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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22화)
Chapter 9.(3)
“연회는 즐거우신가요?”
옥구슬이 구르는 듯 감미로운 미성에 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입구에 푸른 드레스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드레스의 디자인은 율리아의 것과 비슷했는데, 등 뒤를 훤히 드러내고 가슴과 목이 이어지는 부분에 고급스런 망사처리가 되어 있는 것이 달랐다.
치맛단 부분은 워치 로벤의 것처럼 한쪽 끝이 갈라져 있어서 하얗고 매끄러운 다리가 얼핏 들여다보였다. 자칫하면 외설스럽게 보일 드레스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이랄까? 밤의 어둠을 빚어낸 듯한 검은 머리칼은 모양 좋게 틀어 올렸고, 하얀 얼굴은 나비를 닮은 작은 가면으로 그 눈을 가리고 있었다.
“…레오나 공주.”
티르의 부름에 여인은, 레오나 레지세이어는 빙그레 웃으며 가면을 벗었다. 왕국 제일이라 불리던 미모를 뽐내며 티르의 곁에 섰다.
“나오지 않는다더니?”
“아예 얼굴도 안 비칠 수는 없지. 적어도 당신에게는.”
레오나는 우아하게 고개를 틀어 티르를 올려다보았다. 베아트리체나 레이그란츠를 매일같이 보고 사는 티르였지만, 완전히 꾸민 레오나 레지세이어의 자태는 가히 반칙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미녀는 세상의 보물이라더니.’
작게 실소한 티르는 가만히 손을 뻗어 레오나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레오나는 그런 티르의 손길을 느끼며 작은 입술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아?”
“무엇을?”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강렬한 직구에 티르는 레오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에서 말했다.
“조금은 후회될지도?”
“겨우 조금인가?”
티르는 대답하지 않았고 레오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만을, 서로의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티르 아벤트는 국왕 전하의 칙사를 맞이하라!”
갑작스런 소란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레오나 역시 급히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빠른 걸음으로 발코니에서 연회장으로 이동한 티르가 본 것은 당황하고 있는 영주들과 기사들, 그런 무리들 사이에서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일단의 무리였다.
“미노 백작.”
레오나가 낮게 속삭인 말에 티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노 백작이라면 제2왕자 칼 레지세이어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 다름 아닌 칙사이니 성의 누군들 그들이 연회장까지 오는 것을 막지 못했을 터였다.
“티르 아벤트는 칙사의 명을 받으라!”
무리 가운데 하나가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외쳤다.
티르는 레오나에게 숨어 있을 것을 손짓으로 전한 뒤 무리 앞에 나섰다.
“내가 티르 아벤트요.”
“무엄하다! 칙사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할까!”
기사 복장을 한 금발머리 남자가 으름장을 놓고 나섰다. 입고 있는 갑옷을 보니 골드 나이츠 소속인 모양이었다.
티르가 당장 무릎을 꿇는 대신 자신을 바라보자 남자는 다시금 무어라 호통을 치려 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수려한 외모의 검은 머리 청년이 그런 남자를 만류했다.
“그만 됐소, 미네스트 경. 그리고 그대가 티르 아벤트요? 나는 칼 레지세이어 국왕 대행님의 명을 받은 칙사 미노 백작이오.”
칼 레지세이어의 젖형제 미노 백작은 그 외모가 뛰어나다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며 티르는 약식으로나마 예를 표했다.
“아벤트 영주 티르 아벤트가 칙사를 뵙습니다.”
칙사라 함은 국왕 대신에 국왕의 뜻을 전하는 자였다. 적어도 그 명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만은 국왕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미노 백작은 티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준비해 온 칙서를 꺼내 들었다.
“나 칼 레지세이어 국왕 대행은 티르 아벤트에게 바로크 영주의 직책을 내린다.”
단 한 줄을 읽어 내렸을 뿐임에도 그 파급은 엄청났다.
바로크 영주.
티르의 바로크 지방 점령을 칼 레지세이어가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연회장에 모여 있던 모두가 그야말로 숨을 멈춘 채 미노 백작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한 티르 아벤트에게 그 영지에 걸맞는 후작의 위를 내린다.”
그야말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영주들은 저마다 부러움과 감탄, 질시와 경의를 담아 티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티르는 웃거나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미노 백작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에 바로크 영주 티르 아벤트 자작은 두 달 뒤 열리는 겨울 무도회 당일에 수도로 출두할 것을 명한다.”
레오나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저것이야말로 본론이었다. 바로크 영주니 후작위니 하는 것들은 모두 다 허울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곳에서 내 친히 후작위를 내리리다.”
읽기를 마친 미노 백작은 칙서를 티르에게 건네주었다.
“분명히 전했소.”
“뜻을 받았습니다.”
티르는 담담히 답했고, 미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는 그만 물러갈 터이니 마저 연회를 즐기도록 하시오.”
미노 백작은 무리들을 이끌고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속 모르는 영주들은 티르의 곁에 모여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지만 레오나와 율리아, 에이다는 웃지 못했다.
‘칼 레지세이어.’
제2왕자.
아비와 배다른 형을 죽이고, 이제는 친동생과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는 남자.
티르는 칙서를 쥔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미소 지었다.
Chapter 10.(1)
그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정점이며,
그에 맞서는 그것은 모든 것의 최후이자 최강이리라.
***
연회가 마무리된 늦은 시각, 율리아와 레오나를 비롯한 모두를 적당히 안심시킨 티르는 홀로 집무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술잔을 채웠다.
붉은색 포도주는 핏빛을 닮았다.
칼 레지세이어가 제시한 기간은 두 달.
겨울 무도회에 출두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이고 보편타당한 함정일까, 아니면 그저 정말로 티르에게 후작위를 내리고 자신의 사람으로 삼으려는 것일까.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왕도와 바로크 지방을 달랐다. 겨울을 맞이함에 따라 존 레지세이어와의 내전이 잠시나마 소강상태에 빠져든 지금, 칼 레지세이어에겐 동원할 수 있는 양질의 병력이 충분했다.
풍문에 따르면 왕자가 보유한 2급 용갑주는 적어도 10대 이상, 영웅의 시대의 유물인 1급 용갑주만 해도 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티르 자신이 강하다고 해도, 솔직히 버거웠다.
가지 않는다면 정면 승부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존을 등 뒤에 둔 칼이 전력을 동원할 리는 없지만, 바로크 지방만의 힘으로 견뎌 내는 것은 무리였다.
단위 수가 달라지는 순간 티르가 전장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1인 군단이라 해도 좋을 용력을 발휘해 전장을 좌지우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용갑주라는 특수 병력에 의존한 소규모 전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티르는 두 번째 술잔을 따랐고, 검마 백야흔은 입을 열었다.
“티르, 우리들의 마지막 기사여.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한 가지를 명확히 했으면 한다.”
티르는 말없이 백야흔이 서 있는 창가를 돌아보았다. 검마라고까지 불리었던 위대한 검사는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왕이 되던, 아니면 대륙을 일통한 황제가 되던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네가 원하는 바라면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힘을 다해 도와줄 용의도 있다. 하지만 너에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티르를 비롯한 영들의 목적은 레스베리아의 제패가 아니었다.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용병왕 행세를 관두고 아벤트 영지로 돌아올 필요도 없었다.
“티르, 나를 비롯한 ‘우리’는 이미 구시대의 망령들이다. 엘더 블루 드래곤Elder Blue Dragon 타뮤리온과의 계약에 따라 그 목적을 추구할 뿐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다른 영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크게 서운한 것도, 딱히 피해 받을 것도 없다. 하지만 티르 너와 ‘그’는 다르다. 그는 애당초 그 목적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그리고 너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백야흔의 목소리는 조금이지만 지쳐 있었다. 본인의 말마따나 그는 이미 구시대의 망령. 청동의 시대라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의 존재였다.
그런 그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엘더 블루 드래곤 타뮤리온, 즉 창천룡 무현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백야흔은 티르를 좋아했고, 가능하면 티르를 돕고 싶어 했지만, 그렇다고 티르가 진짜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지나친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전마 갈천 역시 백야흔의 곁에서 아무 말 없이 티르를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침묵에 사자심왕 레이그란츠는 주의를 환기시키듯 주먹을 휘휘 내젓더니 의자 너머로 티르의 머리를 살짝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냐? 호른에서는 티르도 잘 해 줬잖아. 덕분에 풀 수 있는 봉인도 늘어났고, 지금이야 봉인을 체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잖아? 티르가 왕이 되면 호른에서처럼 용병왕이네 뭐네 하면서‘유산’찾아 뻘뻘뻘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좋지.”
사자심왕이 그렇게 티르의 편을 들고 나서자 놀들의 왕 비단 역시 그 커다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티르에겐 다음 유산을 찾아 나서기 전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쥐 죽은 듯이 지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지. 지금처럼 적당한 자극을 받으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살아 있는 한 조금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상대가 무엇이 되었건 싸워야 한다.”
더욱이 타뮤리온이 말하고, 저 기계장치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걱정한 그날이 도래하는 것이 언제인지는 영들 가운데 아무도 몰랐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수백 년 후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티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왕자란 놈한테 쳐들어갈 거야?”
베아트리체가 평소와 달리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백야흔이 말을 보탰다.
“냉정히 말해서 아직 네 힘으론 1급 용갑주를 압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더 상위의 봉인을 푼다면… 설사 네가 풀 수 있다 하더라도 그때부턴 네 힘을 감지한 ‘중앙’이 움직일 거다.”
중앙, 아발론.
영웅의 시대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들.
티르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풍만한 가슴 너머로 사자심왕이 푸른 눈이 보였다. 용병왕 시절엔 그녀의 도움을 참 많이도 받았지.
잠시 옛일을 떠올린 티르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다시 바로 한 채 백야흔을 바라보았다.
“검마여, 나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웅크리고만 있을 생각 역시 없다.”
티르는 이번엔 전마 갈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마여, 나는 1급 용갑주를 압도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지지 않는다.”
티르는 그들 모두를 처음 맞이했던 날 그러했듯이 웃었다. 계속해서 말했다.
“마녀여, 나는 저 건방진 왕자와 싸울 것이다. 사자심왕이여, 그대와 함께했던 나는 용병왕이다. 숱한 사선을 넘나들었던 전장의 괴물이다. 놀들의 왕이여, 죽음을 뿌리는 자여, 그대의 말마따나 나는 싸울 것이다.”
사자심왕과 마녀는 웃었고, 놀들의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마는 큰 소리로 웃었으며 검마는 즐거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기간은 두 달. 할 일이 많겠어.”
티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