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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23화)
Chapter 10.(2)
***
레오나와 율리아, 에이다 등은 갑작스런 칙사의 방문과 그 명 때문에 각자 불안한 밤을 보내고 있었지만, 워치 로벤은 좀 다른 의미로 불안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율리아의 방 바로 옆에 마련된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워치 로벤은 멍한 얼굴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연회가 끝난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드레스 차림이었고 얼굴의 화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워치 로벤은 티르의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티르가 칙사의 명대로 겨울 무도회에 참가하든, 아니면 칙사의 명을 무시하고 그냥 농성을 하던 그야말로 관심 밖의 일이랄까.
티르에 대한 공포가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냥 티르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도 없잖아 있었다.
한참을 멍해 있던 워치 로벤은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 한구석에 자리한 화장대 거울에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검은 머리칼의 미녀가 비쳐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쳤다.
암살자로 길러져 암살자로 살아온 삶에도 지쳤고, 오늘 밤 있었던 일들에도 지쳤다. 티르 그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연회에 참석하게 한 것일까.
율리아의 경호와 주변 감시를 위해서라면 암살 기능자답게 연회장 어딘가에 은신해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티르는 자신에게 최대한 예쁘게 치장하고 나오라는 이상한 명령까지 내렸다.
“난 미녀라고, 이 작자야.”
자기 입으로 이런 말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워치 로벤은 그녀의 말마따나 빼어난 미녀였다. 그런 미녀가 최대한 치장하고 그렇게 야한 드레스까지 입고 서 있으면 그야말로 관심의 폭풍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심의 포화 속에서 율리아를 경호하는 한편 주변을 경계한다? 워치 로벤이 아무리 숙련된 암살 기능자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최선을 다해 존재감을 흐릿하게 했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오는 작자들이 있었고, 그치들을 상대하면서 율리아와 주변을 신경쓰다 보니 평소보다 3, 4배는 더 지칠 수밖에 없었다.
워치 로벤은 낑낑거리며 하이힐을 벗은 뒤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사실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 나섰을 때 생기는 제일 큰 문제는 피곤함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어.”
바로크 지방에 파견 보낸 조직원들이 죄다 연결이 끊겼으니 주시자의 눈에서 뭐라도 조치를 취할 때가 됐다.
그래도 조직의 중견은 되는 자신까지 사라졌으니 말단을 보낼 리는 없고, 꽤나 경험 있고 강력한 암살 기능자를 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그렇게 파견된 암살 기능자가 연회장에 있는 자신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뭐… 별다른 기척은 못 느꼈지만…….’
이게 다 티르 그 작자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도 워치 로벤 자신을 괴롭히고 싶은 걸까.
워치 로벤은 차마 입 밖으론 내지 못할 비명을 마음속으로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들었다.
“워치 로벤.”
낡고 굵직한 목소리에 워치 로벤은 눈을 뜸과 동시에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오른쪽 어깨가 무언가에 짓눌림과 동시에 날카로운 단검이 왼쪽 뺨을 스쳐 침대에 박혔다.
워치 로벤을 덮치듯 깔아뭉갠 상대는 남자였다.
온통 검정 일색의 옷이었고, 얼굴은 복면으로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의 가늘고 긴 눈을 본 순간 워치 로벤은 알 수 있었다.
“던필……!”
던필 필로페, 주시자의 눈의 단검 격투술 교관이었다.
“워치, 난 널 꽤나 높이 보았는데 실망이다.”
남자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눈으로 워치 로벤을 바라보았다. 조직을 배신한 이상 죽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워치 로벤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을 움직이고자 했다. 던필 역시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는 듯 침대에 박아 넣은 단검을 다시 뽑으려 했다. 하지만 워치 로벤도, 던필도 그럴 수 없었다.
콰득―!
갑작스런 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 밑에서 손이 뻗어 나와 던필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어마어마한 아귀힘으로 던필의 뼈와 살을 짓뭉개 버렸다.
“크… 악?!”
던필이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순간 침대를 완전히 박살 내며 티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말도 안 되는 등장에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을 워치 로벤조차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올 줄 알았다.”
워치 로벤을 공개하면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워치 로벤을 죽이기 위해서건, 혹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건!
“티, 티르 아벤트?”
티르는 대답하는 대신 씩 웃었다. 그대로 던필을 벽면을 향해 내던졌다.
둔탁한 굉음과 함께 벽면과 충돌한 던필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더니 꿈틀거리기만 할 뿐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그야말로 가볍게 던필을 쓰러트린 티르는 워치 로벤을 돌아보았다.
던필의 등장보다 티르의 등장에 100배쯤은 더 놀란 워치 로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박살 난 침대와 그 밑에 난 구멍, 그리고 티르를 번갈아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언제부터?”
“나도 잘 아는 사실을 네가 떠들어 댈 때부터.”
조금 묘한 대답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워치 로벤은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만해라, 그러다 애 지리겠다. 그래도 여잔데.’
‘이 정도면 괴롭히면서 즐기는 게 분명해.’
머릿속에서 레이그란츠와 베아트리체가 쫑알거리자 티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그란츠나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 워치 로벤은 혹여 자기 때문에 티르가 화가 났나 싶어 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적당히 하긴 해야겠군.’
어찌 되었건 워치 로벤은 이제 티르 자신의 수하였으니까. 짧게 한숨을 내쉰 티르는 그게 더 겁먹게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워치 로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후 여전히 꿈틀거리는 던필에게 다가섰다.
“워치! 이 자식 직위가 어떻게 되지?”
“저, 전투 교관… 조직의 간부입니다!”
“그래?”
티르는 가만히 자리에 쪼그리고 앉더니 던필의 얼굴을 붙잡았다. 한번 으득 힘을 주더니 그대로 턱관절을 뽑아 버렸다.
“자살할 생각은 버려, 쉽지 않을 테니까.”
상큼하게 웃어 준 티르는 다시 한 번 손을 놀려 던필을 기절시킨 뒤 어깨 위에 둘쳐멨다.
“워치.”
“네, 여… 영주님.”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목소리로 워치 로벤이 답했다. 티르는 방문을 열며 말했다.
“난 이 작자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갈 테니까, 넌 율리아 곁에 있어 줘. 소리 듣고 놀랐을 테고… 혹시나 또 다른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워치 로벤에게 손짓으로 가볍게 응답한 티르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전마 갈천이 다시 한 번 활약할 시간이었다.
밤새도록 뼈와 살이 분리되는 피비린내 나는 시간을 보낸 결과 티르는 워치 로벤도 모르고 있던 주시자의 눈의 각종 정보와 더불어 놈들의 수령, 클락 윈체스터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명이나 되는 조직원들이 한 번에 연락두절이 되었으니까. 더욱이 놈들도 나름 정보 조직을 갖추고 있을 테니 티르 자신의 힘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역시 보통 조직은 아니었군.’
호른에 본부를 둔 조직이 너무 빠르게 정보 교류를 한다 싶었는데, 역시나 놈들은 영웅의 시대의 유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던필도 조직이 정확히 어떤 유물들을 보유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통신기를 원활히 사용할 정도면 전투용 유물도 한두 가지쯤은 운용하고 있을지 몰랐다.
“어떻게 할 거냐, 조직을 조금씩 짓밟기에는 이놈들의 조직망이 너무 길고 가늘다.”
레스베리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바로크 지방에서 호른의 동쪽 끝에 있는 윈체스터 후작가의 성까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락 윈체스터를 그대로 내버려 둬서는 결코 주시자의 눈을 뿌리 뽑을 수 없었다.
전마 갈천의 발언에 티르가 잠시 대답이 없자, 놀들의 왕 비단이 나섰다.
“지금처럼 찾아오는 족족 잡아 족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통하지 않을 상대에게 계속해서 암살자를 보내는 짓 따윈 하지 않겠지.”
암살업도 결국엔 사업이다. 클락 윈체스터가 머리가 있다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느니 물러서는 쪽을 택할 터였다.
더욱이 놈에게는 윈체스터 후작가라는 간판이 있었으니까. 조직의 사활을 걸고 동귀어진을 시도할 가능성도 낮았다.
티르는 이번에도 답하는 대신 홀로 생각을 정리했다. 용병왕 시절부터 주시자의 눈과 맞붙었던 일들을 모두 떠올려 보았다.
“역시… 확실히 정리를 해야겠어.”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왕자와 제대로 맞서기로 결심한 이상 전장은 확대될 터이고 그러다 보면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의 곁에 티르가 함께하지 못하는 순간도 반드시 생길 터였다.
“갈천, 저거 죽지는 않겠지?”
티르가 반송장이 된 던필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갈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솜씨를 의심하는 거냐, 애송이? 죽으면 내 탓이 아니라 손을 놀린 네 탓이다.”
“아니, 그렇다면 됐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던필의 치료를 명한 티르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잠을 잘 생각 같은 건 없는지 레오나 공주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집무실로 소집했다.
어젯밤의 일 때문에 다들 잠을 설치기라도 했는지 피로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율리아는 일전에 납치된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어젯밤 워치 로벤의 방에서 울린 소리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율리아를 달래 주고 싶었지만 지금 티르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간략하게 어젯밤 있었던 습격을 이야기한 티르는 바로 레오나 공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을 것 같군. 공주는 가울링 후작에게 가는 사절이 되어 줘.”
“…그 말은?”
“왕자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고 거기에 머리를 들이밀 의리는 없으니까.”
티르의 대답에 레오나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는 그 자리에 모인 하나하나를 돌아보며 빠르게 명령했다.
“에이다는 오늘부터 바이스의 지도에 따라 용갑주 운용 수련에 매진한다. 슈나이더는 율리아의 곁을 항시 지켜라. 트라이곤과 이졸데는 공주를 따라 가울링 후작에게 가라. 랜스터와 트리스탄은 미노 백작이 바로크 지방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마라. 루레인은 새로 확보한 용갑주 예비 부품과 이전 전투에서 확보한 용갑주들의 부품을 합쳐 어떻게든 3급 용갑주 1대 이상을 수복해라.”
칼 레지세이어가 제시한 기간까지는 아직 두 달이란 시간이 남았다. 섣불리 영지민들을 동원한 군사 훈련 등을 해서 벌써부터 괜한 자극을 줄 필요는 없었다. 레오나 공주의 얼스터 방문도 최대한 비밀리에 해야만 했다.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더 당부한 티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앉은 모두를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워치 로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워치 로벤.”
“네, 영주님.”
워치 로벤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녀를 티르가 율리아를 위해 고용해 온 솜씨 좋은 여자 경호원 정도로만 알고 있는 모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워치 로벤을 바라보았다.
티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나랑 데이트다.”
에이다와 레오나와 율리아가 순간 눈을 크게 떴고, 워치 로벤은 아예 경악한 얼굴로 티르를 마주하였지만 티르는 변함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목표는 호른, 빠르고 유쾌한 여행이 될 거다.”
***
바로크 지방에서 왕도까지만 해도 1달은 족히 걸릴 여행길이었다. 그런 왕도에서 다시 호른까지는 역시나 1달 가까운 여행길이 필요했다. 호른에서 다시 윈체스터 령까지 가는 거리에 기타 소요 시간까지 생각하면 왕복 5달은 족히 걸릴 대여정이었다.
하지만 티르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렇게 여유로운 여행을 할 생각도 없었다.
왠지 모를 광분 상태에 빠져든 여성진 일동에게 일별한 뒤, 루레인에게 미리 주문해 두었던 거대한 강철 배낭을 등 뒤에 멘 티르는, 반쯤 넋이 나간 워치 로벤과 함께 홀멘을 빠져나와 근방의 숲 으슥한 곳으로 향하였다.
처음엔 어미 새 뒤따르는 아기 새마냥 그저 졸졸졸 티르 뒤를 따르던 워치 로벤은 갈수록 티르가 으슥한 곳으로 향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애당초 미인계도 가능한 암살 기능자로 길러지기도 했고, 티르가 몸도 마음도 운운할 때 어느 정도 각오는 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의외의 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요구할 줄이야.
같은 장소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버겁기 그지없는 워치 로벤으로서는 숲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예 사람이 지나간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곳까지 도달한 티르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이쯤에서 할까.”
워치 로벤은 순간 마른침을 삼켰다. 최선을 다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여, 여기서요?”
“그래, 이쯤이면 목격자도 없을 거고… 혹여 보더라도 잘못 봤나 하겠지.”
티르는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가볍게 몸을 풀었다.
워치 로벤은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마른침만을 삼켜댔다. 그리고 마침내 티르가 워치 로벤에게 손을 뻗었다.
“…무슨 생각하냐, 너.”
“…네?”
티르는 혀를 한 번 차더니 워치 로벤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퉁겼다. 메고 왔던 강철 배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
“네?”
“배낭에 들어가라고. 그러려고 만든 거니까.”
잠시 티르의 얼굴과 배낭을 번갈아 바라본 워치 로벤은 쭈뼛쭈뼛 배낭에 다가섰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배낭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이 사용하곤 한다는 유모차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뚜껑 열면 들어갈 자리가 있을 거야. 나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했으니까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을 거고. 얼핏 그냥 강철로 보이지만 열차단 처리도 하고 돈이 꽤나 들어간 물건이야.”
티르의 말마따나 뚜껑을 여니 여자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앉을 자리가 있었다. 천과 솜을 덧대서 안쪽은 꽤나 푹신푹신했다.
일단은 명령이니 워치 로벤은 낑낑거리며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뚜껑은 밖에서만 벗길 수 있는 구조인지라 머리를 빼꼼 내밀고 티르 쪽을 돌아보았다. 어째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킥킥거린 티르는 이내 검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봉인을 해제했다.
07시의 봉인 해제, 강철의 기사.
순백과 칠흑이 교차하더니, 티르의 몸을 순백의 마갑과 칠흑의 성의가 감쌌다.
갑작스런 변신에 워치 로벤은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박였다. 티르는 그 상태로 워치 로벤에게 다가가더니 머리를 가볍게 눌러 배낭 속으로 들어가게 한 뒤 뚜껑을 덮었다. 그대로 다시 강철 배낭을 등 뒤에 메었다.
“모양새가 영 좋진 않군.”
짧게 중얼거린 티르는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다른 봉인들과 달리 ‘그날’ 이후 처음으로 해제하는 봉인인지라 어지간한 티르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으니.’
티르는 검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순간적으로 지면을 박차 하늘 높이 도약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08시의 봉인 해제, 치천사의 낙인.
순간 순백의 마갑 너머로 빛으로 이루어진 네 장의 광익이 솟구쳤다. 위의 한 쌍은 순백이었으며, 아래의 한 쌍은 칠흑이었다.
“간다.”
순백의 마갑 안에서 티르는 씩 웃었다. 네 장의 광익을 전력으로 전개했다.
향하는 곳은 하늘,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빠른 속도.
배낭 안의 워치 로벤이 영문 모를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티르의 몸은 한줄기 섬광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