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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론의 영주 1권(8화)
제4장 기억되는 흔적이 갖는 의미는(2)


“이 검을 어디서 얻은지도 아십니까?”
“글쎄. 그러니까 내가 근위기사로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였지 아마. 그게… 벌써 이십 년이 흘렀던가.”
근위기사단장은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근위기사단의 기사가 되어 왕궁에 들어왔을 때였으니 정확히 이십 년이 흐른 것이다. 근우기사단장은 당시의 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검을… 이십 년 전에 얻은 것입니까?”
근위기사단장의 이야기에 카라스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야 했다.
이십 년 전이라면 자신이 태어나던 해였기 때문이다. 결국 혈루검은 자신과 함께 이 세상에 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자신과는 뗄 수 없는 질긴 악연이라는 생각에 카라스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네. 당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었지. 아마 과거에도 전례가 없는 큰 폭우였다네. 비바람이 몰아치고 엄청난 바람이 불었지. 당시 나는 큰 사단이라도 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었다네.”
근위기사단장은 이십 년 전 혈루검이 나타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풍이 몰아치며 요하네스 왕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그때의 일들을.
“그렇게 폭풍이 몰아치다가 엄청난 번개가 떨어져 내렸지. 참, 자네가 헤론 영지에서 왔다고 했지?”
근위기사단장은 이야기하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카라스의 출신에 대해 물었다.
“예. 헤론 영지에서 왔습니다.”
“역시 그렇군. 지금은 없지만 헤론 영지 인근에 세이크린 마을이 있었다네. 그곳에 어마어마한 번개가 떨어져 내렸고 마을은 순식간에 불타 버렸다네. 그렇게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불길은 마을을 휩쓸었지.”
근위기사단장은 이십 년 전 사라져 버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라스가 태어난 헤론 영지와 가까이 있던 세이크린이라는 마을이었다.
당시 세이크린 마을은 헤론 영지와 가장 가까운 마을로 무척이나 풍요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한밤의 폭풍은 모든 것을 앗아 갔고 세이크린이라는 마을은 폭풍의 제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카라스의 불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역시 혈루검은 재앙을 불러오는 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혈루검은 저주받은 검인 것이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불타 죽거나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목숨을 잃었지. 천운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저주가 내렸다며 마을을 모두 떠났다네.”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일과 이 검이 무슨 관계가…….”
카라스는 혈루검이 몰고 온 재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좀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었다. 사실 폭풍과 혈루검을 연관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혈루검에 대한 감정으로 나쁜 일은 모두 혈루검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당시 진상을 조사하고 정확한 피해 상황을 살피기 위해 왕궁에서 조사를 나갔는데 번개가 떨어진 자리에서 이 검이 발견되었다네.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터라 저주받은 검이라며 다들 두려워했지. 사실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은 빛깔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지.”
근위기사단장은 왜 혈루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세이크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이야기했다.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세이크린 마을에 온전하게 남아 있던 것은 바로 혈루검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혈루검이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이었다.
“그, 그런 일이… 한데 그 저주받은 검이 어찌해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그런 검이라면 당장 부러뜨려야지요.”
카라스는 의아했다. 그런 참상이 있었음에도 왜 혈루검이 지금껏 온전하게 전해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리하려고 했다네. 검을 부러뜨려 저주를 풀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네. 하지만 부러뜨릴 수가 없었네. 그 어떤 것으로도. 이 사실이 전해지자 폐하께서 이 검을 거두셨고 이렇게 창고에 봉인하신 것이네.”
근위기사단장은 혈루검이 세이크린 마을에서 이곳까지 전해진 연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과연 명검답게 혈루검은 스스로를 지켜낸 것이다. 그것이 혈루검이 부러지지 않고 온전하게 이곳에 오게 된 이유였다.
“그, 그러한 것도 모르고 제가… 당장 제자리에 두고 오겠습니다. 다시 열어 주십시오.”
카라스는 자신의 업보를 감수하겠다는 생각을 바꾸고는 다시 창고 안에 혈루검을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혈루검이 과연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혈루검이 출현하며 풍요롭던 마을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가.
만일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이는 자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계없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카라스는 자신의 경솔한 생각에 크게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혈루검을 창고 안에 다시 가져다 놓기로 마음먹었다.
“자네의 기회는 이제 끝이라네. 저곳은 평생 한 번 들어갈까말까 한 곳이지. 자네 역시 그 한 번의 기회를 다 써 버린 것이네.”
하지만 근위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이상 이제는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근위기사단장은 이미 창고의 문을 굳게 잠근 것이다.
“저주받은 검이 아닙니까? 이런 흉물스러운 검이 세상에 나오도록 그냥 두실 생각입니까?”
카라스는 근위기사단장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다. 이대로 헤론 영지에 큰 재앙이라도 닥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래전 검을 이곳에 봉인하실 때 폐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네. 모든 재앙은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 어떤 물건도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오직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근위기사단장은 혈루검을 얻을 당시 레오그란드 국왕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카라스에게 들려주었다.
길흉은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물의 속성에 기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위안 삼을 뿐이었다. 모든 선택은 인간의 몫이었고 그 결과 또한 선택에 따른 대가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셨네. 이 검이 재앙을 불러오든 그렇지 않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마찬가지로 이곳을 떠날 때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으음…….”
레오그란드 국왕의 이야기가 왠지 마음에 와 닿았다.
카라스는 레오그란드 국왕의 이야기를 음미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황보단천을 죽인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그저 혈루검을 사용했을 뿐이 아닌가. 혈루검이 황보단천을 죽이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다.
모든 죄와 업보는 혈루검이 아닌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죄를 혈루검에 뒤집어씌우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블러드 페인을 선택했다고 보고 드리겠네. 그럼 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길 바라네. 재앙이 온다면 그것은 자네가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모든 것은 자네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근위기사단장은 마지막으로 카라스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주고는 대전으로 향했다.
혈루검의 이곳에서의 이름은 블러드 페인. 그 행적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결국 지난날의 처참했던 일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에 기인한 것이던가. 내가 저지른 그 끔찍한 일들 역시 그저 복수심에 눈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인가…….”
카라스는 처음으로 블러드 페인과 분리해서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역시 모든 선택은 자신이 했던 것이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살육을 저질렀던 전생의 일들 모두가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라스는 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카라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카라스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곳에는 레오그란드 국왕의 딸 아이리스 공주와 시녀가 마주 오고 있었다.
“공주님! 안 된다니까요.”
“아바마마께서 금단의 창고까지 허락하셨다고 하지 않느냐? 고작 돈으로 귀족의 작위를 사는 자에게 어찌 그러실 수 있단 말이냐?”
시녀의 제지에 아이리스 공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연신 불평을 쏟아냈다.
바로 카라스의 작위 수여식 때문이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이란 평민들의 우위에 있는 신성한 존재. 평민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복종을 받아내는 위치에 있는 만큼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자부심 그리고 책임감을 지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작위를 산 귀족이 그러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리스 공주는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이에요. 공주님께서 나서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괜히 폐하의 노여움만 사실 거예요.”
“나는 꼭 그자를 봐야겠다. 얼마나 뻔뻔하길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감히 아바마마의 보물가지 탐을 내는 것인지.”
아이리스 공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작위를 산 뻔뻔한 작자를 만나 혼찌검을 낼 생각인 것이다.
멈칫.
시녀에게 불평을 쏟아부으며 성킁성큼 보물 창고로 향하던 아이리스 공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바로 앞을 누군가가 막아선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엄하오. 어서 공주님께 예를 올리지 못하겠소?”
시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그 사내는 바로 카라스였다.
“다, 당신은…….”
카라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카라스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고 있었고 머릿속은 아찔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꿈에서도 잊지 못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황보단천의 딸 설지가 카라스의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설지와 꼭 닮은 레오그란드 국왕의 딸 아이리스 공주였다.
“공주님! 이자가 바로 그자예요.”
시녀는 카라스를 알아보고는 아이리스 공주에게 고자질하듯 말해 주었다.
“네, 네 이놈! 뭐하는 짓이냐? 나는 이 나라의 공주다. 어서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느냐?”
아이리스는 공주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카라스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카라스를 나무랐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도 모자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리스 공주는 과연 돈으로 작위를 산 작자답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이참에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어찌 당신이 여기에…….”
카라스는 아이리스가 뭐라고 하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카라스의 의식은 전생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절망과 고통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던 여인.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던 여인. 자신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아비의 죗값을 대신 갚으려는 그 연약하고 가련한 여인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카라스는 어떻게 그 여인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라스는 한 발 한 발 아이리스 공주에게 다가갔다.
“무, 무슨 짓이냐? 썩 물러서지 못할까!”
카라스가 무턱대고 가까이 다가서자 아이리스 공주는 덜컥 겁이 났는지 뒤로 물러서며 호통을 쳤다. 자신이 싫은 소리를 했기로 감히 자신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털썩.
카라스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죽을 죄를 지었소. 내가 죄인이오. 씻지 못할 죄를 지은 날 용서하지 마시오. 그대가 원한다면 내 목을 주겠소. 크흐흐흑!”
카라스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날의 일들이 생생했다.
자신의 원한을 풀어지게 하기 위해 스스럼 없이 옷을 벗었던 여인이 아니던가. 아비의 팔이 잘리고 어미의 목숨이 끊어졌음에도 조금이나마 자신의 한을 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여인이 아니던가. 그러한 여인마저 자신은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카라스는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자신의 원수는 황보단천이지 죄없는 그의 부인과 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 누가 네놈 목을 원한다고 하였느냐? 그냥 네놈이 궁금해서 와 봤을 뿐이다. 이제 봤으니 되었다. 가자.”
하지만 아이리스 공주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카라스가 무릎까지 꿇고 펑펑 울며 사죄를 하자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라스가 이러는 것이 자신이 화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자신이 너무 심하게 대한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더 이상 혼을 낼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 공주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지금의 상황도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예, 공주님. 운 좋은 줄 아시오. 흥!”
시녀는 카라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고는 콧방귀를 뀌며 아이리스 공주의 뒤를 따랐다.
“결국 이렇게 만나는 것인가… 과거는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풀지 못한 인연의 고리를 푸는 것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내가 다시 삶을 얻은 이유였던가…….”
아이리스 공주가 멀어지자 카라스는 만감이 교차했다.
왜 근래 들어 전생의 일들이 자꾸 꿈에 나타나는지, 왜 혈루검이 또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인지 이제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일들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업보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황보단천을 단죄했듯 이제는 자신의 죗값을 치를 때가 된 것이다.
새로이 얻은 삶은 그저 평안하고 소소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자신이 절망을 안겨 주었던 여인을 위한 것이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이유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