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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기사들 1권(21화)
Chapter 9.(2)
***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레오나 공주의 방에 마련된 발코니 위,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를 즐기던 레오나 레지세이어는 트라이곤 카노에의 말에 아름다운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티르 아벤트는 공주와 현재 동맹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티르가 계획보다 훨씬 수월하게 바로크 지방 제패에 성공했다. 의탁할 곳 하나 없이 기사 네 명만을 이끌고 도망치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상황이 호전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트라이곤의 말마따나 축하할 일임에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나 공주의 심기가 불편한 듯하자 트라이곤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베스크 백작 건이라면…….”
“그거라면 걱정 없어. 바이스 발렌시아라는 변수가 끼어들어서 그렇지… 티르 그 남자는 약한 남자가 아니니까. 바이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을 거야.”
왕궁에서 나고 자란 레오나는 누구보다도 인간과 권력의 생리를 잘 안다 자부할 수 있었다.
적은 짓밟을 수 있을 때 짓밟아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 두면 그게 언제 어디서 흉검이 되어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영지고 뭐고 다 빼앗기고 처자식만 거느리고 도망쳤으니 괜찮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 생명이 있는 한, 그리고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그저 당연한 일상으로 변하는 순간 베스크 백작은 증오를 불태울 것이 분명했다.
백작 본인이 그리하지 않는다 해도 그 자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레오나는 사람의 힘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티르에게 비밀로 한 채 자신들의 적을 제거했다.
티르는 틈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한 번 눈 밖에 난 적에게는 그야말로 무자비하고 잔혹한 남자였다.
이번에 그가 베스크 백작을 살려 준 것은 오로지 바이스 발렌시아를 그 마음까지 완전히 얻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레오나는 지금 겨우 구한 동맹의 마음 약함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여 호국경과의 동맹 문제 때문에 그러십니까? 호국경이 비록 지금은 움직이고 있지 않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힘을 빌려 줄 것입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호국경 가울링 후작은 그런 남자였으니까. 이야기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기사도와 충성을 그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남자였으니까.
“그럼 대체…….”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레오나의 심기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레오나는 빙글 돌아서서 트라이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대로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조금 웃기는 소리지만…….”
말꼬리를 흐린 레오나는 아주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트라이곤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으니까.
레오나는 짐짓 태연한 척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티르 그 남자,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아.”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트라이곤은 멍한 얼굴로 되묻고 말았다.
레오나는 검게 염색한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그와 우리의 관계는 너무 아슬아슬하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당장에 그가 3급 용갑주를 굳이 그 에이다라는 여기사에게 준 걸 생각해 봐라.”
단순히 효율만을 고려한다면 에이다가 아닌 기사 랜스터가 3급 용갑주를 운용하는 것이 옳았다. 티르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다에게 용갑주를 주었다.
그저 에이다가 동생처럼 귀여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레오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티르 아벤트는 아직 공주와 그 휘하 세력들을 완전한 자기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조만간 승부를 보긴 봐야겠어.”
“승부… 말씀입니까?”
어째 미묘하기 짝이 없는 단어에 트라이곤은 얼이 살짝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평생을 검과 나라에만 바쳐 온 무인으로서는 뭔가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영역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레오나 역시 그런 트라이곤을 챙겨 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티르의 뒤를 졸졸졸 쫓아다니는 에이다만 문제가 아니라 율리아도 어쩌면 문제의 여지가 있을지 몰랐다. 귀족가의 재산 유출 방지법 중에 하나인 근친혼을 걱정한다기보다는 율리아가 레오나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걱정된 달까? 그녀는 에이다와 친해도 너무 친했다.
루레인이라는 여자 메카닉도 어째 티르를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고, 어제 돌연 나타난 워치 로벤이라는 색기 넘치는 여자도 신경 쓰였다.
미모로는 그중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레오나였지만, 티르 그 작자가 단순히 얼굴에 혹할 자도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똑똑하고 어른스럽다고 해도 레오나는 이제 겨우 열일곱 먹은 소녀였다.
트라이곤이 잠시 이런 레오나의 소녀다움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망설일 즈음, 레오나는 다시 돌아섰다. 발코니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 밤하늘을 우러렀다.
“그래, 승부.”
결전의 장소는 이제 곧 열릴 영주들의 대연회. 레오나는 두 손을 꼭 거머쥐었다.
***
티르 아벤트에게 연회를 좋아하냐 물으면 ‘싫어하진 않는다.’ 정도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티르는 맛있는 음식 먹기를 꽤나 즐겼다. 술도 싫어하지 않았고 가볍게 취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기분도 좋아했다.
화려한 걸 싫어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낭비의 수준이면 모를까 티르도 나름 눈 호강하기를 즐겼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싫은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용병왕 때도 그러했지만 티르는 금욕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마녀 베아트리체나 사자심왕 레이그란츠 같은 예외를 제하고는 티르는 보통 남정네들이 그러하듯이 여자를 좋아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티르가 연회를 ‘싫어하진 않는다.’ 정도로만 평하는 것은 연회장에서 오가는 대화 때문이었다.
각종 사교장을 비롯해 연회장은 창칼이 오가지 않을 뿐 치열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혀와 입술은 갈고닦은 전투의 기량이었고, 타고나고 가꿔 온 외모는 일종의 무기였다.
용병왕 시절 참여했던 수많은 연회들에서 티르는 이 모든 것들을 깨달았고, 그랬기에 연회장을 멀리하였다.
뭔가가 부족한 자들이 그 부족한 뭔가를 얻기 위해 연회장에서 저마다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피곤한 것은 피곤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티르는 바로크 지방의 전 영주들을 소집하는 연회를 열 것을 선언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번의 연회는 필요하다. 그러니 연회를 연다. 그저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의 발산일 뿐이었다.
“다들 바쁘군.”
티르 자신도 연미복을 하나 새로 맞추기는 했지만 여자들 쪽은, 특히나 율리아는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하는 모양이었다. 수줍어하는 루레인과 부끄러워하는 에이다를 양옆에 대동 채 티르의 집무실에 쳐들어온 율리아는 티르가 돌아온 이래 처음으로 당당히 ‘용돈’을 요구했다.
그 패기 넘치는 표정과 자태에 티르는 멍한 얼굴로 얼마를 원하느냐고 되물었고, 율리아는 벌었을 때 쓰라며 아벤트 령 한 해 수입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거액을 강탈해 갔다.
율리아와 에이다, 루레인이 그렇게 돈을 가져갔으니 레오나만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티르는 트라이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아직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좋으니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겠다며, 티르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일이 대충 이쯤 돌아가자 티르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실존 미녀들 가운데 마지막인 워치 로벤에게도 혹여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워치 로벤은 극구 사양했지만, 티르가 생각하기에 워치 로벤도 이왕지사 자신의 수하가 되었으니, 봉급을 챙겨 줄 필요도 있었던 터라 그녀에게도 얼마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뭔가 본격적이군.”
지난번 베스크 백작이 열었던 것처럼 얼렁뚱땅 지나가는 간소한 연회가 아니었다.
지난번과는 성격 자체가 달랐기에 홀멘에 자신의 딸이나 부인을 데리고 오는 영주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연회 날이 다가왔다.
연회 장소는 홀멘 성의 메인 홀이었다. 영주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지, 그리고 각 영지의 기사들과 그들의 파트너들까지 참가했기에 지방 영주의 연회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상당했다.
왕도에서 열리는 대귀족들의 연회라면 등장 순서까지 따져 가며 복잡하게 굴었겠지만, 티르는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연회장 중앙에 마려한 연단에 서서 뻔하다면 뻔한, 하지만 확실한 의미를 담은 이야기를 전한 뒤 연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연회가 시작하자마자 각지의 영주들은 벌 떼처럼 티르에게 모여들었다.
그야말로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율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의 드레스 차림이 궁금했던 티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주들을 허투루 상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아라. 이것도 다 일이다.’
검마 백야흔의 충고는 지당했지만 어쩐지 모르게 얄밉게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영주들을 상대한지 1시간쯤 지났을까. 겨우겨우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친 티르는 지친 얼굴로 연회장 한구석에 마련한 소파에 걸터앉았다.
“수고했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율리아가 환한 얼굴로 서 있었다. 화려한 백금발에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가 율리아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어때? 예쁘지?”
율리아는 치맛단을 살짝 집더니 그대로 빙글 한 바퀴를 돌았다. 분명 눈이 절로 돌아갈 만큼 예쁘고 앙증맞은 자태였지만 티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야해.”
“에?”
“어깨가 훤히 다 드러나잖아.”
율리아의 드레스는 허리 아래로는 넓었지만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목을 살짝 감싸는 드레스는 꽤나 맵시가 있어서 율리아의 잘록한 허리라인이 잘 살기는 했지만, 양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슈나이더는 뭐라던?”
“그냥 좋아 죽지.”
티르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율리아는 킥킥 웃었다.
티르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연회장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에이다랑 루레인도 봐봐. 깜짝 놀랄걸?”
“네, 네… 와우?”
적당히 답하던 티르는 마지막에 가서 감탄사를 토했다. 율리아와 미리 이야기라도 했는지 연회장 한구석에 꽃처럼 서 있던 에이다와 루레인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에이다는 붉은 머리칼에 어울리는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자칫 천박해 보일 수도 있는 선홍색 드레스였지만 에이다가 입자 부끄럼 잘 타는 화사한 장미를 보는 듯했다.
에이다는 하얀 볼을 발갛게 물들인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루레인은 짧은 머리를 살짝 틀어 올린 뒤 분홍색 드레스를 입어 귀여운 이미지를 강조했다.
세 사람 모두 저마다에게 어울리는 액세서리들을 모양 좋게 착용한 것을 보니, 율리아가 신경을 굉장히 쓴 모양이었다.
“예쁘다, 이렇게 예쁜 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드레스 좀 입어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는데?”
티르는 기탄없이 말하며 습관대로 에이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다는 몸을 배배 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눈치였고 루레인도 얼굴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문득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린 티르는 연회장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흐릿하게 한 채 주변 모두를 감시하고 있는 워치 로벤을 보았다.
주변 감시를 하다가 티르를 보고 놀라서 저도 모르게 기척을 낸 것을 티르가 느낀 것이었다.
워치 로벤 역시 붉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디자인이 꽤나 파격적이라면 파격적이었다.
가슴께 위를 훤히 드러낸 상체는 풍만한 가슴 사이로 가슴골이 다 보일 정도였고, 치마 역시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한쪽 면이 길게 찢어져 있어서 워치 로벤의 매혹적인 각선미를 보일 듯 말 듯 가리고 있었다.
워치 로벤에게 향했던 시선을 다시 율리아와 에이다, 루레인에게 돌린 티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 주변에 미인이 많긴 하구나.’
용병왕 시절에도 주변에 미인이야 많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으니까.
율리아를 비롯한 모두와 짧게나마 시간을 보낸 티르는 다시 몰려들려는 영주들을 피해 이번에는 홀로 발코니로 나섰다.
“보람이 있긴 한데 지치는구먼.”
나중에는 영주들뿐만 아니라 그 딸들, 거기다 티르의 무용담을 듣고 싶어 하는 기사들까지 몰려들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재미 좋던데?”
어느새 나타난 베아트리체가 티르의 팔짱을 꼈다. 지난번에 당해 놓고도 모자랐는지 은연중에 풍만한 가슴을 티르의 팔에 밀착시키며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
“하핫, 그래도 나랑 베아트리체만 하겠어? 몸매라면 우리가 몇 수 위니까.”
사자심왕 레이그란츠는 남자처럼 웃으며 여성스럽기 짝이 없는 몸을 움직여 야릇한 포즈를 취했다.
도대체 은의 종족은 무슨 생각으로 전투용인 요정왕 시리즈를 저런 몸으로 만들었다는 말인가.
가슴이 커 봐야 전투에 방해만 되지 좋을 것이 하나도 없건만.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티르는 자꾸만 사자심왕에게 돌아가려는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이쯤 되면 백야흔이나 갈천이 나와서 뭔가 분위기를 환기 시켜 줘야 하건만 이것들이 다 짰는지 나오지도 않았다.