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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7화)
제3장 남작을 향한 기나긴 여정에 발을 딛다(4)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하노스 경의 자제라면 폐하의 뜻을 받들어 헤론 영지를 잘 이끌 것이옵니다.”
미스린 후작은 그런 레오그란드 국왕의 마음을 잘 알기에 레오그란드 국왕을 위로하며 희망을 주었다. 그 희망의 이름은 바로 남작 카라스였다.
“그대가 비록 평민일지나 그 마음 씀씀이와 능력을 충분히 입증하였으니 귀족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다. 해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에게 남작의 작위를 하사함은 물론 헤론 영지의 영주로 임명하노라. 그대의 가문 역시 남작 가문이 될지니 그대의 아비인 하노스 경 역시 남작에 준하노라!”
레오그란드 국왕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카라스를 바라보며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레오그란드 국왕이 카라스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이나 커 보였다.
그것이 공석인 영주 자리에 앉히기 위해 하는 사탕발림인지 아니면 정말로 무언가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카라스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또다시 의문에 휩싸였다. 레오그란드 국왕의 말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입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재능이 있고 무엇을 입증했단 말인가. 그저 헤론 영지의 영주를 맡기기 위해 띄워 주는 것인지 정말 자신이 모르는 새 자신의 능력이 입증된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인 하노스가 뭔가 수를 썼다는 것이었다.
과연 뭘 얼마나 포장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오그란드 국왕과 귀족들의 마음을 쏙 빼놨을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나라의 재정을 걱정하느라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노심초사함은 물론 온몸을 던져 헤론 영지를 사수하려는 그대와 그대의 아비의 공을 높이 사는 것이니 앞으로 헤론 영지를 잘 이끌도록 하여라.”
레오그란드 국왕은 마지막으로 덕담과 함께 작위 수여식을 끝마쳤다.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바로 이것이었다. 아버지 하노스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쳤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그런데… 지난 영주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느냐?”
레오그란드 국왕은 불현듯 떠올랐는지 잠시 망설이다가는 조심스레 물었다.
“폐, 폐하! 그런 말씀은…….”
미스린 후작은 기겁을 하며 레오그란드 국왕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하지 말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헤론 영지의 일은 충분히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카라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호오. 다 알면서도 헤론 영지의 영주가 되기를 자청하다니 그 마음이 갸륵하구나. 내 특별히 너에게 상을 내리마. 대대로 국왕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보물 창고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노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관계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취하도록 하여라!”
카라스의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레오그란드 국왕은 왕국에 혁혁한 공을 세울 때에만 행하는 선물을 주기로 했다. 그것은 요하네스 왕국 대대로 모아온 대륙의 온갖 보물들이 있는 국왕의 창고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는데 국왕의 창고 안에 있는 물건은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보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제4장 기억되는 흔적이 갖는 의미는(1)


레오그란드 국왕에게 넘치는 호의를 받은 카라스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대전을 나왔다. 돈을 주고 사는 작위를 이렇게까지 대우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국왕과 다른 귀족들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카라스는 왕궁의 보물창고로 안내되었다.
사실 재물에 별 욕심이 없는 카라스에게는 왕궁의 보물창고 출입을 허락받은 일이 그리 큰 감흥을 갖지는 못했다. 재물이라면 아버지인 하노스의 창고에도 넘쳐흘렀다.
카라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하노스가 카라스가 원하는 걸 해 주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 카라스는 지금껏 특별히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심을 내 본 일이 없었다. 그저 지금과 같이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보물창고 앞에는 근위기사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고 창고의 문은 겉으로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단단해 보였다.
철컹.
근위기사단장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엄청나게 두꺼운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야 하네. 내가 안내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니까.”
근위기사단장은 입구에 서서는 카라스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근위기사단장도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마음에 드는 것을 얻길 바라네. 단 한 가지 뿐이네. 그 이상의 욕심은 내지 마시게.”
“명심하겠습니다.”
카라스는 근위기사단장에게 인사를 한 후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입구부터 으리으리한 것이 세상의 모든 보물들은 이곳에 모두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흐음. 과연 국왕 폐하께서 자신 있게 말씀하실 만하군. 웬만큼 귀한 물건들은 나도 많이 구경했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구경하기조차 힘든 물건들이니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도 이해가 돼.”
창고 안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온갖 희귀한 물건들은 물론 값비싼 보석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과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카라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하노스의 보물 창고를 놀이터로 삼아 놀았기에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음에도 이곳에서는 저절로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하나를 선택하긴 해야 하는데 뭐를 가져가야 하나… 휴우. 그냥 아무거나 하나 들고 나가야겠네.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으니.”
카라스는 무엇을 집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비록 대단한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저 놀라울 뿐 특별하게 욕심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국왕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으니 대충 아무거나 집어들 생각이었다. 카라스는 가장 작고 들고 가기 편한 것을 골라 손으로 집으려다가는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음?”
저벅저벅.
카라스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불길한 느낌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허억. 이, 이건… 설마…….”
카라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렇게나 잊고 싶었던 물건. 바로 혈루검과 똑같이 생긴 검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카라스는 도저히 눈앞에 혈루검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전생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중원 땅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그런데 어찌 혈루검이 전혀 다른 세상인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물론 자신의 삶도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혈루검마저 따라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마… 설마… 정말 혈루검은 아니겠지?”
카라스는 그저 혈루검과 닮은 검이려니 생각하고 싶었다.
일단 검집이며 검의 손잡이는 혈루검과 너무도 똑같았다. 이십 년을 손에서 떼지 않은 혈루검을 카라스가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것이다.
카라스는 그래도 설마하는 마음에 검집을 잡고는 서서히 검을 뽑았다. 제발 혈루검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채애애애앵.
너무도 맑고 청명한 소리. 혈루검의 그것과 한 치도 틀리지 않는 그 느낌이었다.
“이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카라스는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피보다 붉은빛을 발하며 날카로운 자태를 뽐내는 것이 혈루검임에 틀림없었다.
카라스의 머릿속에서는 전생의 일들이 꿈을 꾸듯 생생한 장면으로 지나쳐 갔다.
“아버지… 어머니… 누님… 크흐흐흑.”
자신의 아버지의 팔다리가 잘리고 어머니가 간살당하는 장면을 비롯해 하나뿐인 누나가 겁간을 당하며 혀를 깨무는 장면이 생생하게 지나갔다. 카라스는 당시의 감정에 휩싸이자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뿌드드득.
“찢어 죽일 원수! 황보단처어어언!”
카라스는 이를 갈며 황보단천에 대한 끝없는 원한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황보단천을 찢어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카라스의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악마의 얼굴. 누군가 지금의 카라스를 보았다면 분명 그렇게 느꼈을 만큼 카라스는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카라스의 분노와 원한에 몸서리 치며 서서히 이성을 잃어 갈 때 황보단천의 부인이 자결하는 모습이 지나쳐 갔다. 그 후 황보단천의 딸 설지가 옷을 벗고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장면들과 그녀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자결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아아.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대와 그대의 어미에게는 못할 짓을 하였소. 내가 느꼈던 그 끔찍했던 아픔을 고스란히 돌려주다니……. 내가 죄인이오. 내 죄를 갚을 수만 있다면 이 목숨이라도 드리리다. 크흐흐흑.”
그 순간 카라스에 눈에 가득 담긴 살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어느새 카라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황보단천의 원한도 지금 이 순간에는 눈 녹듯 사라졌다.
그저 자신 역시 황보단천과 마찬가지로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만이 카라스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카라스는 너무도 슬프게 울었다.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너무도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던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자신이 느꼈던 절망과 고통을 느꼈을 황보단천의 딸 설지가 눈에 아른거렸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눈앞에서 아버지의 팔이 잘려 나가고 어머니가 목숨을 끊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카라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전생의 악몽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이상했거늘 이것 때문이었던가.”
카라스는 비로소 악몽의 의미를 조금은 깨달았다. 바로 혈루검과의 만남을 암시했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그저 도망가려고만 했던 자신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는 몰라도 과거의 업보는 끝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왜 이 흉물스러운 것이 왜 내게 다시 돌아온지는 모르겠지만 뗄 수 없는 악연이라면 내가 감당하는 수밖에. 다시는 나와 같은 아픔을 다른 이가 겪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카라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으니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피한다면 누군가가 같은 고통을 겪을 것이기에 스스로 죄의 대가를 치르기로 했다.
카라스는 결국 혈루검을 집어 들고는 허리춤에 찼다. 강호의 이들은 혈루검을 신기처럼 여기며 욕심내지만 카라스에게 혈루검은 그저 재앙일 뿐이었다.
혈루검으로 인해 단란했던 가족이 비명횡사했고 자신의 인생마저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과거를 떨쳐 버리고자 그렇게 노력했건만 전생에 이은 새로운 삶마저 혈루검과의 질긴 악연을 떨쳐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카라스는 복잡한 심경으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차라리 이곳에 들어오지 말 것을 하는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보물창고를 나오면서도 카라스의 마음속에는 혈루검으로 인해 또 무슨 재앙이 들이닥칠지 불길할 뿐이었다.
“오오. 이 검을 선택했는가? 보는 눈이 있으이.”
혈루검을 알아본 근위기사단장은 무척이나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반겼다.
“혹 이 검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카라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과연 혈루검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게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서는 또 어떤 끔찍한 일들을 벌인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역시 자네도 관심을 갖는군. 참으로 특이하게 생긴 검이 아닌가? 어찌 이런 붉은빛이 나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네. 다만 그 어떤 보검과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 뿐이네.”
근위기사단장은 혈루검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반 검과는 달리 검 자체에서 붉은 광채가 나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