네가 이곳 책임자인가? 내가 안으로 좀 들어가려 하네.”
카라스는 그 관리에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실례시만 누구신지……?”
제법 부티 나는 복장을 하고서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하대를 하자 관리는 조심스레 카라스의 신분을 물었다. 고위 귀족의 자제라면 점수를 따 둬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카라스라고 하네.”
“카라스? 혹 부친께서는…….”
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것이다. 성이라도 말했으면 모르건만 그저 이름만 듣고 그 아비를 연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인이시네.”
카라스는 묻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뭐라? 네 이놈! 고작 장사치의 아들놈이 지금 근위대의 조장 나리께 반말짓거리를 하는 것이냐? 네놈이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상인이라는 말에 관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혹시나 고위 귀족의 자제일까 했는데 알고 보니 장사치였던 것이다. 고작 장사치의 아들이 왕궁근위대의 조장인 자신을 아랫사람 부리듯 한 것이라면 처절하게 응징할 생각이었다.
“어허! 다 할 만하니까 하는 것이지. 어차피 이곳에서 나올 때는 반말하게 될 테니 조금 먼저 한다고 큰일이야 있겠는가?”
카라스는 이 융통성 없는 관리가 답답할 뿐이었다.
사실 지금은 자신이 하대를 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지금은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을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확연히 다른 법. 어차피 나올 때는 자신의 신분이 귀족이고 그렇다면 조금 이르지만 미리 하대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잘못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고얀놈을 봤나? 여봐라! 이놈을 당장 체포하라!”
하지만 그것은 오직 카라스만의 계산일 뿐. 근위대의 조장의 머리로 하는 계산과는 무척이나 다른 것이었다. 근위대 조장은 근위대로 하여금 카라스를 체포하도록 했다.
“왜들 그러나? 나는 들어가 봐야 한다니까.”
“네깟놈이 이 안으로 들어가서 뭣하려고? 조금만 기다리거라. 옥사 구경이나 실컷 시켜 줄 터이니.”
“어허. 나는 국왕 폐하를 뵙고 작위를 받아야 한다니까.”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아 끌고가려 하자 카라스는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자신은 이곳에 오고 싶었겠는가. 자신도 할 수 없이 왔건만 이건 너무 심한 처사였다.
“자, 잠깐! 지금 뭐라 하였느냐? 작위를 받다니? 가만… 그러고 보니 오늘 이례적으로 폐하께서 작위를 수여하신다고 들었는데… 거시기 그 뭐냐… 헤… 헤…….”
작위라는 말에 근위대 조장은 얼른 근위대를 제지시켰다. 오늘 작위를 수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오늘 작위를 수여받을 자와는 깊은 인연이 있다면 있는 사이였으니 조장은 얼른 머릿속으로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헤론 영지.”
“맞다. 헤론 영지. 귀족들의 무덤이라는 그곳.”
근위대 조장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드디어 생각난 것이다. 이 나라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지만 모든 귀족이 가기를 꺼려 하는 곳. 귀족들의 무덤. 한 번 가면 영원히 중앙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바로 헤론 영지인 것이다.
“크흠. 헤론 영지에서 온 카라스라고 하네. 르노와르 상단주께서 내 부친이 되시지.”
카라스는 자신을 점잖게 소개했다.
“아이구. 이거 몰라 뵙고 무례를 범했습니다요. 하노스 상단주님과도 면식이 있는데 이거 참. 상단주님께서는 잘 계시지요? 덕분에 큰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제 딸아이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헤헤.”
카라스의 신분을 알게 되자 근위대 조장의 태도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이미 부친인 하노스가 근위대 조장에게도 약을 친 것이다. 근위대 조장은 하노스의 안부까지 물어 가며 생글거렸다.
“커허험! 그런가? 잘됐군.”
근위대 조장의 이야기에 카라스의 얼굴은 다시금 붉어졌다.
도대체 아버지 하노스가 뇌물을 먹이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카라스는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며 태연한 척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들? 누가?”
다들 기다린다는 말에 카라스는 다시 한 번 갸웃했다.
고작 평민인 자신에게 작위를 주기 위해 누가 기다린단 말인가. 작위를 받기 위해 자신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카라스는 의아한 듯 근위대 조장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물론 글라우스 백작님과 미스린 후작 각하께서 이미 대전에 계십니다.”
근위대 조장은 신이 나서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뇌물을 얼마나 주셨기에 그 높은 양반들이 고작 평민의 작위 수여식에 이런 관심을 기울이는 거야. 휴우.”
카라스는 차마 얼굴을 들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쳤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그만큼 상단주 하노스의 열망이 컸으리라.
“네? 무슨 말씀을……?”
“아, 아니네. 그냥 혼잣말이네. 그럼 수고하게.”
“예. 남작 나리. 헤헤.”
“훗.”
근위대 조장의 살살거리는 모습에 피식 웃고는 카라스는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아버지인 하노스가 그토록 염원하던 귀족이 되는 날인 것이다. 비록 과정이야 떳떳하지 못했지만 그런 것은 카라스에게 상관없었다. 이로써 아버지가 기뻐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카라스는 대전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아버지인 하노스가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니 자신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여어. 자네가 하노스 경의 자제 카라스인가?”
이때 대전 쪽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가 카라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나는 글라우스 백작이라고 하네. 자네 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다름 아닌 글라우스 백작이었다.
말로는 카라스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라고 했지만 정말 절친한 사이인지 아니면 뇌물을 주고받는 사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글라우스 백작은 무척이다 반갑게 카라스를 맞아 주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카라스라고 합니다.”
어떤 관계이든 호의적으로 대하는 글라우스 백작에게 카라스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래그래. 인사는 되었고, 어서 가세. 후작 각하께 먼저 인사 드린 후 곧바로 폐하께 가세나. 아, 마침 나오시는군. 후작 각하께서 자네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네.”
글라우스 백작은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인사를 마치자마자 카라스의 어깨를 잡고는 재촉했다. 때마침 미스린 후작이 대전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글라우스 백작! 그 듬직한 청년이 바로?”
미스린 후작 역시 카라스를 바로 알아본 듯했다. 미스린 후작은 환한 얼굴로 반색하며 카라스를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드디어 당도했습니다. 어서 인사 드리게. 미스린 후작 각하시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헤론 영지에서 온 카라스라고 합니다.”
“오! 하노스 경이 그렇게 자랑하던 아들이 바로 자네로구만. 크하하하! 과연 헤론의 영주감이야.”
미스린 후작은 카라스를 보자마자 극찬을 하기 시작했다. 일견하기에는 진심인 듯 보였다. 정말이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카라스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과, 과찬이십니다.”
너무도 자신을 띄워 주자 카라스는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자신이 무슨 영주로서의 재능이 있겠는가. 아버지인 하노스가 있는 말 없는 말을 잔뜩 가져다 붙여 자신을 한없이 포장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헤론 영지는 요하네스 왕국의 심장과도 같은 곳. 자네같이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맡아야지 암. 안 그런가, 백작?”
“여부가 있겠습니까? 드디어 헤론 영지에 제대로 된 임자가 나선 것이지요.”
“하하하! 어서 가세나. 폐하께서 기다리신다네.”
“예, 각하.”
미스린 후작과 글라우스 배작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연신 카라스 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라스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 준 영주가 아닌가 착각이 들만큼 둘의 칭찬은 지나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했다.
카라스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폐하. 드디어 그 소문 자자한 하노스 경의 자제가 당도하였사옵니다. 어서 인사 올리게.”
“국왕 폐하를 뵙사옵니다. 미천한 소인을 이렇게 환대해 주시어 황공하옵니다.”
미스린 후작의 소개에 카라스는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국왕 앞에서 마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극명하게 표현하는 미스린 후작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국왕 앞에서마저 조금 전과 같이 한다면 무슨 불경죄로 다스려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나 그 화가 가족들에게까지 미칠까 카라스는 다소 염려스러웠다.
“어허. 겸손이 너무 과하구만, 미천하다니. 헤론 영지를 장차 이끌어 갈 인재가 그렇게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느니.”
하지만 카라스의 이런 걱정은 그저 기우일 뿐이었다. 국왕은 미스린 후작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대놓고 카라스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카라스는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설마 국왕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지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아. 이게 대체 어찌 돌아가는 분위기냐.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왜 다들 하나같이 이렇게 난리법석이지? 나는 고작 상인의 아들일 뿐인데… 이상해.’
카라스는 지금의 상황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것은 아버지인 하노스가 고위 귀족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었고 그 결과 남작의 작위를 받게 된 것이다.
때마침 헤론 영지의 영주 자리가 공석이었고 비록 남작의 위로 맡을 자리는 아니었지만 사정상 헤론 영지의 영주 자리를 맡기로 약속되었다는 정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작위를 돈으로 샀으니 대부분의 귀족들의 눈총은 물론 국왕의 심기도 편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대였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카라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의 광경들은 절대로 상식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궂은 일을 꺼려 하니 십 년간 헤론 영지를 방치하였느니라. 헤론 영지에는 각국의 상인들부터 사신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곳일진데 짐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느니라.”
레오그란드 국왕은 헤론 영지에 대한 그간의 소감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십 년간 공석으로 비워 둔 헤론 영지에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레오그란드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헤론 영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곳이었다. 헤론 영지가 없다면 당장 요하네스 왕국의 재정은 휘청일 것이고 백성들의 생활은 곧장 타격을 입을 만큼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관리가 안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작정 공권력을 동원한다면 그 반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자칫 상단들이 철수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요하네스 왕국은 끝장인 것이다.
영주가 살해당했는데도 레오그란드 국왕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바로 재정적인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