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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24화)
Chapter 10.(3)


“그러니까 고객님, 하루에 1시간이 한계군요 고객님.”
베아트리체의 이죽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티르는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산이라 그런지 겨울바람이 유난히도 차가웠다.
티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대충 하루에 1시간 정도 변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치천사의 낙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속도는 마하를 넘고도 남았지만, 그랬다가는 티르는 어떻게 견딘다 쳐도 배낭 안에 든 워치 로벤이 버틸 수가 없었다.
더욱이 철의 시대에 음속으로 비행하는 존재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었으니까. 중앙의 눈을 끄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티르의 비행 속도는 충분히 빨랐다.
오늘 하루만 해도 대충 날고 걸은 것을 다 합치면 700km이상은 이동한 듯했다. 덕분에 배낭 안에서 우주적 공포를 맛본 워치 로벤이 엉엉 울며 세상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빠르긴 한데, 그래서 몸이 견디겠어?”
사자심왕이 걱정스럽게 묻자 전마 갈천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련도 되고 좋은데 뭘 그러나. 이 기회에 변신 시간도 늘어나면 좋겠군.”
갈천의 말마따나 아슬아슬한 한계 상태를 유지하는 걸 계속한다면 분명 변신 시간이 늘어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전에 레이그란츠의 걱정대로 티르의 몸이 축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베아트리체는 티르보다는 워치 로벤이 걱정된다는 듯 혀를 몇 번 끌끌 차더니 탈진하다시피 해서 잠든 워치 로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유, 가엾은 것. 얘는 대체 왜 데려가는 거야? 정말 으슥한 곳에서 못된 짓이라도 하려고?”
티르는 이번에도 답하는 대신 철저한 무시로 응대했다. 베아트리체는 당장에 입술을 삐쭉 내밀며 무어라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했지만, 검마 백야흔이 그런 베아트리체를 제지하며 입을 열었다.
“티르, 분명 이렇게 하면 윈체스터 후작령을 다녀오는데 1주일도 채 걸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불안하군.”
“뭐가?”
“그야말로 여러 가지가.”
검마 백야흔은 가만히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미노 백작이란 자가 바로크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는데 네가 성을 비운 것이 그 첫 번째고, 그 시안이란 정체불명의 여자의 행방이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네가 성을 비운 것이 그 두 번째고, 네가 무리하게 08시의 봉인을 푼 것이 세 번째이다.”
미노 백작은 연회가 열리던 날 당일 칙령만을 전하고 바로 왕도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르긴 했지만, 홀멘에 사람을 남겼을 것이 분명했다.
티르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설사 미노 백작이 티르가 없는 틈에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해도 시간이 부족할 터였지만 불안 요소임에는 분명했다.
시안의 경우는 더더욱 불분명했다. 비록 그녀가 율리아를 구하는데 일조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지막 순간뿐이었다.
영웅의 시대에나 존재하던 옷차림을 하고, 티르의 일격을 가볍게 막아 낼 정도로 강하며 적인지 아군인지 불분명한 여자.
영들과의 논의 끝에 중앙 소속이 아닌 것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티르와 영들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사자심왕의 걱정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었다. 호른에서 유산을 확보함에 따라 해제가 가능해진 08시의 봉인은 아직 티르의 몸에 완전히 체화되지 않았다. 나름 시간 조절을 하고 있긴 했지만 무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티르는 그런 백야흔의 걱정을 이해했지만 결국엔 쓰게 웃을 뿐이었다.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 시간도 없고 방법도 없으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
주시자의 눈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다. 정면에서 칼을 갈고 있는 상대보다 등 뒤에서 호심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이 더 위험한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난 이만 잔다.”
마지막으로 준비해 둔 장작더미를 전부 모닥불에 밀어 넣은 티르는 침낭 속에 몸을 구겨 넣었다.
“아직 달도 안 떴는데 벌써 자게?”
레이그란츠가 마치 더 놀자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말했지만 티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도 날아야 하니까.”
티를 안 내서 그렇지 티르도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다. 07시와 08시의 힘을 동시에 운용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 아낀다며 반쯤 실시한 워치 로벤이 들어간 강철 배낭을 메고 반나절 이상 산을 탔으니, 티르가 아무리 괴물 같은 체력의 소유자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영들은 각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나씩 사라져 갔다.
제일 마지막까지 남은 베아트리체는 돌연 피식 웃더니 티르의 귓가에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쟤랑 같이 안 자? 데이트한다며?”
“베아트리체!”
참다못한 티르가 벼락같이 외치자 베아트리체는 깔깔거리며 사라졌다.

***

던필 필로페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사 일이 지났다.
던필의 마지막 보고에 따르면 워치 로벤은 살아 있었다. 그것도 티르 아벤트의 부하라는 괴이한 형태로 말이다.
클락 윈체스터는 워치 로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시자의 눈에서 태어나다시피 한 그녀는 다른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유사시엔 자결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멀쩡히 살아서 티르 아벤트의 부하가 되었다? 그렇다면 설마 던필 필로페도 지금 살아서 티르 아벤트의 부하가 된 것은 아닐까?
클락 윈체스터는 낭패감에 빠졌다. 어차피 의뢰주인 베스크 백작도 죽었겠다, 이대로 발을 빼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티르 아벤트에게 죽었건 아니면 그의 부하가 되었건 이미 간부급 두 명과 완전히 훈련된 암살 기능자 여덟 명을 잃었다.
그런 반면 티르 아벤트의 위치는 점점 더 공고해져만 갔다. 이제 와서 암살 기능자들을 더 투입하고, 피해를 감수한다 하여 저 티르 아벤트를 죽일 수 있을까? 설사 죽인다 하여도 그것이 과연 조직에게 있어서 이득인 것일까?
클락은 티르에 관한 것들을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클락은 생각했다. 발을 빼든 빼지 않던 손해인 것만은 분명했다. 발을 뺄 경우에는 용병왕 척살로 공고해진 조직의 위상이 무너질 터였고, 발을 빼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접견실이라도 해도 좋을 성의 가장 높고 넓은 방에 홀로 앉아 클락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느냐.”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에 클락은 고개를 들었다. 조직의 전대 수령이자 클락 자신의 양부인 클레이브 윈체스터가 방 입구에 서 있었다.
클레이브는 천천히 클락에게 다가섰다. 클락은 말없이 그런 양부를 바라보았다.
클레이브는 클락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았다. 클락 역시 양부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넌 이미 네가 해야 할 바를 알고 있다, 클락.”
많은 것을 함축한 클레이브의 말에 클락은 고개를 떨구었다. 양부의 말대로였다.
신용을 잃은 암살 조직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그 신용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힘을 무리하게 소진시키는 것은 용병왕 척살 건 한번으로 충분했다. 주시자의 눈은 일반적인 암살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윈체스터 후작가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했으니까.
클락은 고개를 들어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클레이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클락.”
“아니,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낯선 목소리에 클락과 클레이브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안녕.”
뻥 뚫린 성의 창문 위, 거대한 강철 배낭을 멘 남자가 서 있었다.


<강철의 기사들 2권에서 계속>




인물화 #1

■ 01시, 멸살의 참철검 ― 검마 백야흔
검마 백야흔은 청동의 시대를 살았던 검사입니다. 검마라 불리었을 정도로 위대한 검사인 동시에 굉장히 유능한 용갑주 조종자인 그는 1급 용갑주 바이스 릿터와 함께 전장을 지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었던 상관에게 배신당해 동료들 모두를 잃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영들 가운데 가장 의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로 티르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티르가 놓친 부분들을 지적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은근히 영들 가운데 말이 가장 많은 편이기도 합니다.
하얀 머리칼에 챙이 넓은 하얀 중절모에 하얀 정장이라는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드레스 코드를 좋아합니다. 머리칼은 꽤나 길어서 가슴께에 닿을 정도고 얼굴도 하얀 편인지라 푸른 눈동자를 제외하면 완전히 밀가루를 뒤집어쓴 꼴입니다. 두 자루 참철검을 허리에 차고 다닙니다.

■ 04시, 죽음을 먹는 사슬낫 ― 전마 갈천
전마 갈천은 청동의 시대를 살았던 해결사입니다. 본래 암살자 출신인 그는 독과 고문, 은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일견 단순해 보일 정도로 호탕한 성격이며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독과 암습 등 티르가 약한 부분을 잘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처럼 길렀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녀 베아트리체와 함께 티르를 놀려 먹는 솜씨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자면 영들 가운데서도 최고령자입니다. 백발에 수염이 무성한 근육쟁이 노인입니다. 웃통은 항상 벗고 다니며 붕대로 팔과 허리를 감은게 다입니다. 펑펑한 바지를 즐겨 입으며 허리에는 쇠사슬이 길게 달린 사슬낫을 메고 다닙니다.


용어해설 1(1)

1) 모든 세상.
모든 세상 연대기는 2개의 단독 세상과 11쌍의 쌍둥이 세상, 도합 24개의 세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철의 기사들의 배경은 세상군 성스러운 행군Holy March에 속한 세상 무적함대Armada입니다.

2) 세상의 시스템
세상을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세상의 시스템은 이 세상을 유지하고 움직일 수 있게 하는 OS입니다. 그리고 스크립트란 세상의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모든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 즉 하드 드라이브입니다.

3) 인간의 다섯 시대.
세상 무적함대Armada에는 이제까지 다섯 시대가 존재했습니다.

황금의 시대 : 인류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입니다. 제네식 플렌트를 활용한 무궁무진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인류는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희소성의 법칙을 깨부수는 제네식 플렌트의 힘 덕분에 빈부의 격차는 없었고, 질병에 관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과학과 마법은 둘 모두 극에 도달했습니다. 이 시대부터 인류는 동물신들과 함께했습니다. 타입 드래곤들이 등장한 것이 이 시기입니다.

은의 시대 : 제네식 플렌트를 봉인하게 됨으로써 황금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은의 시대에 인류는 다시 희소해진 자원 문제로 인해 연맹과 동맹이라는 앞 글자 빼고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는 두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끝없는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타입 엘프와 타입 드워프가 등장한 것이 이 시기입니다.

청동의 시대 : 연맹과 동맹이 무너져 수없이 많은 군소세력이 생겨났습니다. 청동의 시대는 인류간의 대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입니다. 이때부터 인류와 동물신들 사이의 관계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전투용 병기로써 타입 오크, 타입 오우거, 타입 자이언트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영웅의 시대 :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이어지던 청동의 시대는 인류가 거대한 다섯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지면서 끝났습니다. 오랜 전쟁에 지친 인류는 다시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하였고, 어느 정도나마 은의 시대의 번영을 되찾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인류는 최악의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날 돌연 괴들을 이끌고 나타난 열두 존자는 인류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 없는 괴의 군세와 그 당시 인류가 가지고 있던 그 어떠한 무기로도 대적할 수 없었던 열두 존자의 힘 앞에 인류는 유린당했습니다. 인류는 동물신들이 자신들을 지켜 주길 바랐지만, 동물신들은 인류를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떠났습니다. 기도해도 기도를 들어줄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류는 죽고 또 죽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지키는 강아지 견신 미티어 블루의 참전과 연이어진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의 강림, 그리고 기도를 들어줄 신이 없다면 그 신을 만들겠다는 계획 하에 제네식 플렌트를 이용해 탄생시킨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등장, 프로젝트 에인헤리얼에 따라 등장한 12대천사 등의 활약으로 존자 전쟁이라 불리는 열두 존자와의 싸움에서 인류는 승리합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승리였습니다. 태양의 왕과 달의 여왕은 죽었고 12대천사 가운데서도 많은 수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백 수십억을 헤아리던 인류는 고작해야 천 만밖에 남지 않았고, 이동 요새로 삼았던 공중 도시들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이 파괴당했습니다. 인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의 시대 : 강철의 기사들의 배경이 되는 시점입니다. 영웅의 시대를 끝낸 존자 전쟁의 영향으로 마법과 과학뿐 아니라 정치체계에 있어서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이전의 시대들에 비해 급격히 퇴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